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특집, 편집자 k의 드라마 극장
죽고 싶은(?) 뱀파이어들의 이야기, <안녕, 프란체스카>
호기롭게도 ‘편집자 k의 드라마 극장’을 써보겠다고 북블매를 매수(?) 혹은 회유(?)했던 것이 벌써 음……. 드라마를 좋아하긴 좋아하나 한번 꽂혀야 열심히 보는 데다가 묵은 걸 좋아하는 무토일간인지라 신작드라마에는 잘 적응도 못하는 저란 여자(<백년의 유산>도 포스팅 이후로 못 보고 있다는;;; 하하; 드라마는 몰아보는 맛이죠 ㅎ) 요즘 최고 인기라는 <내 딸 서영이> 가지고도 한번 해보고 싶었으나 따라잡기에는 이미 너무 엄청난 양이 방영되었더라구요. 흠흠. 무슨 드라마를 골라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는데 설에는 역시 가족드라마라는 생각이 납디다. 그래서 골라보았습니다. 색다르고 수상한 가족 이야기 <안녕 프란체스카>입니다.
2005년 1월, 안전가옥을 찾아 일본으로 떠난 뱀파이어 가족―왕고모 소피아(박슬기), 프란체스카(심혜진), 엘리자베스(려원), 닭대가리 켠(이켠)―은 배를 잘못 타는 바람에 인천항에 떨어지고 맙니다. 어쨌거나 도쿄로 가기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난 뱀파이어 가족들은 산중에 쓰러져 있던 두일(이두일)을 만나게 되고, 배고픔에 굶주렸던 프란체스카는 절대 인간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대교주의 명령도 어기고 두일을 물게 됩니다. 그리하여 두일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아닌 ‘피의 아들’ 뱀파이어가 됩니다. 스무 번 만에야 운전면허를 딴 돌고도는 물레방아 인생과 같았던 두일은 단 한 방에 뱀파이어가 됐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3개월 뒤 앙드레 대교주가 돌아오면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일단 뱀파이어들과 함께 하기로 합니다. 그후부터 <인간극장> 1년치 에피소드들이 쏟아지게 되지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가족들에게도 별 의미는 없지만 설이 찾아오고, 뱀파이어들은 한국의 설 문화를 체험하느라 싸돌아다니는 사이 두일은 혼자 차례를 지내게 됩니다.
“나 저승 가면 어머니 뵈나 했더니, 이 못난 아들놈 이제 맘대로 죽지도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뱀파이어가 된다는 건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걸 뜻합니다. 그래서 열여섯 살에 뱀파이어가 된 왕고모 소피아는 열여섯인 채로 이천 년을, 막내 켠은 20대 청년으로 오백 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십대와 이십대의 외모를 그대로 간직한 채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야말로 대박입니다. 얼굴 가죽을 실로 잡아당겨서 머리 뒤로 묶어 팽팽한 얼굴을 만들어 내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라면 말입니다. 피테라 에센스를 쓰지 않아도, 6년 전, 10년 전 외모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뱀파이어가 되는 것입니다(화장품도 화장품이지만 사실 제일 확실한 방법은 이것뿐일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생활비로 써야 할 월급을 자기 치장하는 데 다 써버린 엘리자베스가 소피아에게 죽도록 얻어터졌던 그날, 노화가 멈춰버린 그날 개념의 성장도 끝나버린 엘리자베스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릅니다.
“왕고모가 어른이라구? 이천 살이라구? 천만에 착각하지 마. 왕고모는 열여섯 살이야. 열여섯 살인 채로 이천 년을 살아왔을 뿐이야. 왕고모는 영원히 열여섯 살이야. 죽을 때까지 열일곱 살이 될 수 없어!”
팽팽하고 젊은 얼굴로 500년을 살아왔지만 지혜라고는 없는 엘리자베스. 죽지 못한 것;;;이 원수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시점일 것입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왕고모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열일곱이 될 수도 없고, 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상처와 약점의 근원이 됩니다. 하여 모두들 이 사실을 애써 모른 척하고 살지만 요 부분이 한번 건드려지면 그땐 평상시의 정신없고 철없고 근심없는 모습을 버리고 꽤 사납고 진지한 모드로 돌변하게 됩니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초, 안성댁(이 시트콤이 방영되던 2005년만 해도 ‘동안’이 경탄의 대상이 되던 때는 아니었나봅니다. 안성댁은 실제 나이가 밝혀지자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되고 연예계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지금이었다면 그녀는 공중파, 케이블, CF계를 모두 휩쓸었겠지요). 50대라는 나이를 속이고 20대의 외모로 사교계와 연예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두일과 가족들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 또한 영원한 젊음을 얻기 위해 뱀파이어가 되고자 합니다. 그녀는 그녀의 가늘고 흰 목을 마구 노출하며 어서 자신의 피를 빨라고 뱀파이들을 다그치지만 이 뱀파이어들의 반응은 싸하기만 합니다.
소피아 : 이봐 안성댁. 왜 뱀파이어가 되려고 하는 거야? 뱀파이어가 어떤 건지 알고나 그러는 거야?
두일 : 그래 나도 얼결에 뱀파이어가 됐지만 정말 장점이 하나도 없어.
안성댁 : 아니 장점이 왜 없어? 늙지도 않지, 죽지도 않지. 상처도 금방금방 아물잖아
두일 : 죽지도 않는 게 장점이야? 넌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친구들의 죽음도 지켜봐야 한다구.
