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요강 같은 평화
우리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에 시장이 있다. 보통은 이 시장 옆의 역에서 전철을 타지만 가끔 날씨가 좋거나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시장을 가로질러 한 정거장 다음 역까지 걸어간다.
시장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다. 시장 안의 가게보다 난전에 펼쳐져 있는 물건들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즙을 바르면 피부가 옥같이 고와진다는 알로에, 사전의 글씨가 간판 만하게 보인다는 돋보기, 나환자촌에서 만들었다는 무좀약, 권위와 품격의 초상화 주문 제작, 파리가 앉았다 미끄러진다는 구두약, 추리닝에도 잘 어울린다는 가죽 허리띠, 자전거 바람 넣는 펌프, 시간이 지날수록 색깔이 진해진다는 울긋불긋한 미제 루즈, 한 묶음 열 켤레에 육천 원 하는 양말, 이빨에 달라붙지 않고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호박엿, 삶은 옥수수, 가을날의 정취와 낭만-은행 구운 것, 반라의 여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의 달력들, 사모님의 교양을 위한 사교댄스 DVD… 이런 것들이 다 어디에 쓰이는 물건들일까. 순진한 (척하는) 제이와 나는 눈이 반짝반짝, 장날 구경 나온 아이들처럼 좌판을 둘러보며 신기해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시장으로의 우회로를 선호하는 진짜 이유는 ‘먹자골목’ 때문이다.
시장 초입부터 시장 한복판의 사거리까지 쭈욱 이어지는 포장마차들. 여기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순대국에 막걸리를 한잔씩 걸치시는 할아버지들, 콩국수를 말아먹는 연인들… 돼지 껍데기 볶은 것, 잡채, 김밥, 떡볶이, 오뎅… 그리고 커다란 철판 위에 기름이 자글자글 끓고 그 위에 고소한 냄새의 빈대떡이 구워진다. 이 먹자골목을 지나가자면 제이와 나의 뱃속에서는 저절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잊고 있었던 오만 년 전의 허기가 내장에서 용솟음치며 올라오는 것 같다. 대형 할인매장의 식품 코너에는 시식 코너가 있어 만두 한두 점씩 그냥 얻어먹을 수도 있지만 시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우리는 지갑을 탈탈 털어 빈대떡이나 김밥, 가끔 떡볶이 순대도 사먹는다.
맛있어 보이는 순대와 김밥. 아...야밤에 사진을 고르는 마음이 괴롭다. 흑~
휠체어를 여기다 세워 놓으면 어떡해요. 손님들 못 지나다니잖아. 포장마차 주인의 잔소리와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앞을 좀 보고 다녀요. 바퀴에 발이 밟혔잖아. 어어 오뎅 국물이 쏟아져요. 아줌마 여기 단무지 좀 더 주세요… 이렇게 아우성들 속에서 먹는 음식이 꿀맛이다. 아니, 뭘 꼭 안 사 먹어도, 북적거리는 내장 속 같은 이 활기 찬 시장을 구경하면 굳어 있던 몸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그래서 제이와 나는 일 없이 길을 돌아서 가는, 이 시장으로의 우회로를 좋아한다.
그런데 오늘은 시장에서 살 게 있다. 그릇 가게에 가서 요강을 하나 사야 한다. 뭐? 요강? 치매 노인처럼 웬 요강? 내가 요강을 하나 사야 한다니까 제이가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다. 응 그럴 일이 좀 있어…
나에게도 사생활이 있다. 활보 끝나면 집에 돌아가서 쉬는 것. 잠을 자는 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사생활이다. 그런데 최근 나는 이 생활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사정을 얘기하자면…
나는 다세대 주택의 3층 원룸에 세 들어 살고 있다. 3층에는 세 가구가 함께 산다. 나는 303호다. 이 집은 산 밑의 주택가라 공기가 맑고 아주 조용하다. 일하고 돌아와 쉬기에 좋다. 그래서 평소 아주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는데 최근 301호에 어떤 여자가 이사 오고부터 나의 평화는 깨졌다.
