庚金 - 죽지 않아! 강철 같은 마음의 비밀
바위는 무엇하러
오세영
바위는 무엇하러 바위인가?
흙에서 뛰쳐나와 홀로
절벽과 마주 선 바위,
난만하게 핀 꽃들의 향기에도 취하지 않고,
거친 비바람에도 흔들림 없고,
애틋한 물소리에도 격하지 않아 그것을
바위라 하지만
그의 무심은 대체 무엇이 되려 하는가?
면벽천년, 하늘이 되려는가?
묵언만년, 바람이 되려는가?
스스로 길을 막고 절벽과 마주 서서
바위는 흙이기를 거부하지만
보아라,
내 가슴에 자라는 한 포기 난을,
감정처럼 축축히 젖는
이끼를,
고야, <바위 위의 도시>
환경이 개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과 개인이 환경을 결국엔 극복해내는 것, 이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혹은 중요할까)? 그래, 사실은 이 양자택일이 무용한 것이며 현실에서는 ‘개인’과 ‘환경’이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나뉠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잃을 때마다 번번이 이 가상현실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왜냐? 아주 좋은 핑계거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불리할 땐 환경 탓을 하고 남이 불리할 땐 근엄하게도(?) 주체성을 지키라고 충고한다. 나만 그런가? TV만 켜 봐도 ‘어린 시절이 불우한 탓에 범죄자가 된 사람들’ 혹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CEO’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또 다시 TV탓을 하지는 말자(-_-). 이것은 TV에게 세뇌 당해서라기보다는, ‘매순간 생각하면서 살기’라는 불편한 짐짝을 짊어지려 하지 않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리라. 자기원칙과 중심을 가지지 못한 채로 그저 “난만하게 핀 꽃들의 향기에도 취하”고, “거친 비바람에도 흔들”리고, “애틋한 물소리에도 격하”게 반응하는 나, 우리들은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냥 ‘일반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핑계조차도 던질 수 없게끔 만드는 ‘딴딴한(!)’ 사람들 또한 세상에는 존재한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와 이렇게 증언했다. 그 수용소 안에서도 꺾이지 않고 반란을 꾀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우리를 이토록 망가뜨린 이런 상황에 굴복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남자는 강인한 남자였던 게 틀림없다. 우리들과는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진 게 틀림없다.”(『이것이 인간인가』, 228~229쪽) 보기 드물게 자기 일관성을 쭉 유지하는 곧은 심지의 소유자는 모두가 갈팡질팡하는 폭풍우 속에서 비로소 그 굳건한 윤곽선을 드러낸다. 아우슈비츠에서만? 아니다! 어디서나 없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있다. 절벽에 이르러 흙 알갱이들이 맥없이 흩어져 쏟아져 내리는 동안, 오히려 “흙에서 뛰쳐나와 홀로 / 절벽과 마주선 바위”가 되는 사람들 말이다.
천간지지 중 경금(庚金)이 딱 이런 이미지다. 금은 오행 중에서 수렴에 해당하는 단계로, 그 차갑고도 단단한 금속의 기운으로 여름과 환절기의 잔가지들을 가차 없이 쳐냄으로써 마침내 열매를 거둔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이 과감함은 무언가를 지켜내는 힘이 된다. 그래서 경금의 사람들은 원리원칙을 따지고 비판적이며 냉철하지만, 동시에 양의 기운을 저 깊숙이 품고 있는 뜨거운 가슴의 정의파이기도 하다. 경금의 모습은 단 하나의 결실이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엄청난 인고가 필요하다는 냉철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상하게도 나는 늘 경금을 생각하면 벼랑 끄트머리에 놓인 바윗덩어리가 떠올랐다. 하필 ‘벼랑’처럼 위험천만한 옵션이 따라붙는 것은, 그것이 어떤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한 번 자리 잡은 이상 자기 위치를 바꾸지 않는 경금의 특징을 잘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지반이 흔들려도, 이끼와 거미줄과 온갖 것들이 괴롭혀도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하나에 상처 입으면서도 그 모두를 고스란히 견뎌내는 게 곧 금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그의 무심은 대체 무엇이 되려 하는가? / 면벽천년, 하늘이 되려는가? / 묵언만년, 바람이 되려는가?”
