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월간 이수영

[월간 이수영] 악(惡)에 대하여: <헤어질 결심>에서 악은 누구에게 있는가?

by 북드라망 2024. 1. 3.

악(惡)에 대하여 : <헤어질 결심>에서 악은 누구에게 있는가?

 

월간 이수영 2023년 3월호

 


철학자들은 자연과 신의 세계에는 악이 없다고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도 신에게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 명의 철학자는 우리 인간의 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스피노자: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악
스피노자는 모든 사물(또는 행위)을 ‘결합과 해체’의 관계로 봅니다. 나라는 개체의 차원에서 죽음이라는 사건은 내 신체의 해체입니다. 하지만 신의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신체가 자연과 결합하는 경험입니다. 이렇게 신에게는 모든 것이 결합의 과정이므로, 해체로 인한 슬픔이나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사물 자체에는 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과 악, 덕과 부도덕은 ‘관계 속’에서만 파악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역사상 유명한 두 모친살해의 예로 이것을 설명합니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와 로마의 네로 황제, 둘 다 어머니를 살해했습니다. 같은 모친살해사건에 대해 스피노자는 오레스테스는 선, 네로는 악으로 이야기합니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한 것이므로, 아버지와의 결합 관계로 인해 선이 됩니다. 반면 네로는 어떠한 결합도 없이 어머니와의 해체 관계만 있으므로, 악이 됩니다. 살인 자체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는데, 그 행위가 어떤 것과 결합하는 관계에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선악이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살인과 같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본질을 이미 상실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살인자는 그 행위의 순간에 타자와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무능력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에 그리고 살인자에게 악한 본성이 있지는 않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악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데, 단지 본질을 전제하여 상상적 이미지들을 비교하는 순간에만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죠.

 


라이프니츠; 선의 결핍일 뿐인 악
스피노자와 달리, 라이프니츠와 칸트는 악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신이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움직인다면, 신에게는 우연성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신이 인과적 필연성이 아니라, 어떤 충분한 도덕적 이유가 있어서 세계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신이 이 세계를 만든 충분한 이유를 ‘충분이유율’이라고 합니다.

이 세계는 신이 충분한 도덕적 필연성으로 만들었으므로,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중에 ‘최선의 세계’입니다. 최선의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인간이 신처럼 완전하다면,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게 됩니다. 따라서 신은 자신보다 못 미치게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세계에 악의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신이 선택한 가장 이성적인 세계에 악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신에게 그 잘못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선과 악이 동일한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악을 단지 ‘선의 결핍’으로만 설명합니다. 스피노자가 인간에게 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라이프니츠는 인간에게 선은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필수적인 선의 부재를 라이프니츠는 악이라고 보았습니다.

 


칸트: 인간 내부의 분열에 존재하는 악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주장을 비판합니다. 라이프니츠는 악의 존재를 긍정하지만, 그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악이 실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스파르타의 어머니’라는 예가 있습니다. 전쟁터에 아들을 보낸 어머니에게 한 장수가 와서 이야기합니다. 아들이 용감하게 잘 싸웠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어머니는 매우 기뻐합니다. 하지만 바로 후에 장수는 아들이 결국 전사했다고 말합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슬픔(악)은 단지 기쁨(선)의 결핍일 뿐이므로,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알고도 처음의 기쁨의 감정을 계속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칸트는 악이 어디에서 온다고 보는 것일까요? 칸트는 인간은 자신의 준칙 아래에 모든 행동을 한다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동기, ‘정념적 동기’와 ‘도덕적 동기’가 함께 작동합니다. 정념적 동기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일상적인 것이고, 도덕적 동기는 무조건적인 정언명령입니다. 우리는 정념적 동기로 행위를 하더라도, 내부의 도덕적 동기에 행위를 끊임없이 비춰보게 됩니다. 빨간불에 건널목을 건너는 사소한 행동을 하면서도, 두 동기가 함께 작용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해도 되나’라며 자꾸 망설이게 되는 것이죠.

도덕적 동기를 따른다고 반드시 선이 되지 않습니다. 칸트는 정념적 동기와 도덕적 동기의 순서를 바꾸는 데에 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윤리적 질서의 전도’라고 부릅니다. 무조건적인 도덕적 동기에 의해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우리는 자꾸 정념적 동기를 추가합니다. 진실을 말하면서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사람을 때리면서도 사랑의 매라고 포장합니다. 칸트는 이렇게 진실이나 사랑이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보이는 행위 뒤에, 자신의 정념적 동기를 집어넣는 데에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칸트에게 악은 인간의 내부,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의 내부의 분열에 있습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 나타난 악의 전도성
2022년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사랑이라는 사건에서 칸트가 악이라고 규정하는 ‘전도성’이 잘 드러납니다. 해준(박해일)은 최연소 경감으로 승진한 유능하고 직업윤리가 투철한 형사입니다. 하지만 살인사건의 피의자인 서래(탕웨이)를 만나게 되면서, 그가 그동안 지켜오던 세계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서래에 대한 사랑으로, 사건 수사를 냉철하게 진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렇게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옵니다. 해준은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고 깨어진 상황을 ‘붕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서래의 살인을 알아차리게 된 해준은 서래에게 “깊은 바다에 버려요, 아무도 못 찾게”라는 말을 남깁니다. 해준의 이 대사는 서래를 보호하고 죄를 감추어 주기 위한 사랑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해준이 그동안 형사로서 쌓아온 자신의 자부심을 지키겠다는 정념적 동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윤리적 행위의 뒤에 자신의 정념적 동기를 추가해 버린 것이죠. 칸트가 이야기하는 ‘윤리적 질서의 전도’가 행해지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이 순간, 해준의 사랑은 중지됩니다.

 

출처 - 다음 영화



영화에서 서래는 세 명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그런 서래가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세 명을 살인한 서래 VS 사랑으로 포장하며 자부심을 지킨 해준, 악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서래에겐 각 살인마다 죽여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서래의 행위는 악입니다. 하지만 전도성을 최악이라고 여기는 칸트적 관점에서는 해준에게도 분명 악이 있습니다. 전도성은 선과 악의 구분을 불분명하게 해버리므로, 결국에는 인간에게서 선의 씨앗을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악은 자기 내부의 분열에서 오므로, 신도 그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전도시킨 그 악의 깊이만큼 해준은 마지막 바닷가에서 서래를 애타게 찾게 되는 것입니다.

 


녹취정리 - 양희영(글공방 나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