본문 바로가기
현민의 독국유학기

[현민의 독국유학기] 어젯밤의 이야기

by 북드라망 2024. 11. 26.

어젯밤의 이야기


어제는 밤 늦게까지 글을 쓰다가 스스로에게 약간 실망하면서 초콜렛을 찾으러 부엌에 들어갔다. 부엌에는 레오가 있었다. 레오는 두 달 전쯤 이사 온 이탈리안이자 독일인이다. 내 윗방에 사는데 내가 늦게 자기 때문에 레오가 얼마나 늦게까지 안 자는지 그의 발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 레오는 늦은 밤에 꼭 담배를 한 대씩 피러 나온다. 문을 열어 인사를 하자마자 그가 쇼파 위에서 자고 있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고양이를 가리켰다. 레오는 그 고양이와 같이 찍은 셀카를 보여주었다.

나와 레오가 같은 물건을 산다면 나는 설명서를 아예 읽지도 않고 무작정 끼워보는 편인 반면에 레오는 침착하게 읽은 뒤 하나씩 맞춰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겠다. 레오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물리적인 평안도, 마음의 평안도 주는 사람이다. 마주친 김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나는 레오와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잘 경청하는 사람이다.

레오는 약간 피곤하다며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요새 나의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독일에 어떻게 해야 더 머무를 수 있을지. 아니 정말 내가 독일에 머무르고 싶긴 한 건지. 나는 누가 묻지 않으면 나에 대해 말하기를 어려워하는데, 레오에게 말할 때는 그가 귀 기울여 줄 걸 알았다. 독일에서 사는 외국인으로서 내 편인 독일인(이자 이탈리아인이기도 하지만)이 있는 게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나는 레오를 만나고 나서 알았다.

그렇게 담배가 다 타가던 중 갑자기 베이자가 부엌 문을 벌컥 들어왔다. 베이자는 우리 집의 엄마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요리를 한다거나 청소를 하는 전형적인 너그러운 엄마의 모습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애는 다른 애들의 음식을 빌려 먹고, 누가 청소를 안 하면 박박 화를 내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곳을 강하게 사랑한다. 가장 꼭대기 방에 사는데도, 요리를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부엌에 제일 오래 머무르는 사람. 나는 무언가 불편할 때 무엇이 불편한지, 그것이 정말 불편할 일이 맞는지 대해 몇일 숙고하며 앓는 편이라면, 그 애는 몇 마디 말로 상대에게 자기 기분을 또렷하게 말할 줄 아는 애다.

베이자는 최근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방금 처음으로 크게 싸웠다고 했다. 그때 한 개비만 피고 들어가려 했던 나와 레오는 주저 없이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들었다. 부엌에 나오면 나는 항상 이런 식이다. 내 마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활짝 열린다. 부엌에서의 시간은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간다. 우리는 와인을 한 병 땄고, 서로가 경험한 연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며칠 전 있었던 파티에서 한 여자애의 구남친과 현남친이 싸우려고 했던 이야기도 꺼냈다. 독일 사람들은 질투를 덜 느끼지 않냐는 질문에 레오는 전혀 그렇지 않다며, 클럽에 가거나 취한 그들을 보면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고, 한국인들은 대체로 침착하고 평온해 보이는데 이런 문제 없지 않냐는 말에 나는 너희가 나만 봐서 그런 거라고 답했다. 우리의 최종 결론은 모든 인간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은 똑같다로 귀결됐다.

레오가 베이자에게 터키 정치인에 대해 물으면서, 대화의 흐름은 터키와 독일의 관계로 나아갔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의 도시 재건에 많은 터키인들이 동원되면서, 터키인 커뮤니티는 지금까지도 단연 독일에서 가장 큰 외국인 커뮤니티다.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이 되너(터키식 케밥에서 기원한 음식)인만큼 독일 사회 속 터키의 영향력은 크다. 그러나 베이자는 터키인으로서 이야기를 시작하며 아직도 터키인들은 차별받는 위치에 있다고 했다. (나중에 좀 더 찾아보니 독일의 네오나치(나치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민족이 터키인들이라고 한다.) 베이자는 또 한 가게에서 어떤 독일인이 자기에게 아랍어로 말을 걸었다면서 불쾌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백인들이 아시안만 보면 니하오를 하는 것과 비슷하게 이해했다. 터키인을 아랍인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게 그들에겐 꽤나 불쾌한 지점인 것 같았다. 그리고 베이자는 독일인 남자친구가 조부모님께 터키인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했는데 느닷없이 ‘나는 터키인이라고 신경 쓰지 않는다.’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 말은 곧이어 조금은 신경 쓰인다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우리는 깔깔 웃었다. 쿨해보이고 싶었지만 결국 쿨하지 못했던 오래된 사람들이 웃겼다.