하지만 이런 경금의 자태가 어떤 환경도 극복해내는 절대강자, 슈퍼맨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정말 ‘강함’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살며 맨주먹으로 동네를 제패하는 조폭들 역시 강자가 아닌가? 자칫했다간 경금은 진짜로 조폭(-_-)이 되는 수가 있다. 상황이 내가 옳다고 믿는 바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바로 그 순간 가혹하게 숙청(!)하는 거다. 이 독불장군의 속성은 우리에게도 있다. 평소에는 바람만 불어도 팔랑팔랑 흔들리는 ‘일반사람들’이지만 우리들 역시 인생에서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몇 개쯤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자식, 돈, 명예, 학벌, 성욕, 외모, 게으름……. 이 앞에서 우리는 매번 상처 입고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마음을 놓지 않는다. “스스로 길을 막고 절벽과 마주 서서” “흙이기를 거부하”는 바위덩어리로 남고자 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질문은 반드시 필요하다. 바위의 무심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잃지 않기 위해서? 가지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경금의 비겁하지 않는 면모를 부러워했지만 (을목인 나로서는 더욱 특히*^^*) 이는 늘 동전의 양면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처럼 죽음을 무릅쓴 용기와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강박은 동시적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 역설을 즐겨보라는 듯 시인이 말한다. 바위는 무엇하러 바위인가? “내 가슴에 자라는 한 포기 난을” 키우기 때문이며, “감정처럼 축축히 젖는 / 이끼”야말로 바위의 위대함이다. 바위의 엄청난 스케일에 비하면 너무나 하잘 것 없어보여서 김이 샌다. 고작 이런 것을 키우기 위해 모진 비바람을 견딘다고!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세상에 견디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바위는 없는 것이다. 마모되기 때문에, 무언가가 자라고 이끼가 뒤덮기 때문에, 쪼개지고 가벼워져 마침내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그것이 바위였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얻어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은 오히려 이 가벼움이 아닌가? 세상이 세차고 억세지만 그 와중에 이끼와 난초는 자란다. 억만금의 보물과 절대진리의 명분이 아니라 이런 하찮은 난초 한 포기를 키워내는 모습에서 우리는 지극한 단단함과 지극한 가벼움을 동시에 느낀다. (역시 을경합금?!) 단단해질수록 가벼워지고, 외부를 견뎌내는 마음자리에 수많은 것들이 말랑말랑 춤춰야 한다. 엄청난 인고의 과정을 견뎌낸다 해도 결국에 웃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만약 이런 경금이 있다면 그것은 쾌도 홍길동 같은 이미지가 아닐까. 조폭도 아니고 독불장군도 아닌 쾌남쾌녀들(^^).
레비의 책, 아우슈비츠에서의 기억을 채우고 있는 것은 허약한 자와 강철 같은 자의 이분법이 아니다. 천간이 10개나 되는 것처럼 그 잿빛 공간에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때로는 살기 위해 지키고 때로는 죽지 못해 견딘다. 강한 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끝까지 웃는 법을 잃어버리지 않는 자가 결국 또 살아가는 것이다. 환경과 개인이라는 이분법도 틀렸다. 강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미 단단하게 살고 있다. 나는 무엇하러 나인가? 오직 이런 모양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인 것이다. 별 이유도 없이 ‘하필이면’ 이런 견고한 틀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나는 그 틀 덕분에 매 순간 닥쳐오는 상황 속에서 ‘견뎌낼 수’ 있고, 또 그 와중에서 나와 전혀 다른 것을 ‘키워낼 수’ 있고, 그렇게 또 다시 내가 된다. 나는 죽지 않는다. 경금, 쾌남쾌녀-되기!
_ 김해완(남산강학원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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