안성댁 : 친구? 그딴 거 필요없어. 돈이나 뜯어가고, 요즘 세상에 친구라는 게 존재하기나 해?
두일 :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해봐.
안성댁 : 가족? 여차하고 돌아서면 남보다더 살벌한 거야, 됐다 그래! 난 정말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소피아 :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라구! 뱀파이어가 된다는 게 어떤 고통인지 알기나 해? 죽을 만큼 아픈 기억들을 평생 여기에 끌어안고 숨어사는 게 어떤 고통인지 상상도 못할 거다. 뱀파이어가 되는 순간부터 넌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거야. 친구도 죽고 가족도 죽고 모두 다 사라진 뒤에 혼자 남은 니가 진짜 너라고 생각해? 널 기억해 줄 사람도 없고 니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없을 텐데. 영원한 삶? 마음속은 텅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데 죽지 못해 껍데기만 남아서 멈춰버린 시간을 영원히 반복해서 사는 게 바로 우리 뱀파이어들이라구!
결국 안성댁은 뱀파이어가 되는 것을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뱀파이어가 된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라는 뱀파이어들의 비밀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양 중세에 창궐했던 흑사병이 변종 바이러스를 일으켜 뱀파이어가 사람을 물게 될 경우 그 사람은 1년 이내에 시름시름 앓다 죽게 되기 때문에 대주교는 인간을 절대 물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남은 뱀파이어들을 피신시켰던 것입니다. 해서 우리 두일이 역시 곧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하고 맙니다.
대교주 : 구원은 없다.
두일 : 구원? 구원이 뭔데?
대교주 : 우리에게 구원이란 다시 인간이 되는 것뿐이다. 멈춰버린 시계를 다시 되돌려 늙어가는 축복 병드는 기쁨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평화롭고 명예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거지.
그래서 뱀파이어들은 아주 간만에 이별을 경험하게 되지요.
그리고 마침내 두일은 사랑하는 프란체스카와도 이별하게 됩니다.
두일아 너를 만나기 전 나, 아니 우리 가족들에겐 시간이란 게 없었어. 우리에게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었어. 견디는 거였지. 널 만나면서 시간이란 게 흐르기 시작했어. 두일아. 넌 우리의 시간을 흐르게 해줬어. 시간이 흐르더라. 니가 돈을 벌어왔고, 니가 빨리 퇴근해서 내가 만든 맛있는 음식을 먹어주길 기다렸어. 밤이 오면 너와 사랑을 속삭이길 기다렸고 오백년동안 아무것도 다를 게 없는 아침과 밤이 오는 일이 기대로 가득찼어. 넌 떠났어. 하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았어. 나와 나의 가족들은 너의 추억으로 시간을 흐르게 할 거야. 고마워 두일아. 넌 너무 큰 것을 줬어.
심혜진이란 배우를 제대로 발견하게 해준 <안녕, 프란체스카>. 제가 이 시트콤을 처음 보기 시작하고 빠졌던 것은 기존의 이미지를 홀딱 깨준 그녀의 능청스러운 연기 그리고 비상식적이지만 몰상식하진 않은 기가 막힌 에피소드들과 ‘르네상스풍도 바로크풍도 아니면서’ 프란체스카를 사로잡았던 화투장들 때문이었는데요. 이제 설을 맞아, 삶과 죽음, 몸과 사랑, 가족과 친구라는 키워드로 <안녕, 프란체스카>를 다시 보려 합니다. 영원히 살지만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뱀파이어들과 “늙어가는 축복과 병드는 기쁨”,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통해 영원을 살 수 있는 인간들,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의 혈연관계도 불분명한 뱀파이어 가족과 새롭게 가족이 된 두일에게서 얻어지는 찡함과 일찌감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이 만들어놓은 가족(딸)도 떼어버리고 결국엔 딸에게 배신당하고 마는 가족의 악순환을 보여주는 안성댁과 그의 딸 미미, 현대의학과 돈의 힘을 빌려 젊음을 유지하는 안성댁, 닭대가리와 백수의 우정, 그리고 카메오로 등장하는 다니엘 헤니의 ‘몸’(?)!! 등등 의외로 공부할 거리가 많은 <안녕, 프란체스카>를 강추합니다!!
그리고 언제나(응?) 마지막으로 남기는 주인공에게 한마디들.
두일과 프란체스카에게(이미 둘은 아는 것 같지만;;)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생으로 이동하기 위한 관문일 뿐이다. 우주의 운행이 멈추지 않는 한 생명의 순환계에 끝이란 없다. 죽은 뒤, 우리의 몸은 다시 우주로 돌아갈 것이다. 혹은 바람이 되고 혹은 공기가 되고 혹은 전자파가 될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또 다시 생명의 질료가 될 것이다. 요컨대, 삶과 질병, 삶과 죽음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병과 죽음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표징이자 생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다.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27쪽
동안계의 전설, 안성댁에게
중년 이후에도 젊게 보인다는 건 연륜 속에 활력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노익장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동안’은 그게 아니다. 아무런 연륜도 화기도 없는데 나이가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증발해 버렸다는 뜻이다. 시간의 흔적이 없다는 건 그동안 아무런 성장이나 변화를 겪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성숙하기를, 무르익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성숙이란 삶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밀고가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와 세계를 통찰하는 힘이기도 하다. (같은 책)
좌우간 여러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혹시라도 <안녕, 프란체스카>를 보실 예정이면
설을 맞아 설특집(?)을 다루고 있는 3화는 꼭 보셔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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