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내 몸'이 싫었어요
나는 내 몸이 싫다. 팔다리가 짧은 것도 싫고, 허벅지는 튼실한데 오르막을 잘 못 오르는 것도 싫다. 팔뚝도 두껍고, 종아리도 두껍고, 뱃살도 두껍고, 온통 두껍고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다. 이십대에는 이런 생각이 특히 심했다. 건강을 위협할 정도로 살이 찌진 않았던 것 같다.(혼자만의 생각인가;;) 하지만 술과 야식을 탐했기에, 당연히 살이 올라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살을 빼면 더 예쁠(!) 거라면서 다이어트 하라는 얘기를 하곤 했다. 예전에 옷가게에 갔을 때 이런 경험도 했다. 가게에 들어온 지 2~3분 정도 지났을까…구경하고 있던 나에게 직원이 갑자기 사이즈를 물어왔다. 대답을 했더니 자기네 가게에는 내가 입는 사이즈가 애초에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불필요한 친절함에 황당하기도 하고 동시에 화가 났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가게를 나오는데 정말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요즘은 인터넷으로 옷을 산다(응?). 특히 여름이 다가올 때면 ‘살 빼야지’가 입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매번 돌아오는 새해 목표 중 하나는 꼭 서른이 되기 전에 비키니 입고 해변을 한 번 걸어보는 것이 있었다. (결국 비키니는 사지도 못하고 서른 둘이 되었다. ㅋㅋ )
지금 생각해 보면, 뚱뚱하다는 말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도 살을 감추기 위해 옷을 사들였던것도 모두 타자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은 외모의 기준은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 당시 좋아했던 『도전 슈퍼모델』이나 『프로젝트 런어웨이』를 보고 나면 뚱뚱한 것은 ‘악’이고 마른 것이 ‘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디어가 내게 기준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마른 것의 아름다움, 마른 것의 장점(?)을 보여 줬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 몸과 TV 속 몸을 비교하게 되었는데, 이 비교 자체가 모든 원흉이었다. 그들과 나는 애초에 신체적 특징이 달라! 하고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왜 저들처럼 태어나지 못했을까 하는 열등감에 빠져 버린 것이다. 자꾸만 TV 속에 나오는 사람들, 혹은 지하철이나 길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타인의 신체와 나를 같은 기준에 놓고 판단하게 되었다. 어떤 여성의 뒷모습을 보며, 내 뒷모습도 저렇게 보일까 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때로는 내 신체가 아주 나쁘지는 않구나 하는 위로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슬프게도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연애를 할 때도 남자친구에게 내 몸을 보이는 것이 싫었다. 나는 어떻게든 가리고 싶고, 숨기고 싶었다. TV에 나오는 지방흡입술 장면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수술을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돈도 없고 아플 것 같아서 결국 하지는 않았지만, 후천적으로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당시에도 몸짱 열풍이 불고 있을 때라 요가, 재즈댄스, 헬스, 수영 등 여러 가지 운동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물론 세 달을 넘기는 것이 없었다.
