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애’에 필요한 것들 : ‘반복’ 개념을 중심으로
월간 이수영 2023년 6월호
니체는 그의 책, 『즐거운 학문』(1882년)에서 새해 소망으로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고 운명을 사랑하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니체의 운명애(Amor fati)는 이 삶이 여러 번 반복되어도 똑같이 살기를 원하는 ‘영원회귀’와 중요한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운명애는 삶을 긍정하겠다는 단순한 각오가 아니라, ‘반복’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니체의 반복은 다른 철학자의 반복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능성’을 제거한 후에 오는 운명애
니체에 따르면, 범죄를 대하는 태도에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우선 선사시대에는 범죄에 대해 ‘생각지도 못하던 일이 벌어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신중하지 못했다는 감각만 있습니다. 이 방식에서 범죄자는 죄인이 아니라, 단순히 손해를 끼친 자일뿐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합당한 처벌만 받으면, 자유로워집니다. 반면, 우리는 범죄를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됐는데’라는 태도로 대합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죄인이 됩니다. 그리고 범죄자 자신도 스스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후회의 감정과 더불어 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라는 후회는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라는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죄의식과 원한감정을 인간의 병적인 면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병적인 면모들이 바로 ‘가능성’에 대한 욕망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니체가 보기에, 우리에게 다른 가능성에 대한 열망을 품게 한 것은 칸트의 ‘물자체’ 개념입니다. 현실 바깥의 초월적인 것을 인정하는 물차제가 ‘존재하는 것’을 자꾸 ‘존재하지 않는 것’에 비춰서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비교할 대상인 물자체가 없다면, 존재하는 것 자체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니체는 우리 삶을 건강하게 만들려면 물자체, 즉 다르게 될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니체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은 ‘권력의지’로 움직입니다. 니체는 자유로운 의지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세계가 인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카오스적 필연성’이 작동하는 세계라 불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의지와 인과성이 배제된 세계에서 작동하는 권력의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일치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권력의지는 다르게 될 가능성이 모두 제거된 상태입니다. 권력의지로 작동하는 세계에서는 무엇을 원망하고 저주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가능성이 제거된 세계에서만 ‘이 삶이 무수히 반복되어도 다시 살기를 원하겠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의 답이 가능합니다.
순간이 곧 영원성
니체는 동일한 삶의 반복을 긍정하는 영원회귀 사상을 플라톤으로부터 영향 받았습니다. 플라톤은 『메논』에서, 배움이란 완전히 알지도 않고 완전히 모르지도 않은 상태에서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알고 있다면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완전한 무지의 상태이면,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므로 탐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혼불멸설을 믿는 플라톤에게 배움은 예전에 알고 있었는데, 깜빡 잊어버린 것을 ‘회상’하는 것으로서만 가능합니다. 과거에 배웠던 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배움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반복이 가능해지려면, 완전한 앎도 완전한 무지의 상태도 아니어야 합니다. 플라톤은 이것을 파르메니데스의 변화에 대한 생각에서 가져옵니다. 운동하는 것은 운동만 하고 있고, 정지한 것은 계속 정지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운동하지도 않고 정지하여 있지도 않은 지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순간(moment)’이라고 불립니다. 교묘하게도 이 운동과 정지 사이의 순간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순간은 변화가 생성되는 지점입니다. 시간 안에 있는 대상은 언제나 정지 상태에 있거나 운동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운동도 정지도 아닌 상태에 있는 순간은 시간 바깥에 있으므로, 영원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우리의 배움과 변화의 본질이 영원성과의 접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것을 배우거나 운동하는 것이 멈추는 것과 같은 변화의 순간은 모두 시간 밖에 있는 영원성과의 만남입니다. 이것이 니체의 영원회귀가 계절과 같이 매번 순환하여 돌아오는 반복이 아닌 이유입니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영원회귀의 반복은 영원성과 접속하는 ‘순간의 반복’을 말합니다.
니체 vs 키에르케고르의 반복
니체보다 먼저 반복의 개념을 이야기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년)입니다. 플라톤의 반복이 ‘과거의 반복’이라면,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 반복’을 이야기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과거를 되살리는 반복은 불가능하고, 오직 신앙에 의한 종교적 반복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반복이란 ‘새로움을 낳는 반복’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나의 통념을 유지하면서는 불가능하고, 나 자신을 신에게 던져서 새로운 존재가 될 때만 가능합니다.
구약성서의 <욥기>에 나오는 욥은 선한 일만 했지만, 신의 시험에 들게 됩니다. 이유를 모르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욥은 신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습니다. 이때 욥은 기존의 선악이라는 통념을 깨고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종교적 반복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반복은 신과 인간의 만남입니다. 이때의 신은 예수라는 초월적 존재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반복도 신과 위버멘시라는 인간의 만남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니체의 신은 디오니소스라는 초월성이 완전히 제거된 지상의 신이라는 점이 키에르케고르와 다릅니다. 니체에게 반복은 위버멘시로서 매 순간을 영원히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위버멘시는 다르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한 세계에서 권력의지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우고 부정하고 싶은 순간마저도 다시 반복하기’를 기꺼이 원할 수 있습니다.
※ 자세한 강의의 내용은 강감찬 TV 영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녹취정리 - 양희영(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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