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발… 드시지 마세요, 만드세요!
이런 얘기가 좀 갑작스럽긴 합니다만, 저는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뭔가 잘 안 되겠다 싶으면 “아이고, 됐다! 무슨 부귀영화를 본다고…” 하면서, 애초에 시작을 아니 하였었지요(이런 저인데 사주에 목 기운이 진짜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요 +.+). 광장시장 한복 장인을 꿈꾸던 시절도 있었지만(흠흠), 실상 저 같은 성향의 사람으로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답니다. 침선이란 재단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인데, 옷감을 마르는 일에서부터 어긋나면 시작부터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다 만난 것이 뜨개였습니다. 뜨개를 하면서도 숱하게 망해 왔지만, 그래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분노와 자책과 시간과 체력을 감수하면 틀려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을 풀어 버리면 되거든요(이를 뜨개인들은 ‘푸르시오’라고 한답니다 ㅎㅎ). 2019년부터는 코바늘로, 2021년부터는 대바늘로 뜨개를 시작했지만 막상 완성한 아이템을 꼽아 보면 몇 안 되는 것은 다 저 ‘푸르시오’ 때문입니다. 기한도 없고 계획도 없으니, 언젠가 완성시키면 그만이지… 하고, 풀고 또 풀었지요.
그런데, 올해는… 어쩌면 갑진년의 기운 때문이었을까요? 뭔가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렇게 푸르시오만 하다 끝날 순 없다, 결과물을 좀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새해란 것은 어찌나 사람을 새로운 결심에 불타게 하는 때인지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월 말 생일인 친구를 위한 (무려 꽈배기가 들어간!) 카디건 완성. 그다음, 2월 중순이 생일인 친구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좀 촉박하니까 빨리 뜰 수 있는 블랭킷으로 하자!… 했는데, 이것도 완성! 어머나, 이게 되네? 그럼 3월에는 올 겨울에 입을 스웨터 하나 만들어 놓고 4월부터는 여름 뜨개 시작해야겠다. 이런 기세라면 한 달에 하나씩은 만들 수 있겠어!…라고 하였지만, 하… 하였지만….
지금 저는 문어발을 꽉 채우게 생겼습니다. ‘문어발’ 역시 뜨개 용어로 쓰이는 말입니다만,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실 겁니다. 안 하고 있긴 하지만, 안 할 것은 아닌 뜨개‘들’을 문어발이라고 하는데요. 3월에 완성하고 싶었던 (그러나 아직도 두 팔이 없는) 스웨터, 뜨개 모임에서 ‘함뜨’(함께 뜨기)로 진행하고 있는(아니, 다수는 이미 완료한) 여름 스웨터(3월에 시작한 것이라 6월쯤엔 완성해서 다 같이 입고 융건릉으로 피크닉을 가자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이 꼭 저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저는 믿고 싶네요, 크흑). 여름이니까 네트백 하나는 있어야지, 하고 오랜만에 쥔 코바늘 가방, 실 정리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고 있는 꼬맹이 원피스, 왜 끝내질 못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는 작디작은 소품 주머니 두 개를 문어발로 두고, 지금은 세 번이나 스웨터가 될 뻔했지만 푸르시오를 해버린 실로 아무 무늬 없는 스웨터(어쩐지 결국엔 조끼가 되고 말 듯한)를 하나 뜨고 있긴 뜨고 있는데요. 그래도 결국 이도 저도 못하고 있다는 마음속 찜찜함은 덜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뜨개인의 필독서 『아무튼 뜨개』(서라미, 제철소, 2020)를 펼쳐 봅니다.
무한 겉뜨기가 아무리 지루한들 내 두 손으로 10만여 코를 모두 떠내지 않고서는 마칠 방법이 없다. 10만여 코는 내가 지금 뜨는 스웨터의 몸판 앞면을 이루는 콧수다. 뒷면과 양쪽 소매까지 더하면 스웨터 한 장을 완성하는 데에 약 30만여 코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같은 도구와 같은 방법으로 같은 일을 수십만 번 한다는 게 어떤 일일지 상상해 보자.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야겠기에, 그 지루함을 어떻게든 극복해야겠기에 찾아낸 방법이 문어발인 것이다. 그러니까 문어발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지루함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마라토너는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하기 위해 페이스메이커를 두고 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페이스를 유지한다. 페이스메이커가 없다면 42.195킬로미터는 훨씬 고된 길이 될 것이다. 뜨개인은 문어발이라는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으로 더 많은 것을 뜰 수 있다.(57~58쪽)
싫증을 잘 내서‘만’은 아니라, 끈기가 부족해서‘만’은 아니라 포기하지 않기 위한 방편 중 하나가 문어발이라는 것이지요. 이 스웨터는 지금 ‘안’ 할 거지만, 어쨌든 뜨개는 놓지 않을 거라는, 그런 다짐이 문어발이기도 하구요(라고 아름답게 포장해 봅니다).
제 지인 중에, 쉴 새 없이(!) 새로운 걸 시작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번 달엔 이 운동을 했다가 다음 달엔 미술을 하고, 그 다음 달엔 저 운동을 하고…. 마무리와는 상관없이 뭐든 시작을 잘하던 사람이었는데, 참으로 변덕스럽다며 뒤에서 흉을 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다양한 시작이 그 사람에게는 ‘문어발’이었던 것이지요. 뭔갈 포기하지 않기 위한. 이 글을 보고 계실 대부분의 분들은 뜨개를 하지 않으시겠지만, 그래서 차마 뜨개를 권할 수는 없지만, ‘문어발’만은 권하고 싶네요. 완전히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지만 계속 해나가기는 버거울 때, 새로운 문어발 하나를 뻗어 보시기를요. 새로 난 문어발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해줄지 또 다른 곳으로 인도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가게는 해줄 겁니다. 저한텐 그렇더라구요.^^
'북-포토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포토로그] 뭐… 뭐라도 되겠지요 (7) | 2024.08.06 |
---|---|
[북-포토로그]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0) | 2024.07.23 |
[북-포토로그] 나혜석과 김일엽의 자취가 서린 수덕여관 (1) | 2024.07.02 |
[북-포토로그] 살기 좋은 곳은 어떤 곳일까 (0) | 2024.06.20 |
[북-포토로그] 세상에 여덟인 것들 찾아보아요. (0) | 2024.06.13 |
[북-포토로그] 세상에 이런 일이, 아니 이런 축제가!! (0) | 2024.04.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