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土 - 소멸의 경지
詩의 매력은 몇 가지 표현밖에는 알지 못하는 우리의 감각들 속에서 아주 낯선 무언가를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좋은 시를 읽고 나면 우리는 “아, 이 세계가 이렇게도 생겼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틈새를 파고드는 시인의 시선을 받아들인다. 그런 맥락에서 시를 통해서 간지를 이해해보는 시도도 재미있다. 우리가 몇 가지 단어로밖에는 규정하지 못하는 천간·지지에 대한 느낌이 훨씬 더 풍성해지니, 시도 알고 공부도 깊어지고 꿩 먹고 알 먹고(^^). 이번에 무토에 대한 시로 조태일 시인의 「소멸」을 고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산은 언제나 거기 있다. 산을 생각하기만 해도 확 거대한 느낌부터 덮쳐온다. 우뚝 선 산. 폭풍이 덮쳐도 움직이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자태와 웅장함. 산 앞에 선 나는 작아진다. 크게 드러나는 산의 모습은 무엇이라도 가서 기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 새, 곤충, 낙엽, 절, 수행자, 도망자…. 산 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살아간다. 물론 같은 토라도 戊土와 己土의 성질은 다르다. 후자가 비옥한 토양으로 생명을 적극적으로 키우려고 든다면, 전자는 그 드넓은 산세에서 모든 생명들이 ‘알아서’ 살아가게끔 묵묵하게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무토는 리더의 전형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시에서 역시 산은 미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면서 등장한다. “산들과 잠시나마 / 고요히 지내려고 / 산에 올랐”다는 문구는 꽤나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상상은 마음껏 해보자. (얼마나 ‘산’ 때문에 힘들었으면 ‘잠시나마 고요히 지내려’ 한다는 표현을 썼을까……-_-) 헌데, 여기서 詩의 마법이 발동된다. 이 거대한 산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홀연히 어딘가로 사라진다. 부동(不動)의 이미지의 소멸! 멀리서 산을 올려다볼 때는 그 크기에 질린 나머지 산이란 당연히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산을 자세히 알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산은 보이지 않는다. ‘산’은 온 데 없어지고, 그 대신 나무, 새, 돌멩이들 따위만 눈에 걸린다. 어느 새 나는 산들이 “저희들끼리 /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놓은 그 그늘 아래에 내가 들어와 있음을 깨닫는다. 산을 마주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충분히 크지 않다는 사실 역시.
하지만 이것은 ‘훗날 내 크기가 커지면 산과 대적할 수 있으리’라는(?) 그런 종류의 깨달음이 아니다. 시인은 지금 상대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절대적 크기, 혹은 절대적 거리를 드러내는 그런 산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점 티끌도 안보이게 / 나를 지운다.” 이 행을 읽을 때는 한 줄기 전율을 느꼈다. 산 앞에 섰을 때 느끼는 일종의 불가항력은 단순히 그 거대함에 압도당해서가 아니다. 즉, 단순한 계량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을 품어내는 산이 동시에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는 詩의 역설은, 생장 속에 소멸이 있고 소멸 속에 생장이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산의 중후함뿐만 아니라 티끌 같은 가벼움 도 동시에 본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끊임없는 생장소멸의 운동 앞에서 한 개체로서는 맞설 아득한 심연을 느낀다. 과연 산을 듬직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단순한 부동을 넘어서서 이곳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소멸의 경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산은 아무것도 밀쳐내지 않고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은 채로도 자기 앞에 선 모든 것을 하나의 티끌로 화(化)함으로써 산 앞에 선 나를, 세계를 소멸시킨다.
이것은 토의 신비로운 속성이기도 하다. 土는 오행 중에서 가장 희한한 녀석이다. 겉으로 토는 항상 거기 그 자리에, 그냥 그렇게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순식간에 변해있는 게 또 토이기도 하다. 변화. 생장하면서 동시에 소멸하기. 토는 오행을 매개하는 오행으로, 나머지 모든 오행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 그게 바로 토의 성질이다. 두드러진 특징이 없기 때문에 ‘듬직하다’고만 생각하지만, 그 듬직함은 바로 세상의 변화를 ‘사심 없이’ 대하는 토의 잠재력에서 오는 것이다. 토에게는 생장이나 소멸이나 위계가 없다. 토는 이 모든 것이 결국 지나갈 것이며 또 다시 되돌아온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모든 변화 앞에서도 덤덤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나’를 한 점 티끌로 만들며, 산 자신마저도 두려움 없이 수많은 티끌들로 화化하는 것이다.
무토는 토의 힘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천간이다. 무토인 사람의 특징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고집이다. 유연하지 못한 생각의 틀을 마치 신념처럼 여기며, 그것을 의지 충만하게 고집하고 있는 그들은 가끔씩 옆 사람들의 복장을 다 터지게 한다. (깨지지 않는 틀이 무슨 소용인가?)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싸우다보면 가끔씩 그런 사람에 의해 나의 전체가 해체되는 경험을 한다. 멀리서 볼 때는 꽉 막힌 것 같았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나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광활한 벌판이 자리하고 있다. 고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단단한 터(土)였던 거다. 무토의 끝장고집에는 대신 경계선이 없다. 무토는 어떤 사람의 어떤 생각도 가리지 않으며, 그 커다란 스케일 속에서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투명하게 티끌로 만들어 품어버린다. 가늠할 수 없는 산의 넓이. 그렇다, 우리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산을 다 볼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이런 방식도 있다. 무슨 일을 겪더라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자체로 땅인 무토는 부동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이 세계를 모두 겪어낸다. 아니, 세계가 그 안에서 절로 ‘겪어지고’ 있다.
단 하나의 안타까운 점. 무토의 이 근사한 경지가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고 또 이렇게 선용될 만큼 갈고 닦여지지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많은 무토들이 ‘독고다이’의 길을 간다. 한 귀로 들은 말을 죄다 땅에다 묻어버리고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게 그들의 특기다. 바로 그 순간에 시는 일상버전으로 리얼하게 패러디된다. 저기 무토 한 분이 계신다. 누군가가 “산들과 잠시나마 / 고요히 지내려고” 다가간다. (상황은 알아서들 상상하시라) 그러면? 무토들은 으레 그 귀찮은 표정을 짓고는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 한 점 티끌도 안보이게”, 상대방과 자기 자신 심지어 이 상황까지도 소멸시키려고 든다. 이런 고집불통의 토는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다(-_-). 무토의 고집이 모든 걸 받아들이되 자기 자신만은 절대 변하지 않으려 하는 가장 골치 아픈 성질의 것이 되는 것이다.
안 그런 척하면서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무토의 매력을 잘 살려주시라. 토는 스스로 움직이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거꾸로 썩어버리기 십상이다. 더욱 다양하게, 더욱 변화무쌍하게, 더욱 거대한 소멸로. 자기 자신의 고집마저 한 점 티끌로 만들 때, 무토에는 땅덩어리를 넘어서서 고산과 명산과 같은 신령함이 깃들지 않겠는가. 목에서 뻗어 나와 화로 아름답게 펼쳐진 생명은 이제 토에서 자기 자신을 티끌로 화하며 홀가분한 자유를 얻는다. 이 자유는 펼쳐짐과 동시에 소멸을 체화하고 있는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토인 사람들이 편하다고, 둥글둥글하게 다 받아준다고 막 대하지 말자. 자칫했다간 소멸 당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_ 김해완(남산강학원 Q&?)
만화 『슬램덩크』의 든든한 센터이자 주장 채치수! 그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이 왠지 무토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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