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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스캔들>에서의 정조입니다. 의학공부도 많이 했던 정조! 신하들에게 약을 지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정조가 '공부를 좋아했다'는 것은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드라마는 제가 보지 않아서 말씀드리기 좀 그렇고;;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모습으로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노론과 소론 등 인재를 고루 등용하겠다는 '탕탕평평', 탕평책은 정조를 대표하는 정책처럼 그려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문체반정'과 관련된 인물들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성균관 시험의 시험지 중에 만일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비록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은 확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엊그제 유생 이옥의 응제 글귀들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 지금  현재 동지성균관사로 하여금 일과로 사륙문(四六文) 50수를 짓게 하여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에 응시하게 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일개 유생에 불과하여 관계되는 바가 크지 않지만 띠를 두르고 홀을 들고 문연(文淵)에 출입하는 사람들도 이런 문체를 모방하는 자들이 많으니 어찌 크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정조실록』 1792년 10월 19일 기록


밑줄 그은 부분을 요즘(?)으로 옮기면, 논술고사에서 형식에 벗어난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을 확인해 다시는 시험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엄명이었던 셈입니다.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하여 관직을 제수받는 것이 대개 선비들이 걷는 길이었으니, 이를 막아버리는 것은 꽤 엄격한 분부였던 것이죠. 문체반정이란 이렇게 정조가 '불온한 문체'를 쓰는 선비들에 대한 일종의 탄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체는 쓰지마"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조가 알아주는 책벌레였던 이유가 컸지요. 하지만 자신이 믿는 신념이 너무 강해, 다른 문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정조의 표적이 된 주인공! 그가 바로 오늘 살펴볼 성균관 유생 이옥입니다.



오직 읽을 뿐! 오직 쓸 뿐! - 이옥(李鈺) 1760~?


이옥은 전주 이씨로 할아버지까지는 무과 출신이었던 특별히 당파나 가문을 내세울 것 없는 집안 출신입니다. 31세에 성균관에 들어간 후 한양에서 하숙을 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위에 나온 것처럼, 정조의 눈에 그만 소품문체가 딱 걸리고 맙니다. “이옥이야 한미한 일개 유생이므로 그렇게 심하게 꾸짖을 것까지야 없다”(정조 16년 10월 24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옥은 계속 벌을 받게 됩니다. 합천과 같은 지방으로 충군을 하라는 어명(충군은 유배와 같은 일종의 군대라 할 수 있습니다)이 떨어진 것이지요. 그와중에 과거시험을 보게 되는데, 이옥의 답안지를 본 정조는 그를 탈락시킵니다. 또, 문체때문이지요.


소품문은 흔히 우리에게 소설체로 알려져있습니다만, "자잘한 사물이나 소소한 일상을 진솔한 감정으로 표현한, 일종의 '아포리즘'"(『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174쪽)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옥의 글을 실제로 만나보시면 감이 확 오실 것입니다.


12월 27일은 장이 서는 날이다. 나는 대단히 심심해서 종이창의 구멍을 통해서 바깥 저자의 광경을 엿보았다 ……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사람, 소 두 마리를 몰고 오는 사람, 닭을 안고 오는 사람, 문어를 들고 오는 사람, 멧돼지 네 다리를 묶어 짊어지고 오는 사람, 청어를 묶어 들고 오는 사람, 청어를 엮어 주렁주렁 드리운 채 오는 사람, 북어를 안고 오는 사람, 대구를 가지고 오는 사람, 북어를 안고 대구나 문어를 가지고 오는 사람 ……서로 만나 허리를 굽혀 절하는 사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서로 화를 내며 발끈하는 사람, 손을 잡아끌며 장난치는 남녀, 갔다가 다시 오는 사람, 왔다가 다시 가는 사람, 갔다가 또다시 바삐 돌아오는 사람, 넓은 소매에 자락이 긴 옷을 입은 사람, 소매가 좁고 짧으며 자락이 없는 옷을 입은 사람, 방갓에 상복을 입은 사람, 승포와 승립을 한 중, 패랭이를 쓴 사람 등이 보인다. (「시장」중에서)



시장에 다양한 모습의 행인이 있었다, 라고 뭉텅이로 쓰지 않고 그들을 하나씩 묘사한 내용을 읽다 보면 그 세세함에 놀라기도 하고 너무 길어서 화가 나기도(응?) 합니다. 아마 정조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이런 부분이 아니었을까요? 정조는 문장에 도(道)가 있다고 믿은 주자학자였습니다. 인의예지와 같은 선비의 덕을 논하는 것이 이런 일상적인 것을 논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러니 이러한 문체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옥이 과거에 급제할 길은 없다고 봐야 했습니다.


이옥은 실제로 정조에게 찍힌 이후로 10년 가까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과거를 포기하게 되지요. 정조가 이옥을 본보기로 삼은 것은 맞지만, 이옥이 출사를 하지 못해 불행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문체반정에서 걸렸던 여러 선비들은 반성문을 제출하고 '다시는 소품문을 쓰지않겠다'고 정조에게 약속했지요. 그러나 이옥은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고 계속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았으니, 단지 과거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불행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동인(同人) 중에 걱정이 많아 술 좋아하기를 일삼는 사람이 있는데, 술이 맑아도 마시고 흐려도 마시고, 달아도 마시고 시어도 마시고, 진해도 마시고 묽어도 마시고, 많아도 마시고 적어도 마시고, 벗이 있어도 마시고 벗이 없어도 마시고, 안주가 있어도 마시고 안주가 없어도 마신다.
내가 물었다.


