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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보 활보(闊步)

제이, 당신은 역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by 북드라망 2012. 11. 19.

밍크 양말



며칠 있으면 제이 어머니 생신이다. 제이가 남동생에게 “넌 선물 뭐 할 거야?” 묻는다. 동생은 엄마에게 뭐 갖고 싶냐고 묻는다. 엄마 왈, 밍크 코트! 힉… 동생은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리고 누나에게 반격을 한다. 누나는 뭐 살 건데? 글쎄… 제이가 머뭇거리는 사이, 엄마가 끼어들어 “밍크 양말!”이라고 소리친다.

이러니 동생이 맨날 투덜거린다. 왜 나만 힘들게 일해야 돼? 왜 다들 누나만 감싸고 도는 거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신체가 다른 것을. 동생은 일을 하는 신체이고, 제이는 사랑 받는 신체인 것을.

그렇다. 제이에게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다. 제이와 함께 있으면 숨결이 평온해지고 표정이 온화해진다. 아무리 고집이 세고 뻣뻣한 사람도 제이 앞에서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유연하고 따뜻한 신체로 변한다. 제이를 둘러싸고 있는 부드러운 공기 속에는 세상의 거친 욕망을 밀어내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을 향해 내밀어진 두 손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제이에게 몸이 닿는 순간 사람들이 얻게 되는 고요한 마음의 평화. 그것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제이가 지나갈 때면 가로수 나뭇잎도 반짝반짝 생기를 띤다. 나한테는 왈왈 짖어대던 동네 강아지도 제이를 보면 다정하게 꼬리를 흔든다. 뭐야! 나만 빼고 세상이 온통 제이랑 한통속인 것 같아 나는 종종 제이의 남동생이 느끼는 것과 같은 극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히곤 한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밍크 양말을 선물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동생이 보기에 그것은 “제이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면책 특권이다. 그러나 제이에게는 세상에 없는 것을 구해 오라는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느껴진다. 한겨울에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아온다거나 싱싱한 딸기를 구해 오는 효자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밍크 양말은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우째 이런 일이!


날씨가 쌀쌀해졌다. 가을이 지나고 벌써 겨울이 다가오나 보다. 가을은 정말 짧구나. 아, 가을인가 하는 사이, 벌써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외투를 길게 끌며 가을이 저만치 떠나가고 있다니. 달력 가게의 수영복 입은 사진의 여자가 추워 보인다. 거리의 노인들이 전철 역 안으로 모두 들어와 있다. 전철역 안의 계단과 기둥 주위에 노인들이 모여서 컵라면을 안주로 소주를 마신다. 뽕짝 노래를 틀어놓고 모자를 들썩거리며 춤을 춘다. 어떤 노인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줌을 눈다. 지팡이를 짚은 어떤 사람은 엘리베이터 바닥을 탕탕 두들기면서 “병신이 지나가면 길을 비켜줘야 할 거 아냐!” 고함을 지른다. 고함 소리에 놀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더덕 냄새가 향기롭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 어떤 할머니가 자리를 깔고 앉아 더덕을 깎아서 파신다. 알싸한 더덕 냄새가 묵지근한 머리를 가볍게 해준다.

제이도 월동준비를 한다. 따뜻한 외투를 입고, 장갑을 끼고, 두터운 수면 양말을 꺼내 신는다. 수면 양말은 원래 집에서 밤에 잘 때 신는 거지만 제이에게는 외출용이다. 다른 양말보다 목이 길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더 추운 날에는 수면 양말을 두 켤레, 세 켤레 겹쳐서 신는다.

작년 겨울에 제이는 동상에 걸렸다. 동장군 무서운 줄 모르고 준비 없이 추운 날씨에 활보하고 다녔더니 발가락 끝에 얼음 알갱이 같은 게 박혔다.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근육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 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손발이 차다.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혈액 순환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노무 낭만, 낭만을 즐기느라… 작년 연말 우리는 쌩쌩 찬바람 속의 명동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반짝반짝 알전구가 반짝이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구경 한 번 하겠다고, 거리의 붐비는 인파들 속에서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는 벅찬 기쁨을 함께 하느라, 발가락이 얼어붙는 줄도 모르고 상기된 뺨으로 추운 거리를 싸돌아다녔던 것이다.

올해는 수면 양말 준비했으니까 명동에 가서 크리스마스 트리 구경 꼭 하자! 최전방 철책 근무 서는 군인들처럼 동상에까지 걸렸으나… 제이는 작년에 트리 구경을 제대로 못 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깜깜한 밤이 아니어서 트리에 알전구가 안 켜져 있었던 것이다. 커다란 나무에 수많은 장식들이 달려 있었지만… 알전구가 반짝이지 않는 나무는 제이에게 진정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니다. 올해는 꼭! 멋진 트리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야지! 이것이 제이의 올해 송년 소망이다.


