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 다름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癸水 - 너에게 닿기를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블라디미르 쿠쉬, <날개 달린 배의 출발>


여행을 떠날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꽉 막힌 일상과 대비되는 신선한 한 줄기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어지간해서는 집 반경 500M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는 나는 고작 10일 밖에 되지 않았던 이번 여행도 작심하고 나서야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여행 동안 훈훈한 외국인과 친구가 되는 일도 없었고 여권을 뺏으러 달려드는 강도 집단도 없었다. 나에게 도래했던 진정한 ‘낯선 경험’은 함께 여행을 떠난 일행의 존재였다! 그녀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사촌관계로, 나와는 달리 정규교육코스를 밟았고 돈은 많이 못 벌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인 건전한 대학생이다. (몸담고 있는 환경은 비록 다르지만 바쁜 대학생활 와중 부모님에서 조부모님 생신까지 챙기는 다정다감한 그녀를 나는 좋아한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떠났던 여행은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는 여정이 되고 말았다. 음식취향, 음악취향 다른 것쯤이야 대수도 아니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다가 크게 부딪혔다. 나는 일단 무조건 유학만 갔다 오면 많은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그녀가 너무 순진해보였고, 그녀는 내가 대학과 정규직에 대해 심사가 꼬여 있는 거라고 말했다.
 
오해하실까봐 미리 덧붙이자면 우린 별 문제없이 즐겁게 여행을 끝마쳤다. (나와 너 사이의 ‘차이’를 두고 이것이 마치 큰 문제인양 구는 것처럼 피곤한 일도 없다!) 다만 그녀의 한 마디 말이 여행 내내 나의 화두가 되었다. “너의 생각과 가치관은 너처럼 매일 책 읽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아니야. 소통할 수가 없어” 이 말에 뼈가 있다고 느꼈던 건 맨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나의 오만했던 태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다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정형화된 가치들이 지겨웠고 심지어 무식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닦아온 나의 ‘다른 앎’이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담벼락을 쌓기 위한 것이었을까? ‘너는 모조리 틀렸어’ 혹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게 옳은 거야’ 라는 식의 독단주의 혹은 비겁한 상대주의 사이에서 맴돌기 위해서 공부한 건 아니지 않은가? 나의 오만함을 거울처럼 반사당하고 나니,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키르케>

癸水는 천간 중에서 마지막 글자로, 水기운 중에서도 陰에 해당한다. 작은 물웅덩이, 시냇물, 빗물, 옹달샘 등등으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계수가 ‘지혜’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水 자체가 인의예지신 중에서 지(智)를 담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속이 깊어도 너무 깊어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임수와는 달리 계수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비춘다는 차이점이 있다. 실제로 계수 사람들은 머리가 아주 총명하다. 이 총명함은 때로는 간교한 계략을 짜는 데 쓰이기도 하고 (빠르게 회전하는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을지는 짐작불가!) 때로는 껄끄러운 상황을 유연하게 처리하는데 빛을 발하기도 한다.
 
계수와 智의 관계를 제대로 통찰하게 된 것은 강은교 시인의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시를 보았을 때였다. 아! 계수가 智를 비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물의 흐름이 지혜 그 자체였다. 물은 지형에 맞추어 하염없이 흐른다. 자신을 가로막는 벽을 증오하거나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스스로의 행로를 바꾸어 그 상황에서 가능한 새로운 궤적을 낸다. 지성이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들의 판단은 흐르게 하는 대신 가로막고 고 이게 하는데 힘을 쏟는다. 책 읽는 사람들이나 가치판단 한다는 내 친구의 말은 틀렸다. 책을 읽거나 읽지 않거나 우리는 매번 판단한다. 갑은 나쁘고 을은 좋다고, (가)는 불행한 조건이고 (나)는 행복한 조건이라고…. (개개인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로 이 극단적인 이분법을 완화시키기는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거꾸로 점점 판단할 수 없는 바보가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작 100년도 안 된 이 땅의 모습이 외계행성의 일처럼 낯설게 느껴지다가도 2000년 전에도 똑같이 반복되었던 인간사의 레퍼토리를 읽으며 배꼽 잡는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을 ‘연대기’라는 하나의 척도로 멀고 그 가까움의 거리를 측정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이 현실에서도 그렇게 간단하게 ‘같다’ ‘다르다’라는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게 아닐까? “다름의 입장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지만, 같음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다”라고 장자가 말한 것처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인식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인식의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이거다, 저것은 저거다 하는 식으로 정확하게 고정시키는 인식체계가 아니라 쉴 새 없이 변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모든 곳에서 반복하는 정형화된 가치가 답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보편적인 상식의 바운더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생활기반, 감정들, 가치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것이 답은 아니다. 새로운 삶을 바란다면, 더군다나 그 삶을 친구와 나누고 싶다면 경계선을 구획하는 태도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나”기 위해서는 너와 나는 형제라는 식의 감정으로는 불가능하다. 너와 나는 다르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자고? 차이는 인정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작동해야’ 한다. 너와 내가 왜 다른 것인지, 어느 지점에서 갈라지는 것인지, 먹고 자고 싸면서 살아가는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 흐름에서는 하나가 되고 또 다른 흐름에서는 원수처럼 대립하는 것인지 등등. 뿌리까지 파헤쳤을 때야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함께’ 흐를 수 있는 새로운 궤적이 보인다. 이 길목을 투명하게 비추는 것이 바로 智의 힘이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나기 위해서는 물처럼 흐르는 지성이 필요하다. 그때 우리는 시가 다듬어놓은 시어처럼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가 되고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는 생명수를 가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싸움을 피해버리겠다는 태도는 아니다. 분명히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있다. 모든 물질, 모든 욕망, 모든 정당성과 이념이 자유롭게 흐르지 못하고 하나의 깔때기 안으로 쏠린다. 그런 깔때기가 있다면 내가 어느 지점에 있든 간에 그 깔때기는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다. 한곳에 고인 물이 수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 연쇄 고리를 똑같이 반복하면서 “어쩔 수 없다. 다들 그러니 나도 그냥 살겠다”는 말을 툭 내뱉는다면 그 앞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승패를 명확하게 가리거나 장애물 앞에서 자포자기하거나 각자가 각자에게 무관심해지는 것 말고도 다 함께 풍요로워지는 방법이 분명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그 방법을 볼 수 있을 만큼 지혜로워지지 못한데다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서툴기 그지없으니, 생명수는 어디가고 치직거리는 불꽃만 튀길 수밖에. “지금 우리는 / 불로 만나려 한다 /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 세상에 불타는 것을 쓰다듬고 있나니”라고 시인이 말할 때, 그는 한 치의 감정도 덧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준 셈이다.
 