왜 그렇게 살을 빼려고 기를 썼을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매력 있는 여성’으로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매력의 기준은 깨끗한 피부, 44사이즈와 같은 외모가 중심이었다. 피부에 상당한 금액을 투자하기도 했고, 이런 저런 다이어트 식단이나 운동법에 늘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나는 늘 살 때문에 기준 미달 상태였다. 그럼 매력 있는 여성이 되서 뭘 하고 싶었던가? 적절한 외모의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런 남자를 만나려면 나 역시 그 정도의 외모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연애가 잘 안될 때면 늘 ‘내가 살이 쪄서 그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돌아가곤 했으니 당시에는 연애를 해도 즐거웠던 기억이 별로 없다. 먹지 말고 살 빼야지 하는 강박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연애를 할 때에도 언제 저 남자가 나를 떠날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평소에는 밥 한 공기를 다먹지만, 데이트 중에는 항상 밥을 남겨야 한다는 이상한 규칙까지 세웠으니, 그때는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던지. 하하하;; 지금 돌이켜 보니 그 고민들이 참 부질없게 느껴진다. 내 외모 때문에 헤어지는 남자라면, 거기서 끝나 마땅한 인연이었다. 그런 인연만 계속 되었다면 그냥 연애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음먹으면 그만이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노력에도 내 몸 상태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이것저것 다 귀찮아질 때쯤 엄마와 목욕탕을 함께 가게 되었다. 나는 거의 서른 살에 진입하고 있었고 엄마는 50대에 진입하고 있었다. 거울을 앞에 두고 나란히 섰을 때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엄마의 체형과 나의 체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도 엄마 나이가 되면 저런 몸매를 갖게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항상 멋진 모델들의 몸매에만 시선을 보냈기 때문일까? 내 몸과 엄마의 몸을 마주했을 때, 슬프게도 '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30년 동안 내 몸을 마주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다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몸을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일수록 밥이 먹기 싫고, 불량 식품이 당기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알고보니 이건 몸을 더 나쁜 상태로 가속화시키는 습관이었던 셈이다.
지난 봄,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면서 내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매력 있는 여성’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머리카락을 잘라야겠다는 결심과 행동 자체가 나를 자유롭게 만든 셈이다. 여전히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망은 남아 있지만, 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노력한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때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상태에서는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세상에 무수한 존재들이 모두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지구정복보다 힘들 것 같은 욕심도 털어버리고 싶다. 이런 욕망들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내 신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참 먼 길을 돌아왔다. 아직 극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내 몸을 소중히 해야 할 이유가 따로 생긴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 살아 있기 때문이고, 더 ‘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마케팅팀 만수
나는 내 몸이 싫다. 팔다리가 짧은 것도 싫고, 허벅지는 튼실한데 오르막을 잘 못 오르는 것도 싫다. 팔뚝도 두껍고, 종아리도 두껍고, 뱃살도 두껍고, 온통 두껍고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다. 이십대에는 이런 생각이 특히 심했다. 건강을 위협할 정도로 살이 찌진 않았던 것 같다.(혼자만의 생각인가;;) 하지만 술과 야식을 탐했기에, 당연히 살이 올라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살을 빼면 더 예쁠(!) 거라면서 다이어트 하라는 얘기를 하곤 했다. 예전에 옷가게에 갔을 때 이런 경험도 했다. 가게에 들어온 지 2~3분 정도 지났을까…구경하고 있던 나에게 직원이 갑자기 사이즈를 물어왔다. 대답을 했더니 자기네 가게에는 내가 입는 사이즈가 애초에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불필요한 친절함에 황당하기도 하고 동시에 화가 났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가게를 나오는데 정말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요즘은 인터넷으로 옷을 산다(응?). 특히 여름이 다가올 때면 ‘살 빼야지’가 입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매번 돌아오는 새해 목표 중 하나는 꼭 서른이 되기 전에 비키니 입고 해변을 한 번 걸어보는 것이 있었다. (결국 비키니는 사지도 못하고 서른 둘이 되었다. ㅋㅋ )
지금 생각해 보면, 뚱뚱하다는 말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도 살을 감추기 위해 옷을 사들였던것도 모두 타자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은 외모의 기준은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 당시 좋아했던 『도전 슈퍼모델』이나 『프로젝트 런어웨이』를 보고 나면 뚱뚱한 것은 ‘악’이고 마른 것이 ‘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디어가 내게 기준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마른 것의 아름다움, 마른 것의 장점(?)을 보여 줬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 몸과 TV 속 몸을 비교하게 되었는데, 이 비교 자체가 모든 원흉이었다. 그들과 나는 애초에 신체적 특징이 달라! 하고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왜 저들처럼 태어나지 못했을까 하는 열등감에 빠져 버린 것이다. 자꾸만 TV 속에 나오는 사람들, 혹은 지하철이나 길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타인의 신체와 나를 같은 기준에 놓고 판단하게 되었다. 어떤 여성의 뒷모습을 보며, 내 뒷모습도 저렇게 보일까 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때로는 내 신체가 아주 나쁘지는 않구나 하는 위로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슬프게도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도 내 몸은 왜곡되어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내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상적인 기준에 미달한 상태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애를 할 때도 남자친구에게 내 몸을 보이는 것이 싫었다. 나는 어떻게든 가리고 싶고, 숨기고 싶었다. TV에 나오는 지방흡입술 장면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수술을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돈도 없고 아플 것 같아서 결국 하지는 않았지만, 후천적으로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당시에도 몸짱 열풍이 불고 있을 때라 요가, 재즈댄스, 헬스, 수영 등 여러 가지 운동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물론 세 달을 넘기는 것이 없었다.