올해는 꼭 불 켜진 트리와 만나시길! ^^


또 한 가지 제이의 월동 준비는 독감 예방 주사를 맞은 것이다. 겨울에 활보하려면 동상 못지 않게 독감을 조심해야 한다. 독감 한 번 걸리면 몇 주 드러누워서 꼼짝 못 할 수도 있다. 하루라도 활보 안 하면 세상 일이 궁금해서 몸이 근질근질한 제이가 그럴 수는 없지! 독감 예방 주사는 밀알 선교단의 어떤 의사 선생님이 백신을 가지고 와서 공짜로 맞혀 주셨다. 난 밀알이 아니지만(밀알 속에 섞인 콩알? 팥알?) 갑자기 열심히 밀알인 척한다. 찬송가도 열심히 따라 부르고 기도 시간에 졸음도 억지로 참으면서 신심을 보인 후, 제이 옆에서 슬그머니… 마치 제이의 것인 양 슬그머니 내 팔뚝을 걷어 내민다.

수면 양말도 준비했지, 독감 예방 주사도 맞았지… 올 겨울은 걱정 없어! 우리는 흡족한 마음으로 활보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 근처에서 내가 제이에게 돈 이천 원만 꿔달라고 한다. 뭐하게? 커피 한 잔 마시려구. 날씨가 추워지니까 진한 블랙 커피가 한 잔 마시고 싶다. 그런데 지갑에 보니까 돈이 없다. 그래서 제이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다. 나는 제이보다 월급이 두 배, 세 배나 많은데 어째서 항상 돈을 빌리게 되는 것은 난지…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참 안 된다. 제이는 살림을 규모 있게 살지 못 하는 나를 책하듯 옆눈으로 한 번 꼬라본 후, 지갑에 돈 있으니 꺼내 가라고 한다.

- 안 그래도 어제 이천 원이 입금됐어.
- 무슨 이천 원?
- 온라인 알바 한 거…

내가 커피 마시려고 빌리는 이천 원은 지난 달 제이가 온라인 알바해서 번 돈이었다. 그 알바는 온라인 설문에 응답하는 일이다. 온라인 설문조사에 응답하면 포인트가 쌓이고, 이 포인트 누적이 어느 정도 되면 현금으로 전환이 돼서 통장으로 돈이 입금된다. 제이는 이 일을 어떤 아는 언니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일단 로그인 하면 1포인트, 설문 문항 하나 응답하면 3포인트가 누적된다. 일 주일에 하루는 하나의 테마(예를 들어 ‘핸드폰’ ‘가전제품’ ‘가정생활’ 등등)로 문항수가 많은 설문지가 나온다. 이걸 하면 한꺼번에 100포인트가 쌓인다. 또 광고를 20초 동안 보고 있으면 포인트가 또 얼마 쌓인다고 한다.

맙소사… 내가 단숨에 마시는 커피 한 잔 값을 벌기 위해 제이는 지난 달 한 달 내내 알바를 한 것이다. 2천 점 포인트가 쌓이려면… 100포인트짜리 큰 설문지는 일 주일에 하나밖에 안 나온다니 3포인트짜리 자잘한 문제를 얼마나 풀어야 했으며, 광고를 몇 초 동안이나 보고 있어야 했겠는가. 제이는 이 알바를 매일 했다고 한다. 온라인 접속 한 번 하면 한 두 시간씩 매일 한다. 문제가 어렵지 않아 재미로 할 수 있고, 짬짬이 푼돈을 벌 수 있으니 좋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알바 조금만 더 하면 엄마 생일 선물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제이는 기대에 들떠 있다.



한 달에 2천 원 버는 알바 해서 엄마 생일 선물을 산다! 이건 정말 제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시급 30원짜리 노동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나같이 성질 급한 사람은 웹서핑 하느라 하루 종일 시간을 낭비할지언정, 그거 앉아서 차분히 미주알 고주알 답하는 거 절대 못 한다. 화딱증이 나서 당장 마우스를 집어던질 것이다.

제이는 허황한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허황한 꿈을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언제나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다는 것. 나는 진심으로 제이를 존경하게 되었다. 주택 청약 저축만 해도 그렇다. 작년에 제이가 처음 그 저축에 가입했을 때 나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거 2만원 3만원 모아서 언제 집 사냐. 그런데 일 년 동안 꾸준히 저축을 해서 제이 통장에는 벌써 100만 원이 넘는 돈이 모였다. 그런데 콧방귀를 뀐 나는 아직 통장도 없다. 맨날 월세 내느라 허덕이며, 커피 한 잔 사마실 돈이 없어 헤헤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제이에게 염치없이 손을 벌린다. 그렇게 비싼 커피를 왜 마셔! 잔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에 밍크 양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밍크 양말 값이 얼마 하는지 모르지만, 제이는 반드시 밍크 양말을 구해서 엄마한테 생일 선물을 할 것이다. 나는 이제 그것을 믿게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제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 온라인 알바…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 왜?
- 나도 하려구
- 왜?
- 연말에 발레 보러 가려구
- 티켓 값이 얼만데?
- 27만원



_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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