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 대하여 : 스피노자, 맑스, 칸트의 생각
월간 이수영 2023년 7월호
어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환상’입니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환상의 기반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환상은 올바른 통찰에 기초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 삶을 왜곡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스피노자가 바로 환상과 전투를 벌인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반면 맑스와 칸트는 삶에서 모든 환상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환상이 우리 삶에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기는 것이죠. 환상에 대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철학자, 스피노자, 맑스, 칸트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지로부터 오는 스피노자의 환상
스피노자는 우리의 관념이 신체를 통해서만 획득된다고 생각합니다. 관념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 신체에 새겨진 결과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의 한계로 인해서 우리 삶에 여러 환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유, 목적인, 신이라는 환상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자유나 자유의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며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필연성으로 보는 스피노자에게 그 일의 원인도 모르면서 느끼는 ‘자유’는 환상일 뿐입니다. 또한 ‘목적인’은 타자의 행위에 대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타자의 행위를 만든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못 보고 목적이 있다고 여기는 데서 발생하는 환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유의지를 믿는 사람들은 나 또는 타자가 만들지 않은 대상들의 최종기원으로 ‘신’을 상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만든 군주로서의 신이 있다는 환상을 가지는 것이죠.
이렇게 환상에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되면, 다른 세계를 꿈꿀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은 것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환상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세계를 보지 못하는 ‘무지’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원인을 보지 못하는 무지에서 온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삶에서 환상을 제거하기 위해 싸울 필요가 있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공부를 해나간다는 것은 환상을 극복한다는 뜻입니다.
실천으로부터 오는 맑스의 환상
맑스는 하나의 상품에 ‘사용가치’와 ‘가치’가 결합하여 있다고 봅니다. 사용가치는 그 물건이 나에게 유용한 정도이고, 가치는 타자에게도 유용한 정도입니다. 나에게만 유용한 것은 상품이 되지 못합니다. 상품의 가치는 자체적으로 파악될 수 없고, 반드시 ‘등가형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마우스 1개가 귤 500개와 교환된다면, 마우스의 등가형태는 귤 500개입니다. 따라서 등가형태는 다른 상품과 어떻게 교환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상대적 가치입니다.
상품이 서로 교환되는 과정에서, 독점적으로 등가형태를 담당하는 상품이 없으면 교환이 매우 복잡해집니다. 따라서 편리성을 위해 등가형태만을 담당하는 상품이 따로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화폐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자기 상품의 사용가치가 없어지고, 등가형태인 화폐로 쓰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느 한 상품이 교환에서 제외되어 화폐로 독립하게 되었을까요? 맑스는 이것을 파우스트의 대사를 따라서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화폐의 독립은 어떤 협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그 상품이 독립적인 가치를 가진 것처럼 이미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상품의 가치는 상품(사물) 안에 없습니다. 가치는 상품과 상품 사이의 관계를 알려주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화폐 자체가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맑스가 이야기하는 물신주의입니다. 또한 이것은 환상입니다. 스피노자에게 환상은 무지의 차원이지만, 맑스에게 환상은 ‘실천’의 차원입니다. 화폐의 물신 작용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가 삶에서 화폐라는 물신을 그대로 작동시키고 실천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자본주의의 구조 아래에 살고 있으므로,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숭고로 드러나는 칸트의 환상
칸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현상계)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의 질서나 힘의 투쟁만으로 세계가 존재한다면, 도덕이나 의무, 정의, 윤리처럼 우리 삶에 의미를 만들어주는 것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칸트는 ‘자연의 질서가 아닌 자연의 목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인 ‘예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의나 윤리 같은 예지계적 요소들은 자연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삶에 의미를 주는 요소들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예지계는 현상계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균열이나 예외로 존재합니다. 칸트는 현상계의 균열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을 ‘숭고’라고 말합니다. 숭고란 절대적으로 큰 것이며, 수학적이나 논리적으로는 잴 수 없는 미학적으로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하나의 형상으로 종합하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종합은 보고 들은 것을 상상(기억)하는 과정입니다. 엄청난 위력을 가진 자연을 보았을 때, 우리의 상상력은 그 대상이 어마어마해서 종합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상상력이 한계에 내몰릴 때, 상상력은 마음의 전체를 종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의 상상력이 감당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서, 예지계에서 떠오르는 이념이 숭고입니다.
숭고함은 자연을 보고 떠올려지지만,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숭고는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숭고는 이 세계의 균열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칸트는 숭고가 바로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칸트는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숭고가 우리를 윤리적으로 살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처럼 칸트도 환상이 우리 인식의 무지나 불철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의 본질적인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 자세한 강의의 내용은 강감찬 TV 영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녹취정리 - 양희영(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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