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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무용한, 그러나 고귀하고도 즐거운 공부하기

by 북드라망 2023. 4. 18.

무용한, 그러나 고귀하고도 즐거운 공부하기

 

예술은 무용하다. 무용하니까 예술이다.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쓰임에서 풀려나 스스로 고귀해지려는 활동에 전념하는 일이야말로 '주권적 삶'에 걸맞지 아니한가. 단언컨대, 그런 삶이야말로 고유한 색과 향기를 발하는 그림이요, 시요, 멜로디다. 인간에게는 노동과 사회적 가치의 생산 말고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다. 공부도 그 중 하나다. 공부는 사회적 코드의 재생산에 복무하지 않는다. 그런 공부라면 그건 노동과 다름없다.(...) 공부든 예술이든 사회와 자본의 획일적 리듬을 벗어날 때만, 또 사회적 가치생산이라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질 때만 힘을 발휘한다. 다수적(지배적) 가치에서 비껴나 다르게 질문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욕망하는 것이 공부요, 예술이기 때문이다. 
채운, 『예술을 묻다』, 봄날의박씨, 2022, 94쪽


남산강학원(이하 공동체)의 세미나에 참여한 인연으로 공동체 안팎을 오가며 공부 한 것이 4년 차, 길진 않지만 그리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이 무색하게 부모님과 친구들은 연례행사처럼 내게 '공부에 대한' 질문을 한다. 처음 1~2년은 '그 공부가 무슨 공부인데' 라는 질문 세례(와 다단계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다. 인문학 공부, 삶에 대한 공부 등등.. 어떠한 표현으로써 설명해보려 해도 끝끝내 이들에게 완전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니 질문도 조금 바뀌었다. '계속 공부할거니?'라는 질문이다. 


주기적으로 공부에 관한 질문을 받으며 발견한 게 있다. 이 질문에 답을 할 때 나는 마치 무언가를 변명하는 듯 장황한 설명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는 것. 평소에 공부 하고 있을 때는 말짱하더니만(?) 막상 공부에 관한 날것의 질문 앞에서 쩔쩔매는 것이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을 보고 서울 오는 기차를 탄 날이면, 나는 늘 원인 모를 괴리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공부하며 사는 게) 좋다고 왜 말을 못해!" 라는 속말을 되새기며.

 


책 『예술을 묻다』는 단언한다. '예술은 무용하다!' 심지어 무용하기에 예술이라고 쐐기를 박아 버린다. 그런데 이 '무용하다'는 말은 '그래 예술 쓸모없어, 어쩔래?' 같은 안하무인의 느낌이 아니다. 이 짧은 문장은 오히려 당당한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그래서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왜일까? '무용함'이란 '쓸모없다'는 단순한 뜻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모든 것들에서 풀려나 '스스로 고귀해지려는' 활동에 전념하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고귀해지려는 활동', 즉 사회에서 말하는 가치에서 비껴나 다르게 질문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욕망하는 것이 예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공부'다. 아예 다른 활동이라 생각했던 예술과 공부는 '스스로 고귀해지려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사회와 자본의 획일적 흐름을 벗어날 때’,‘사회적 가치생산이라는 강박에서 자유로울 때’ 예술이든 공부든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발휘되는 힘은 어떠한 걸까?

 

공부를 하며 내가 느꼈던 힘이 어떤 것이였는지 떠올려보니, 작년에 공동체에서 활동을 하며 느꼈던 것들이 떠오른다. (공동체에서는 자신을 먹여살리는 일을 ‘활동’이라 하는데, 이는 공부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맡은 활동은 공동체의 유튜브 채널에서 공동체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 내는 활동이였다. 미숙한 실력인지라 밤 늦게까지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마감의 압박도 늘 있었다. 하지만 평소 공동체 생활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부분들을 ‘영상’이라는 물질로 실현해내는 과정이 즐거웠고, 영상을 만드는 동안 ‘자유’를 크게 느꼈다. 이 경험은 내게 무언가를 처음부터 기획하고 그것을 끝까지 책임지고 하는 만큼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공부를 하며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이 활동에서 ‘사회적 가치생산’에 몰두했더라면? 영상을 보고 강학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 공동체 재정에 보탬이 될 것을 생각하거나, 엄청나게 높은 조회수를 기대했더라면 내가 느꼈던 자유로움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힘이 있음에도,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공부가 나한테 필요한 활동이고 난 공부하며 사는 게 좋아!'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부모님과 친구들이 하는 질문은 '쓸모없는 걸 언제까지 하게?'라는 질문이였다. 그런데 나 자신도 부모님과 친구들과 같은 '공부의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공부를 무용하다고, 즉 '쓸모없다'라고 해석하고 있었던 거다. 공부가 '쓸모없다'는 해석 아래서 공부에 대해 내가 느끼는 수많은 좋음들은 잊혀지고 무시되어 버렸다. 그러니 공부에 대한 질문 앞에서 쩔쩔 매는 것은 당연했다. 

 

올해도 공부를 하고 있기에, 조만간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서 공부에 관한 질문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전년과 전전년도와는 좀 다르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 자본주의 시대에서 좋다고 말해지는 삶이 진짜 좋은 게 맞는지 따져보며 살아가고 싶다고. 조금 다르게 느끼고 생각해보면서, 다르게 살 길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위처럼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으려면 내가 공부로 느꼈던 힘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공부에서의 힘을 느끼고자 한다면 내 공부가 '사회와 자본의 획일적 리듬'과 얼마나 멀어졌는지, 즉 내 공부가 '얼마나 무용한지' 주기적으로 돌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세미나 책을 읽을 때 단순히 지식과 정보의 축적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닌지, 또한 내가 글을 쓰는 태도가 혹시 (자본주의의 익숙한 모습처럼) 스스로를 불태우고 보상심리를 작동시키는 건 아닐지 등등을 수시로 살피는 것이다. 공부에서의 힘을 더 많이 느낄 때 나는 더욱 당당하게 공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 내 공부가 쓸모없다고 쩔쩔 매는 것에서 벗어나 '무용한, 그러나 고귀하고도 즐거운(같은 책, 94쪽)' 일을 하고 있다고 눈을 반짝이며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글_박단비(북에디터스쿨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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