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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사심 없이, 허세 없이, 편견 없이 읽기 혹은 살기

by 북드라망 2023. 4. 4.

“글을 읽어 크게 써먹기를 구하는 것은 모두 다 사심이다”

사심 없이, 허세 없이, 편견 없이 읽기 혹은 살기


▶사심 없이
글을 읽어서 크게 써먹기를 구하는 것은 모두 다 사심(私心)이다. 1년 내내 글을 읽어도 학업이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심이 해를 끼치는 때문이다.
(박지원, 「원사」(原士), 『연암집』(하), 심호열, 김명호 옮김, 돌베개, 2007, 372쪽)

▶허세 없이
독서를 할 때 허세나 부리고 글을 정밀하게 보지 않는다든가, 억지로 어떤 구절을 뽑아내어 생각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의문을 제기한다든가, 대답하는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관심을 딴 데로 돌린다든가, 한 번 묻고 한 번 대답하는 것으로 그치고 다시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 알려고 하는 데에 뜻이 없는 자이니,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없다.
(홍대용, 「담헌집」(박희병 편역, 『선인들의 공부법』, 창비, 1998, 163쪽))

▶편견 없이
대개 병통은 집착하여 내려놓지 않는 데서 생긴다. 이는 마치 송사를 처리할 때, 마음이 먼저 을의 견해를 주장함이 있으면 문득 갑이 옳지 않은 점만 찾고, 먼저 갑의 의사를 주장함이 있으면 을의 잘못을 보려고만 드는 것과 꼭 같다. 잠시 갑과 을의 주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펴야만 바야흐로 능히 그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있다. 장횡거는 "묵은 견해를 씻어 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고 했다. …… 오늘날 배우는 사람은 두 종류의 병통이 있다. 하나는 사사로운 뜻을 주장함이고, 다른 하나는 전부터 먼저 들어앉은 견해가 있는 것이다. 비록 떨쳐 내던지려 해도 또한 그것이 저절로 찾아오고 만다.
(양응수, 「독서법」(정민 편역,  『오직 독서뿐』, 김영사, 2013,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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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동안 공부는 사심으로 하는 거였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돈을 많이 주거나 남들이 “우와~”해 줄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아무개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하다못해 뭐라도 돋보이기 위해서, 이성을 만나기 위해,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라도. 온통 뭔가를 ‘위해서’ 하는 거였다.

대학에 들어가 ‘세미나’라는 걸 하게 되었을 때, 그곳은 허세의 장이었다. 세미나 책은 촘촘히 읽지도 않고서 여기에 대해 아무개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고, 아무개 지식인은 저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궁금한 것도 없으면서 이쯤에서 질문 하나 정도는 해주어야 할 것 같아 억지로 짜낸 질문을 던졌다. 괜히 어려운 철학자 이름 하나라도, 뭔지 짐작도 안 되는 철학 개념어 하나라도 더 말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 같았고, 그게 뭐라고 지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며 좋다고 느끼는 점 중 하나는 ‘집착’이 덜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집착만이 아니라, 어떤 생각, 어떤 느낌에 붙박여 있지 않게, 아니 못하게 된다. 의지적으로 붙박여 있지 않은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싫든 좋든 여러 종류의 일들을 겪고, 그 경험들(대체로 어려웠거나 힘들었거나 슬펐던)은 고정되어 있던 생각과 느낌에 반드시 균열을 내었다. 그 균열들은, 내가, 보고도 보지 못했던 것, 듣고도 듣지 못했던 것이 이렇게 많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예전에는 a라는 시각으로만 보았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 그 안에 숨어 있는 무수한 결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편견’을 자꾸 버려가게 만든다(물론 금방 다 버려지지 않는다. 새로운 편견이 또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또 버리고, 또 생기면 또 버리고…… 하는 이 과정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그대로 독서에도 반영이 되었다. 예전에는 무조건 ‘뭐 이래’ ‘이건 낡은 거지’ ‘이건 너무 가벼워’ 등등의 편견을 장착하고 대했던 혹은 아예 치워두었던 책들에서 ‘새로움’과 배울 거리들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조금 부끄럽고, 그보다 훨씬 큰 다행스러움을 느낀다(지금이라도 이 책을 보게 되었으니까).

 


뭔가를 ‘위해서’ 했던 공부, 내가 지적으로 보이기 위한 허세가 팔할이었던 공부, 편견으로 가득 차 읽어도 읽는 게 아니었던 독서를 이제 조금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쯤 오니, 18세기 지식인들이 들려준 ‘사심 없이, 허세 없이, 편견 없이’가 비단 독서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나 연인, 부모-자식 사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직장이나 거래처 관계에서도, 나는 얼마나 많은 사심과 허세와 편견으로 그들을 읽었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가. 그리고 그 사심과 허세와 편견은 또 얼마나 많은 곳에 상처를 남겼을까. 장횡거(張橫渠 : 중국 북송 시대의 유교 사상가)는 “묵은 견해를 씻어 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의 관계도, 내가 그에 대한 묵은 견해를 씻어 버릴 때, 그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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