다음에 또 친구와 만난다면, 나는 조금 더 나은 방법으로 (여전히 너와는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감수해야겠지만)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그녀에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녀와 함께 하고 싶다는 나의 러브레터를 아마 친구는 또 다시 내가 심술부리고 있다고 생각할 테고, 우리는 다시 애처럼 싸울 테다. 오,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하지만 이 건 ‘만 리’라는 드넓은 거리 때문이지, 서로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은 아니다.
 


일상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행은 무사히 끝났다! 친구는 다시 취업을 준비할 것이고 나는 다시 책을 읽을 것이다. 하지만 되돌아간 일상은 분명 변하고 있다. 서로 부딪히고 화내고 상처를 주면서, 조금씩 함께 물길을 낸다. 세상을 분석하는 것만큼이나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온전히 부대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결국 이 소소한 흐름들 한가운데에서만 우리는 “부끄러운 바다”의 거대한 지혜에 닿지 않을까? 나는 바닷물 속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열 개의 천간과 열 개의 스텝을 밟으면서 무엇도 버리고 취할 게 없다는 것, 각각의 차이들이 하나의 흐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앎에서 힘이 나온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평안함.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다니면서 누추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웃을 수 있는 용기. 이는 유유자적 모든 곳으로 흘러가며, 모든 것을 끝맺고 다시 새로운 생명의 사이클을 시작할 줄 아는 癸水의 지혜의 다른 모습이다. 가끔씩 머리채 쥐어뜯고 헐떡거리며 폼 안 나게 싸우긴 해도, 우리는 결국 하나의 흐름에 함께 있다(^^). 부처님 손바닥처럼 좁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헐떡거리지 않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길은 가능할 것이다. 이 작은 믿음에 기대어 한 줄기 바람, 새로운 스텝을 다시 시작한다.



_김해완(남산강학원 Q&?)



※ 갑목으로 시작했던 시간지가 벌써 계수까지! 열 개의 천간을 모두 시로 만나보았네요. 전국에 계신 계수 여러분의 응원이 을목인 필자에게 수생목(수기운이 목기운을 살리는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운 팍팍 보내주셔요! ^^


그동안 시간지 코너를 사랑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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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케로로 2013.01.14 12:45 답글 | 수정/삭제 | ADDR

    이상한 것에 머리 굴리는 저 자신을 보면 참 치사하다, 싶을 때가 있어요 ㅋ.
    글을 읽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울컥. (저는 역시 을목을 좋아하나봐요^^)
    "세상을 분석하는 것만큼이나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온전히 부대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언제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게 될지, 아득합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 북드라망 2013.01.14 15:38 신고 수정/삭제

      아앗! 저도 그 부분이 참 찌~~~~잉 했습니다!
      불편한 것을 피하고 싶고 외면하다보면, 온전히 부대끼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이 불편함에 맞서는 것, 저는 요것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케로로님에게도 기를 보내드릴께요! 팍팍! ^^

  • Arti 2014.09.22 13:48 답글 | 수정/삭제 | ADDR

    계수인 일인 기운 팍팍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