왜 그렇게 살을 빼려고 기를 썼을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매력 있는 여성’으로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매력의 기준은 깨끗한 피부, 44사이즈와 같은 외모가 중심이었다. 피부에 상당한 금액을 투자하기도 했고, 이런 저런 다이어트 식단이나 운동법에 늘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나는 늘 살 때문에 기준 미달 상태였다. 그럼 매력 있는 여성이 되서 뭘 하고 싶었던가? 적절한 외모의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런 남자를 만나려면 나 역시 그 정도의 외모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연애가 잘 안될 때면 늘 ‘내가 살이 쪄서 그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돌아가곤 했으니 당시에는 연애를 해도 즐거웠던 기억이 별로 없다. 먹지 말고 살 빼야지 하는 강박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연애를 할 때에도 언제 저 남자가 나를 떠날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평소에는 밥 한 공기를 다먹지만, 데이트 중에는 항상 밥을 남겨야 한다는 이상한 규칙까지 세웠으니, 그때는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던지. 하하하;; 지금 돌이켜 보니 그 고민들이 참 부질없게 느껴진다. 내 외모 때문에 헤어지는 남자라면, 거기서 끝나 마땅한 인연이었다. 그런 인연만 계속 되었다면 그냥 연애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음먹으면 그만이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노력에도 내 몸 상태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이것저것 다 귀찮아질 때쯤 엄마와 목욕탕을 함께 가게 되었다. 나는 거의 서른 살에 진입하고 있었고 엄마는 50대에 진입하고 있었다. 거울을 앞에 두고 나란히 섰을 때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엄마의 체형과 나의 체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도 엄마 나이가 되면 저런 몸매를 갖게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항상 멋진 모델들의 몸매에만 시선을 보냈기 때문일까? 내 몸과 엄마의 몸을 마주했을 때, 슬프게도 '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30년 동안 내 몸을 마주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다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몸을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일수록 밥이 먹기 싫고, 불량 식품이 당기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알고보니 이건 몸을 더 나쁜 상태로 가속화시키는 습관이었던 셈이다.
지난 날에는 영혼이 신체를 경멸하여 깔보았다. 그때만 해도 그런 경멸이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영혼은 신체가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니기를, 그리고 허기져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체와 이 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 그러나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닌 데다 허기져 있는 것은 바로 영혼 그 자체였다. 잔혹함, 바로 그것이 그러한 영혼이 누린 쾌락이었으니!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18쪽
자유롭다는 것은 내가 더이상 외부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을 때, 그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 봄,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면서 내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매력 있는 여성’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머리카락을 잘라야겠다는 결심과 행동 자체가 나를 자유롭게 만든 셈이다. 여전히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망은 남아 있지만, 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노력한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때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상태에서는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세상에 무수한 존재들이 모두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지구정복보다 힘들 것 같은 욕심도 털어버리고 싶다. 이런 욕망들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내 신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참 먼 길을 돌아왔다. 아직 극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내 몸을 소중히 해야 할 이유가 따로 생긴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 살아 있기 때문이고, 더 ‘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그러면 지금 당장 마음의 장벽을 박차고 나와 ‘거리들’을 지워버려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기계, 몸과 마음 등 이 모든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들을. 그것이야말로 내 몸을 ‘나의 것’으로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터이니.─고미숙, 『나비와 전사』,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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