“왜 술을 마시는가?”
“내가 마시는 것은 맛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요, 취함을 얻으려 하는 것도 아니요, 배부름을 얻으려 하는 것도 아니요, 흥을 얻으려 하는 것도 아니요, 이름을 얻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걱정[憂]을 잊기 위하여 마시는 것이다.”
“어떻게 걱정을 치료한단 말인가?”
“나는 걱정할 만한 몸으로 걱정할 만한 땅에 처했고, 걱정할 만한 때를 만났습니다. 걱정이란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인데 마음이 몸에 있으면 몸을 걱정하고, 마음이 처하는 곳에 있으면 처하는 곳을 걱정하고, 마음이 만난 때에 있으면 만난 때를 걱정하는 것이니, 마음이 있는 곳이 걱정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이동하여 다른 곳으로 가면 걱정이 따라오지 못한다. 지금 내가 술을 마시면서 술병을 잡고 흔들어보면 마음이 술병에 있게 되고, 잔을 잡아 술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면 마음이 술잔에 있게 되고, 안주를 덜어 목구멍으로 넘기면 마음이 안주에 있게 되고, 손님에게 잔을 돌리면서 나이를 따지면 마음이 손님에게 있게 되어, 손을 펼칠 때부터 입술을 닦는 데에 이르기까지 잠시 걱정이 없다. 신변에 걱정이 없어지고 처한 곳에 걱정이 없어지고 때를 잘못 만난 것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니, 이것이 내가 술을 마시면서 걱정을 잊는 방법이요, 술을 많이 마시는 까닭이다.”


나는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그의 심정을 슬프게 여겼다. 아아! 내가 봉성에서 지은 글이 또한 동인이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인가.


─『봉성문여』(鳳城文餘) 「소서」(小敍)



나만은 그를 알아주리라! - 김려(金鑢), 1766~1822


김려는 노론계 명문 가문 출신입니다. 성균관에 들어간 후, 이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함께 소품문을 읽고 쓰는 벗이었는데, 이옥이 세상을 떠난 후 이옥의 아들이 그를 찾아와 아버지의 원고뭉치를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원고를 받은 후 김려는 2년 동안 이옥의 글을 정리하고 필사하고 편집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담정총서』(潭庭叢書)입니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옥의 글을, 그의 삶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마운 사람~


나는 이기상의 시와 산문을 사랑한다. 그 기묘한 정감과 특이한 생각은 마치 누에가 실을 토하는 것 같고, 샘이 구멍에서 솟아나는 것 같다. 이제 이 책을 보니, 곧 그의 잡저외서(雜著外書)이다. 비유하자면 노래 잘하는 사람의 노래를 들을 때 범범한 정시(正始)의 소리이다가 변하여 상성(商聲)의 맑고 밝은 소리가 되고, 우성(羽聲)의 처량하고 괴로운 소리가 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맹상군이 일찍이 옹문(雍門)의 금(琴)에 눈물을 흘렸던 까닭인 것이다. 독자들은 간혹 그가 때때로 속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병통으로 여기지만, 그러나 또한 재주가 지나친 것일 뿐이다. 송분자(誦芬子; 강이천)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기상의 붓 끝에 혀가 달렸다”라고 하였는데, 나도 좋은 평이라고 여긴다.(「제매화외사권후」, 1819)


'기상'은 이옥의 자입니다. 송분자는 벗이었던 강이천이고, 세 사람은 성균관 유생이던 시절 함께 공부하며 친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붓 끝에 혀가 달렸다"는 표현이나 "누에가 실을 토하는 것 같고, 샘이 구멍에서 솟아나는 것 같"은 시와 산문을 알아봐주는 벗,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이옥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마치 토해내듯 썼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거나, 이름을 떨치고 싶은 욕망보다는 글을 쓰는 그 순간이 가장 즐거웠을것 같은, 그런 사람이지요.




우리는 거의 매일 글을 씁니다. 자신의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등의 SNS에도, 자신의 노트에도, 혹은 업무상으로, 혹은 글을 써야할 일을 하는 사람 등… 읽고 쓰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지만, 읽고 쓰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문을 해본 적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왜 책을 읽는가? 내가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이 질문을 만나게 해주는 사람으로 이옥을 꼽고 싶습니다. 거창하지 않지만,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은 그 '부정하는 용기'를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


이옥은 18세기의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 틈에서 이름 없이 살다가 소리 없이 세상을 떠났다. 문체반정의 희생양이었지만 뭐 그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도 아니고, 정조에 맞서서 거창하게 영웅적으로 저항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부정하는 용기'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법을 부정하는 용기, 명령을 부정하는 용기, 정체성(사대부, 남성이라는)을 부정하는 용기. 그의 글은 한없이 사소한 것을 다뤘지만, 그의 글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부정의 용기, 세계의 다양함을 꿰뚫는 민감한 눈, 그 다양함에 취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감수성. 이옥은 이 세 가지를 갖고 세상에 저항했다. 가장 조용한, 가장 정적인, 하지만 가장 강렬한 저항.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을 둘러싼 벽에 틈을 만들기! 이옥의 소품문은 세상에서 가장 끈질기고 즐거운 저항의 방식을 보여준다.


─채운,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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