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월간 이수영

[월간 이수영] 카프카 읽기: 칸트와 욥의 주제를 중심으로

by 북드라망 2024. 6. 18.

카프카 읽기 : 칸트와 욥의 주제를 중심으로

월간 이수영 2023년 10월호

 

장애인들의 이동권 확보를 위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시위가 1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 시위에 응원을 보내는 시민들도 많지만, ‘너희만 사람이냐?’라며 비난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목소리에는 ‘너희 장애인만 원하는 것이 있지 않다. 우리 정상인도 사회에 불만이 많지만, 참고 있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참고 살아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현재의 체계가 최선이므로, 더 이상의 요구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적당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보다 더 많은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장애인 시위를 ‘너희만 사람이냐?’라고 비난하는 시민들처럼 스스로 그러한 요구를 철회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스스로 권리를 부정하며 체제에 순응하는 태도를 ‘거세’라고 부릅니다. 아이는 유아기에 어머니와의 2자적 애착관계에 머무르다가, 아버지의 개입으로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생물학적인 아버지와 사회적 관계에서 상징되는 아버지 사이에 간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제 아버지가 심한 술주정뱅이인 경우, 현실의 아버지와 권위를 가진 상징적 아버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 자연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아이는 상징적 거세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 세계가 최선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처럼, 아이도 거세됨으로써 그 격차를 그대로 수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카프카와 칸트: 초월성을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카프카의 작품은 ‘칸트의 물자체적 구도’ 속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 K는 성에 계속 들어가려고 하지만 결국 거기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성은 물자체처럼 늘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카프카는 초월적 권력으로 상징되는 성과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K를 통해, 칸트적 구도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카프카는 현상계와 물자체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칸트적 이원론에 머물지 않습니다. 카프카가 보기에, 물자체는 저기 바깥에 존재하고 있어서 우리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상징적으로 거세된 주체인 우리가 바로 초월적 대상인 물자체를 구성한다고 말합니다. <법 앞에서>라는 작품에서 시골 사람은 법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문지기가 항상 그를 가로막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골 사람이 죽어갈 때, 문지기는 ‘법의 문은 시골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법의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시골 남자의 열망에 의해 법의 문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시골 사람이 그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다면, 즉 주체의 열망이 연루되지 않았다면, 법의 문이라는 초월성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세된 주체들은 ‘불능 상태인 체계가 전능하게 유지‘되도록 만듭니다. 이상하게도 카프카의 권력은 무력하고 불능하기 때문에, 전능하게 보입니다. 성으로 접근하고자 할수록 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열심히 움직이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의미도 불분명합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바로 이렇습니다. 소설 <성>에서 클람을 만나려고 하지만 계속 비서와 심부름꾼만 만나게 되는 K처럼, 체계의 부분들은 너무 과도해서 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속의 주체들은 거세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므로, 또 전능하게도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클람과 성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써, 그들의 권력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카프카의 체계에는 불능과 전능이 기묘하게 결합하여 있습니다.

이런 체계는 ‘제논의 역설의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날아가는 화살은 매 순간 정지해 있다. 그러므로 날아가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제논의 역설의 구조가 가장 잘 적용되는 곳이 바로 카프카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늘 빠르게 움직이지만 정지한 체계에서는 현재가 소거되어 있습니다. 법의 문에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만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는 과거의 반복일 뿐이므로, 이 세계는 무한반복의 체계입니다. 운동 자체가 목적이지 판결이나 소송 자체가 목적이 아니므로,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체계의 유지만을 위한 운동을 계속하게 됩니다.

 


카프카와 욥: 초월성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변주
<성>의 주인공 K는 측량사로 마을에 왔으나, 측량사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실제로 죽지 않았으나, 상징적으로 죽은 자인 유령과 같은 존재입니다. K는 바로 사회적 공간에서 ‘자신의 자리가 없는 자’를 나타냅니다. 사회적으로 정체성을 잃은 존재인 K를 우리는 구약성서의 유명한 인물인 욥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은 아무 죄가 없지만, 신은 그에게서 부, 자녀 등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욥은 ‘신은 나에게 왜 이러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한 친구들마저도 욥에게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하지만,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국 이유 없이 세상을 세우고 벌 줄 수 있는 신의 무한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신은 도덕적 유무죄의 틀을 벗어나서 작동하는 초월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하지만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초월성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지만,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욥과 다릅니다. K는 초월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체계에 통합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신의 권위에 순응하여 마지막에 이전보다 많은 부를 누리고 자손을 낳게 된 욥과 달리, K는 끝까지 사회에서 복권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카프카는 초월성이라는 욥의 주제를 반복하지만, 초월성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욥의 주제를 변주합니다. K는 끝내 거세되지 않은 주체인 것입니다.

이렇게 초월성을 거부하는 주체는 그의 다른 작품에도 나타납니다. 소설 <변신>의 주인공 잠자는 벌레로 변하여, 마지막에는 굶어 죽게 됩니다. 벌레가 된 잠자는 평소 싫어하던 치즈나 상한 음식이 더 구미에 당깁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들을 먹는 것을 거부합니다. 스스로 벌레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마지막 저항의 방식입니다. <성>의 측량기사 K처럼 거세될 것을 거부하며, 이 세계에서의 부재나 공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는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이 아닙니다. 내 욕망과는 상관없이, 자본의 재생산만을 위해서 물건이 만들어집니다. 인간의 욕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카프카의 작품에서처럼 체계 자체의 유지만이 중요합니다. 이 체계는 열심히 움직이는데, 우리 삶은 정지되어 있고 내 자리를 찾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이렇게 카프카의 작품은 단순한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상당히 정밀하게 분석하고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 자세한 강의의 내용은 강감찬 TV 영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녹취정리 - 양희영(글공방 나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