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보편성’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월간 이수영 2023년 12월호
중동에서 이스라엘 대 하마스의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지구 반대쪽 서울 청계천에서도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시위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쪽은 팔레스타인 민족의 해방을 외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하마스에 의해 납치된 인질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친팔레스타인과 반팔레스타인, 이들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뿐일까요? 철학적으로 이 두 진영의 사유 체계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 일을 잘하는 것은 이성의 사적사용일 뿐
칸트는 계몽을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미성년이란 ‘타인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미성년은 이성이 부재한 상태가 아니라, 이성을 사용하지만 타인의 지도에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칸트는 이렇게 이성을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고 외부에 이끌려 사고하는 것을 이성의 공적사용과 구분하여, ‘이성의 사적사용’이라고 합니다.
이성의 사적사용이라 하면 개인적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지만, 칸트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이성의 사적사용은 ‘공동체 내부의 각각의 시민적 지위나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의사는 의사로서 사회에서 주어진 각자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이성의 사적사용입니다. 우리 사회는 자신의 직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고 이에서 벗어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하지만 칸트는 자신의 본분에 해당하는 일을 잘하는 것, 즉 이성의 사적사용으로는 계몽에 이를 수가 없다고 봅니다. 각자의 사회적 직분에서 요구되는 것 이상을 사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의 사적사용은 우리를 공동체 안에서 작용하는 분업적이고 기계적인 체계에 순응하게 합니다. 여기에서는 공동체의 규정을 따르는 복종이 기본 원칙이며, 목적에 대한 질문이나 논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사유합니다. 공부공동체에서 “나는 주방매니저인데…”라든지 “나는 처음 왔으니까…”라는 말을 흔히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에는 나는 주어진 공동체의 규칙에 복종만 하고 더 이상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언어입니다.
한 국가의 국민이나 민족으로 살아가는 것도 칸트에게는 이성의 사적사용일 뿐입니다. 국가나 민족이 아무리 큰 집단이어도, 그것이 어떤 특수하고 단일한 규칙에 의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한 이성의 사적사용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언제나 ‘믿고 따르라’는 규칙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칸트가 정의하는 계몽의 수준인 스스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려면, 이성의 사적사용이 아닌 공적사용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성의 공적사용으로 가능한 타자와의 소통
그렇다면 이성의 공적사용이란 어떤 것일까요? 칸트는 ‘학자의 자리에 서는 것’을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선 학자는 어떤 집단이라는 부분에 속해 있지만, 그 부분을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지켜야 하는 특정한 자리나 직분이 없으므로, 세계시민의 입장에 설 수 있습니다. 또한 학자는 책을 통해서 대중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므로, 자신을 개방하여 타자의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본분을 고수하려는 완고함이 없을 때, 우리는 시민이라는 위치에서도 과세의 부당함을 이야기할 수 있고 성직자여도 교회 내부의 문제점에 대하여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속한 집단을 벗어나 사유를 확장하는 것이 곧 공적인 이성의 사용입니다.
이성의 사적사용의 가장 큰 문제는 합리성이 그 집단에만 한정된다는 점입니다.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에게는 그가 일하는 공장에서의 합리성이 있고, 장교에게는 그의 조직에서 통하는 다른 합리성이 있습니다. 각 집단의 합리성은 그 조직 안에서만 작동하여, 다른 집단과 소통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성의 사적사용에서의 합리성은 보편성을 띠지 못합니다. 국가 간에도 한 나라의 합리성이 다른 나라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늘 국가 간의 충돌을 마주하게 됩니다. ‘도둑질해선 안 돼’라고 말을 하면, 그것은 나에게도 해당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들 다 도둑질하지 마. 나만 빼놓고’처럼, 나만 예외로 두는 것은 보편성에 어긋나는 것이고 이성의 공적사용이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한 친팔레스타인과 반팔레스타인 시위에 칸트의 사유를 적용해 보면, 두 진영은 서로 대립하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치는 쪽은 ‘너희들도 나라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나라를 가져야 한다’는 보편적 사유, 즉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마스의 즉각적인 인질 석방을 요구하는 반팔레스타인 쪽의 주장에는 이런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민족은 75년이 넘게 가자지구에 이스라엘의 인질이 되어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두 시위는 단순히 집단 간의 의견 대립이 아니라, 사유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흔히 우리는 나라나 민족 간의 폭력을 마주하게 됩니다. 보편성에 대한 사유의 부재가 비이성적인 적대감으로 집단 간의 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내 본분과 자리에서 벗어나 보편성을 지닌 이성의 공적 사유에 이를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자에 대한 적대감에서 벗어나 소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자세한 강의의 내용은 강감찬 TV 영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녹취정리 - 양희영(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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