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느 날 친구는 내게 벤담의 공리론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말이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말했다. "정말 미안해. 이런 어려운 이야기는 나는 모르겠어. 고기 먹는 것이 필요한 것임은 인정하나 나의 맹세를 깨뜨릴 수는 없어. 나는 그것에 대한 토론은 못하겠어. 나는 토론으로는 너한테 당할 수 없다. 제발 나를 어리석고 고집 센 것으로 알고 그만 놔줘. 나를 사랑해주는 것을 잘 알고, 또 나를 잘되게 하기 위해 그러는 줄도 알아. 또 네가 거듭거듭 내게 말해주는 것은 네가 나를 생각해서 하는 일인 줄 잘 알아.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맹세는 맹세야. 그것을 깨뜨릴 수는 없다." 『간디자서전』, <성장의 시간>, 1111쪽, M.K 간디 지음
간디는 청년 시절 변호사 공부를 하러 영국으로 떠난다. 그는 영국으로 떠나면서 채식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간디 집안의 종교 규율상 채식을 해야 했으나, 무엇보다 이 맹세는 영국에 가는 그를 걱정하는 어머니 앞에서 한 맹세였다. 채식을 한다는 맹세는 간디 자신이 자신의 삶에서 큰 지향이자 소중한 가치였다.
간디의 맹세는 그가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시험대에 오른다. 그의 어머니가 우려했던 것처럼 말이다. 영국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래서 채식한다는 말은 토끼가 사자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만큼 영국인들에게 황당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간디의 영국 적응을 돕는 친구는 각종 방식으로 간디에게 고기를 먹이려 한다. 친구는 고기를 왜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일같이 간디와 토론하고 설득하려 한다. 서로에게 지난한 시간이 이어지던 중, 하루는 친구가 간디에게 공리론을 들고 찾아온다. 이번에는 꼭 설득해야지 하는 마음에 이론으로 중무장하고 간디를 찾아온 것이리라.
간디의 친구가 각 잡고 하는 말에 간디는 어떻게 반응할까? 간디는 자신의 맹세에 대해 더 이상 토론할 수 없으며 자신을 그만 놔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다소 싱겁다고도 느껴지는) 이 간디의 말을 들은 친구는 이날 이후로 간디에게 다시 고기를 먹이려 하지 않았다.
간디와 친구와의 사건이 내 마음을 건드렸다. 정확히는 친구에게 말하는 간디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내가 유난히 이 구절에 눈이 갔던 이유는 간디가 자신의 삶의 지향을 흔드는 사람에게 보인 태도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삶에서 지향하는 바가 있다. 간디처럼 종교에서 비롯하거나, 어머니 앞에서의 굳건한 맹세는 아니지만, 몇 년 전부터 채식 지향의 일상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축산 제도에 대한 실상을 매체에서 접하고 채식을 지향하는 일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일상을 꾸리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나의 지향으로 곤란해지는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봄의 일이다. 친구와 강원도 여행을 하던 도중 식당을 고를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평소보다 채식을 조금 더 열심히 하고 있었고 친구도 그 상황을 알고 있었다.) 친구가 불쑥 얘기했다. 여기까지 와서 고기를 안 먹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이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반감이 먼저 올라왔다. 내 지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도 이런 얘기를 하다니, 나의 지향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의 지향이 다른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앗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위축되었다. 짧은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복잡해지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 하며 짧은 대답으로 상황을 넘겨버렸다. 그러고는 눈앞의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던 것 같다.
이렇게 내가 중요하다 여기는 지향점을 흔드는 것 같은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쉽게 방어적이 된다. 상대가 나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에 대해 감정이 상하게 되고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지는 상황이 일어난다. 별 의도가 없었던 친구의 말 앞에서 반감을 내고도, 그러한 마음에 대해 친구와 얘기하지 않고 상황을 외면해버리려는 나처럼 말이다.
간디는 자신에게 고기를 먹이려는 친구처럼 이론을 끌어모아 설득하거나 반격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내 지향을 이렇게나 무시하다니 너는 친구도 아니야! 라고 화내지도 않는다. 간디는 더 이상 토론할 수 없으니 그만 나를 놔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의 삶의 지향을 흔드는 사람에게 '한발 물러난다'.
친구에게서 물러나는 간디를 보며, 간디가 마음의 문을 닫는다고 느껴진다거나 '내가 졌다'라면서 자신을 약자로 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간디의 말은 상대방도 배제하지 않을뿐더러, 그의 지향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간디는 먼저 상대방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간디가 친구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은 자신에게 고기를 먹이려는 행동 너머에 있는 친구의 마음을 아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간디는 친구의 마음을 인정해주려 했다. 친구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마음을 쓰는 친구에게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의 마음을 잘 읽어냈기에 친구가 자신을 괴롭히거나 비난한다고 곡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친구의 마음을 곡해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기에 친구에게 자신의 지향을 지키고 싶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향하는 바는 채식하는 일상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다양한 나의 지향을 뒤흔들 수 있는 사람이나 사건은 계속 만날 것이며, 그로 인한 다양한 감정이나 생각들이 내 안에서 올라올 것이다. 그럴 때 아무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더욱 살릴 수 있는 간디를 생각해낼 것이다. 지향하는 바를 오래 지켜갈 수 있도록, 간디의 ‘한발 물러남의 기술’을 내 삶에서 자주 불러오고 싶다.
박단비(북에디터스쿨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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