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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이수영

[월간 이수영] ‘무(無)에 대한 의지’에 대하여

by 북드라망 2024. 2. 6.

‘무(無)에 대한 의지’에 대하여

월간 이수영 2023년 4월호

 

부제: 무에 대한 철학자들의 다른 생각
니체는 허무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삶을 병들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칸트와 헤겔은 공백이나 무(無)가 인간의 본원성에 속하므로, 이것들을 바탕으로 인간을 규정하고 이해하고자 합니다. 니체, 칸트, 헤겔, 이 세 철학자가 인간을 어떻게 다르게 사유하는지, 공백과 무와 같은 부정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니체: 허무에 대한 욕망으로 삶을 적대시하는 인간
니체는 인간은 ‘허무를 강력하게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허무에 대한 욕망은 우리에게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생성’된 것입니다. 누가 허무를 욕망하도록 만들었을까요? 바로 니체의 책 『도덕의 계보』에 여러 번 등장하는 ‘금욕주의적 성직자’입니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다르게 되고 싶은 욕망이 누구보다도 강한 자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삶이 권태롭고 힘들지만, 다르게 되지도 못하고 다른 곳에 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다르게 살 수 없으므로, 세상의 기본원리를 바꾸어 버리는 ‘왜곡’과 ‘전도’의 전략을 취합니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의 왜곡과 전도에 의해 인간은 삶에 실존하지 않는 허무와 공백을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왜곡과 전도는 ‘밖과 안’, 두 가지 방향에서 일어납니다. 밖을 향하는 전도의 과정은 ‘원한’입니다. 원한은 타자를 악(惡)하다고 비난하면서 나를 선(善)하게 만드는 구도입니다. 그러므로 원한은 밖을 향한 부정입니다. 독수리가 어린 양을 잡아먹는 것은 존재의 활동입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자신의 힘을 자연스럽게 발휘한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공격할 능력이 없는 약한 양은 선한 자가 되어 버립니다. 강자는 악, 약자는 선, 이런 구도 아래에서 행위나 활동을 부정하고 봉쇄하는 금욕주의적 이상이 만들어집니다.

안으로 향하는 전도는 ‘죄와 벌의 해석학’입니다. 삶의 고통은 계속되고, 그 고통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져야 합니다. 따라서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유일신을 만들어서, 타자를 향하던 원한의 방향을 나로 바꾸어 버립니다. 전지전능하고 금욕주의적인 신에 비해 인간은 항상 불완전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미완의 존재로 여기며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과 전도의 과정은 삶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힘을 발휘하는 주체, 사랑과 용서라는 절대선, 초월적 신 등등 허구를 바탕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금욕주의적 이상은 바로 무, 공백, 비존재에 대한 욕망입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만 삶이 살만하게 여겨진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이 병들었다는 증거라고 니체는 보고 있습니다.
  

칸트: 공백에 대한 욕망으로만 가능한 자유
니체와 달리, 칸트는 ‘공백에 대한 욕망’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대상을 욕망하고, 그것에서 쾌락을 얻습니다. 그런데 개별 대상에 대한 쾌락이 내 의지를 지배하고 결정한다면, 우리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를 인간으로 규정해 줄 수 있는 것은 개별성이 아닌 ‘보편성’에 있습니다.

보편성은 특정한 질료나 대상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의 지배를 받을 때 확보됩니다. 보편성은 내용이 아닌 형식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법칙으로 만들어질 수 있고, 이 보편성의 법칙이 바로 칸트의 ‘정언명령’입니다. 정언명령은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원리에 타당하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무엇을 하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고, 무조건적으로 수행하라는 형식만 있습니다.

삶에는 우리를 구속하는 수많은 외적 원인과 조건이 있습니다. 이런 외부의 인과에서 벗어나, 주체 단독으로 내용을 채워놓으라는 것이 정언명령입니다. 어떤 행위를 할 때, 그것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나의 판단이고 내가 책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체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쾌락이나 행복을 얻기 위한 도구적 이성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정언명령이 작동되는 실천적 이성의 지점에 있습니다. 정언명령에는 내용이 없으므로, 이것이 바로 ‘공백과 무에 대한 욕망’입니다. 칸트는 균열과 공백에 대한 욕망이 우리 삶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욕망이야말로 우리가 자유롭고 숭고하게 살도록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헤겔: 비존재에 대한 욕망으로 발전해 온 역사
헤겔은 인간 자체를 형성해 온 것은 죽음이나 무와 같은 ‘부정적인 것의 위력’ 덕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헤겔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은 대상의식(의식)에서 자기의식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대상의식은 진리가 바깥의 대상에 있는 것이고, 자기의식은 진리가 ‘자기확신’의 형태로 나에게 존재합니다.

자기의식은 바깥에 있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겔은 동물에서 인간으로 넘어서려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자의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비존재에 대한 욕망이 인간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존재에 대한 욕망은 ‘무에 대한 의지’입니다. 그러니까 헤겔은 인간의 본원성 속에 무에 대한 의지가 있다고 봅니다.

타자의 욕망을 얻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타자의 승인을 받으려면, 자기 존재를 걸어야 합니다. 생명에 연연하는 자는 노예가 되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자만이 주인이 됩니다. 노예는 ‘공포와 노동’이라는 형성(Bildung)의 과정을 거쳐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가 전반적으로 흔들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억제된 욕구인 노동은 모두 자기 부정의 과정입니다. 헤겔은 노동과 공포라는 자기 부정을 통해서, 노예들이 주인으로 서로를 인정하게 된 사회가 근대사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헤겔은 비존재에 대한 욕망인 부정성이 인간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고, 부정성의 과정을 통해 역사가 발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 자세한 강의의 내용은 강감찬 TV 영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녹취정리 - 양희영(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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