이어서 레오도 독일인과 이탈리안 정체성을 가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세계에 제일 나쁜 영향을 끼쳤던 나라는 분명 독일일 거라고 말했다. 자기 조상이 벌였던 일들에 섬세한 책임을 느끼는 레오를 보며 그가 좋은 사람이어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좋은 교육을 받아서일까 궁금했다. 나에게는 레오의 태도가 많이 생소했다. 한국인으로서 접했던 일본이라는 또 다른 전범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이 젊은 세대에게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역사교육을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에는 잘못을 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특별해 보였다. 독일이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는 맥락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물론 누가 봐도 큰 잘못을 했기에 숨을 곳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잘못을 뉘우치는 척이라도 안 하면 세상에서 배척될까봐 그랬을지도 모른다.)

레오에겐 폴란드계 독일인 여자친구가 있는데, 폴란드는 독일과 1000년 동안이나 피 터지게 싸운 역사가 있고 무려 독일에 의해 국가가 2번이나 멸망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레오가 폴란드인인 여자친구 부모님께 자신을 독일과 이탈리아 혼혈이라 소개했을 때, ‘그렇구나, 너는 이탈리아인이구나.’ 하며 독일인 정체성은 지우고 이탈리아인으로만 이해하고 싶어 하셨다고 했다. 얼마나 그 나라에 대한 기억이 고통스러우면 그럴까? 이런 것 또한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나도 이야기를 꺼냈다. 백인들은 니하오가 왜 인종차별인지 모르는 거 같다는 이야기. 내가 한국인이라고 나를 소개하면 사람들은 항상 그저 김정은을 헐뜯고 비웃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 이제는 아무도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통일이 안 될것 같다는 이야기. 그들은 내 이야기들을 잘 들어주었다.

이 대화를 하며, 나는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시안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유럽에 산다는 건 자주 편견과 오해 또는 무례함에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줄곧 내가 받은 차별 혹은 나와 비슷한 형태의 이야기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 듣는 차별의 형태가, 세상이 얼마나 굴곡지고 엮여있는지 다시 인식하게 했다. 독일에 오면 독일인들만 만날 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세상에 얼마나 혼혈이 많은지,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에 깔끔하게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보았던 것처럼. 세상에 수많은 순혈 싸움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느꼈던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땅이 어떤 이야기들로 겹쳐 있는지 조금이나마 들여다 본 것 같았다.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타인에 의해 제대로 이해받고 싶어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물어봤다. 만약 너가 나라를 고를 수 있다면 어디를 고를 것 같아? 베이자는 날씨 좋은 호주, 레오는 이민자에게 개방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캐나다, 나는 유럽의 강대국이자 복지 좋은 독일을 말했다. 우리가 현재 무엇을 바라는지 얼핏 보이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나라를 정할 수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재밌는 질문이었다.

우리 셋은 모두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와인 한병이 끝난 기점으로 우리는 겨우 이야기를 멈춰보기로 했다. 이제는 잠에 들어야 했다. 부엌의 불을 끄고 나오며 베이자가 Thanks for listening(들어줘서 고마워)를 나지막히 말했다. 레오는 Thanks for sharing(나눠줘서 고마워)로 답했다. 나도 곧이어 Thanks for being here(여기 있어줘서 고마워)를 말하며 1층의 내방으로, 레오는 2층의 그의 방으로, 베이자는 3층의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숙취와 피곤함에 기꺼이 학원에 가길 포기하고 푹 잤다. 그러고 오후쯤 부엌에서 셋이 다시 만났는데 레오도 학교에 가지 않았고, 베이자도 직장에 아프다고 하고 안갔다고 했다. 셋이 껄껄 웃으면서 담배를 피웠다.

 

 

 

부엌에서 스도쿠 하고, 노래 부르고, 주인 없는 고양이를 안아주면 시간이 금방 흐른다
언젠가 꼭 부엌의 입장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날씨가 좋으면 밖에 나가 앉아 있는다

 

 

글_현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