여자는 원룸 안에 강아지 두 마리를 기른다. 303호 내 방으로 가려면 301호를 지나야 하는데, 내가 지나갈 때마다 강아지 두 마리가 미친 듯이 짖는다. 여자가 이사 오고부터 내 방에 들어가는 일이 지옥의 관문을 통과하는 일처럼 힘겨워졌다. 개가 짖지 않도록 나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301호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번번이 개가 짖는다. 3층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개소리가 나를 물어뜯는다. 나는 경찰에 쫓기는 도둑처럼 혼비백산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문을 재빨리 쾅 닫고 후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여자가 이사 온 이후 매일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안 그래도 화병이 있는 나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내 방은 헐값의 원룸이라 이름과는 달리 방과 주방 겸 욕실이 분리되어 있다. 씻거나 밥을 해 먹으려면 방문을 열고 나가 복도 저쪽, 301호 옆에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신이시여…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나는 간신히 들어온 방에 불도 안 켠 채 가만히 누워 곰곰 생각해 본다. 밥이야 굶는다 해도 좀 씻어야 개운하게 잠을 잘 텐데. 저 문을 열고 다시 나가면 케르베로스에게 물어 뜯겨 나는 곧 죽을 것만 같다. 그냥 자자. 옷도 벗지 말고, 신도 벗지 말고, 숨도 쉬지 말고… 그냥 자자. 나는 꼿꼿한 몸으로 잠을 청한다. 잠이 잘 안 온다. 그러나 조금 뒤척이다 보면 낮의 피로가 고마운 잠을 불러준다. 천천히 나는 밤의 어둠 전체와 한 몸이 되어 숨을 쉰다. 뒷산의 청량한 공기가 밀물처럼 내 몸에 스며들었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스르르 나는 잠 속에 빠져든다.
문제는 새벽이다. 새벽에 꼭 한 번씩 오줌이 마려워서 잠을 깨는 것이다. 오줌을 누려면 다시 지옥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씻는 건 미룰 수 있어도 오줌을 참을 수는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자연이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깨어나는 다시 번민에 휩싸인다. 새벽의 맑은 공기는 나에게 예지력을 준다. 그래, 이 시간에는 케르베로스도 잠이 들었을 거야. 용기를 내어 나는 방문을 열고… 조심조심 301호를 지나 복도 저편의 화장실에 간다. 소리가 날까봐 변기의 물도 내리지 못하고 조심조심… 숨죽여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밤의 여신은 자비롭구나. 사나운 개도 잠들게 하여 나에게 오줌을 누는 평화를 허락하시니. 흡족한 기분으로 나는 다시 잠을 청한다.
그런데… 방금 오줌을 눴는데… 또 오줌이 마렵다. 끼이익 현관문을 열고… 연달아 세 번이나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다. 몸이 너무 긴장해 있다가 긴장이 풀리니 갑자기 오줌보가 터지나 보다. 새벽에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숨죽여 화장실에 다녀오려니 나는 진이 빠진다. 오줌 누는 것이 스트레스가 된다.
아아, 이럴때면 내 몸의 신진대사조차 원망스럽다. ㅠㅠ
매일 이런 사태를 겪다 보니… 몰골이 처참해진다. 낮에 활보를 하면서도 비몽사몽의 혼수상태로 제이한테 짜증만 내게 된다. 쉬지를 못 한다는 것. 잠을 편안하게 못 잔다는 것. 오줌을 시원하게 못 눈다는 것.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전철역의 계단을 베고 자는 노숙자도 나보다는 행복한 것 같다.
더욱 끔찍한 것은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 301호 여자가 너무나 상냥한 얼굴로 나보고 다정한 척을 한다는 것이다. 어머, 저녁은 먹었어요? 마실 것 좀 드릴까요?… 하면서 나만 보면 김치니 라면이니 하는 것들을 챙겨 준다. 이년아, 너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차마 이렇게 소리는 못 치고… 나는 여자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오고 밤늦게 들어가서 잠깐 잠만 자는 것. 그러나 이 잠깐의 휴식마저도 여의치 않는, 하여 나는 마침내 요실금 환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참으로 인생이 가혹할 따름이다.
내가 이런 사정을 말하자 제이는 “요강 꼭 사야겠네…”라고 한다. 단풍이 아름다운 이 가을날, 이제 노처녀 시절을 지나 히스테릭한 독거노인의 생활로 접어들고 있는 나를 측은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_ 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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