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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편집자 k의 드라마 극장

진화를 거듭하는 막장 드라마의 불편한 진실-<백년의 유산>

by 북드라망 2013. 1. 23.

 편집자 k의 드라마 극장 <백년의 유산> 



유산은 무서운 거랍니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말 ‘막장’, 막장과 찰떡궁합인 단어는 뭐니뭐니해도 역시 ‘드라마’죠. ‘막장드라마의 시조(?)는 000이다’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탄생 이래로 쉬지 않고, 점점점점점점점… 진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 한 편의 막장드라마가 끝나기 무섭게 전작을 능가하는 또 한 편의 막장드라마가 탄생합니다. 오늘은 가장 최신작이지만 그렇게까지 참신할 것은 없고, 처음부터 세게 나오고 있지만 결국에는 어쨌거나 해피엔딩으로 급마무리될 드라마 <백년의 유산>을 살펴볼까 합니다.



2013년 1월 5일에 첫방송을 시작한 <백년의 유산>의 기획의도는 “불량가족의 ‘가족애 육성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획의도는 언제나 제작진만의 것(뭐 언젠가 구현될 수도 있겠지만서도;; 흠흠). 실제로 드라마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가족애를 육성해야 할 불량가족(주인공 민채원의 외가)이 아닌 민채원(유진)과 시어머니(박원숙), 남편 등으로 이루어진 ‘악연’가족입니다.

어떤 작품에서든 미친 존재감이신 박원숙 아줌마는 역시나 이 드라마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전직 사채업자이자 현직 굴지의 대기업 금룡푸드의 오너로 너무너무 잘난 아들을 두었으나 그 아들이 별 볼일 없는 며느리를 데려오자 오장육부가 뒤틀린 시어머니 역을 제대로 해내고 계십니다. 아들의 결혼식날 며느리에게 “내 아들 빼앗아 가니 좋냐”는 둥, 며느리를 “새 장난감”에 비유하면서 “사달라고 막무가내로 떼쓰는데 일단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게 해”준 것이라는 둥의 독설을 날립니다. 이에 비하면 친정에서 배운 게 없다느니 출신은 못 속인다느니 하는 말들은 아주 일상적인 멘트에 속합니다.

<백년의 유산>의 시어머니 박원숙(왼쪽)과 <한지붕 세가족>(아...아실까요들?;;;) 순돌이엄마의 박원숙(오른쪽) . 순돌이엄마가 백년 후 저런 시어머니가 된다면...흑;;;



며느리 성격이 무던한 것인지, 아들 부부의 금슬이 좋은 건지 3년이나 살아낸 어느 날, 시어머니 방영자 여사는 며느리에게 여자 사진 3장을 보여 주며 아들 취향을 잘 알 테니 아들의 새 신붓감을 한번 골라보라고 말합니다. 이래도 며느리가 꿈쩍하지 않자 이번엔 아들 와이셔츠에 자기 립스틱을 묻혀서 며느리의 질투를 유발하지만 이 며느리도 3년 산 내공이 있는지라 시어머니의 자작극임을 눈치 채고 그만 자기도 모르게 피식. 그 결과 시어머니의 무차별 폭행이 시작되고 결국 이혼을 결심합니다(그전에는 남편이 와인잔을 던진 사건이 있었다지요).
 

막장은 이제부터 제대로 시작입니다. 한없이 착하고 예쁘기만 한 줄 알았던 며느리는 병원진단서와 남편의 불륜 증거를 들이밀며 이혼을 추진합니다. 위자료 청구도 물론이지요. 하지만 이 시어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내 아들을 “손 타게” 했으니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들의 이혼이 회사 주가와 경영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 며느리를 유인해서 정신병원에 감금시키고 여기서 이 며느리는 저항하다 다쳐서 기억상실에 걸리고……. 고미숙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건 말 그대로 “납량특집”입니다. 하지만 이 납량특집극보다 더 무서운 건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흑.


우리 시대 여성들의 현장은 참으로 협소하기 짝이 없다. 가족은 일촌 범위를 넘지 못하고, 모든 노동은 화폐로 대신하고, 모든 관계는 교환과 계약 그 ‘너머’를 사유하지 못한다.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북드라망, 100쪽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고부 사이에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일촌밖에 없다는 것, 일촌 외의 관계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시어머니의 시선은 오로지 일촌인 자식에게만 고정되어 있고, 자식인 며느리는 갑갑할 때마다 일촌인 아버지 주위만 뱅뱅 돕니다. 모든 악행이 일촌을 사랑하는 데서 이루어지고, 일촌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정말 이 사람들, 왜 이러는 걸까요? 불편한 진실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문제는 가족이다! 당연하지 않느냐고? 절대 그렇지 않다. 성인이 된다는 건 핏줄의 장막을 벗어나 세계를 직접 대면한다는 뜻이고, 그 과정에서 가족 삼각형과는 전혀 다른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친구를 만나고, 선배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혹은 영웅과 라이벌을 만나고 또 은인과 원수를 만나고…….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104쪽


여신 유진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무...무서운 드라마;;;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빨리 다른 세상으로 고고씽!!


결혼 전에는 뭘 했는지 알 수 없고, 결혼하고 나서는 내내 집에만 있었지만 이혼 후 외할아버지의 제면소를 시어머니의 금룡푸드를 위협하는 경쟁상대로 키워낼 것이 분명한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당근 전남편보다도 훨씬 더 잘난 남자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백마 탄 왕자님의 등장이 마냥 반갑지는 않습니다. 전 시어머니보다는 약간 교양 있어 보이긴 하지만 이 남자의 어머니 역시 아들의 무사 귀국을 위해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머리 허연 아버지는 아들의 생일 축하를 위해 머리에는 고깔을 쓰고, 두 손에는 케잌을 들고 아들을 기다립니다(무서워요 ㅠㅠ). 드라마니까 주인공은 당연히 이 남자랑 잘 될 것이고, 잘 되는 거기까지만 나왔다가 끝나겠지만, 주인공이 이 남자랑 다시 결혼하여 똑같은 가족 삼각형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비극은 리플레이되는 것입니다(주인공의 팔자 되풀이를 방지하기 위해 새 남자의 생모로 주인공의 새엄마가 될 전인화를 설정해 놨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흠흠).

명리학적인 구도로 보면 드라마 <백년의 유산>은 주인공 무인성(으로 추정되는)녀와 그녀의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넘치는 인성 사이의 재성 다툼입니다. 첫번째 결혼에서는 남편의 재성으로서 재성답게 인성(시어머니)을 극하지 못하고 도리어 튕겨나가고 마는데요, 앞으로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새로운 남자의 재성으로 안착하게 되는 과정으로 전개되겠지요. 주인공님, 관(성)에 눌러앉으면 안 됩니다. 그거 인성으로 다시 못 보내면 너는 백 남자를 만나도 소용이 없어요!! 주인공이 제발 악수를 두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말을 전해주고 싶네요.


여성이 이토록 해방된 시대가 없는데, 왜 여성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걸까? 이젠 여성이 사랑을 ‘하는’ 주체가 되면 안 되는가? 생존을 기대지 않아도 되고, 얼마든지 지성에 접속할 수 있고, 삶을 변용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열렸는데, 왜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을 ‘욕망해 주기’를 욕망하는가?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105쪽


그리고 무서우신 시어머니 방영자 여사님, 들으실라나 모르겠지만,


‘내 아이는 특별해!’ ……하지만 그것만큼 지독한 편견은 없다. 가족주의를 심화시킬뿐더러 엄마가 자식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망상이 싹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성과 자본이 만나면 이 망상은 ‘하늘만큼 땅만큼’ 커진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엄마와 아기는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118쪽


마지막으로 ‘백년의 유산’이라는 제목, 제작진의 기획의도는 주인공 외가의 가업을 의미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제 눈에는 시어머니가 아들며느리를 쥐고 흔들 수 있는 ‘백년의 유산’으로 보입니다. 이 ‘유산’(재성)이야말로 막장의 원천인 거 다들 아시지요? 고로, 유산은 무서운 겁니다잉. 덜컥 받을 일도 없지만 덥석 받았다가는 혹은 받으려고 하다가는 드라마틱하게 막장의 세계로 입장하게 될 것입니다. 방심하지 마시고 드라마 잼나게 보셔요^^.


자립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을 책임지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원칙도 여기에 입각해야 한다. 생존의 기초를 해결해 주고, 자립에 필요한 배움을 익히게 해주는 것. 부모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다. 만약 부모가 그이상 개입하게 되면 자식의 삶은 한편으론 예속적이 되고, 다른 한편으론 비굴해진다. 형제간 우애가 망가지는 건 물론이고, 부모와의 관계도 엉망이 되어 버린다. 이건 동서고금의 역사가 수도 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한 공식구다. 오죽하면 일본에선 ‘유산과다=위산과다’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졌겠는가.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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