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내가 나를 만드는 활동
고찬영(남산강학원 Q&?)
지식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평소에 머리가 나쁘다는 생각을 한 적은 별로 없다. 그런데 공부만 하면 내가 혹시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으려고 해도 잘 안 된다. 정말 내 머리가 좀 모자란 걸까?
그런데 일상생활에 큰 문제가 없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거 같다. 그러면 혹시 내가 생각했던 진정한 지식이란 없는 건 아닐까?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걸 자꾸 집어넣겠다고 하는 게 잘못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생물학에서는 뇌가 정보를 받아들여서 처리한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인지는 뇌에서 일어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식을 이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이게 공부 못하는 우리들 대부분의 뇌구조가 아닐까(-_-;;)
뇌는 입출력 장치인가
내가 알고 있던 공부법은 실은 표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요즘 생물학계에 따르면 뇌는 외부에 있는 정보를 사진 찍듯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적당한 반응으로 출력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지식이 객관적 실체로 우리 밖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기계처럼 ‘세이브’하고 다시 ‘불러오기’만 하면 된다. 헐~ 그럼 내가 컴퓨터란 소리?
하지만 이런 표상주의는 내 공부를 너무 어렵고 힘들게 만든다. 일단 머리에 집어넣기도 힘들고 그런 지식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지식이란 게 나와 상관없이 있을 수 있을까? 나와 아무 상관없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우리의 처지가 참 애잔하기 그지없다. ^^ 이런 우리를 “어여삐 여겨 새로운 생물학을 맹그노니...” 그들이 바로 마뚜라나와 바렐라다.
생물, 자기조직하는 개체와 환경ㅡ나를 내가 만든다
마뚜라나/바렐라의 생물학은 생물을 자기조직(autopoiesis)하는 개체로 본다. 자기조직하는 생물은 자율성에 따라 자신(auto)을 만들어가며(poiesis) 살아간다.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물망적 신체 구조를 스스로 변화시킨다. 그럼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만약 그 변화가 멈추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너무 어려운가? 세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 아무 관련 없이 떠다니던 유기분자들이 하나 둘 씩 결합한다. 거기에 또 다른 분자들이 결합하고 엮이게 된다. 또 다른 분자들은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얽히고 얽힌 그물망에서 자신을 이루는 분자들은 같은 부류의 분자들을 다시 생산하고 통합한다. “이 그물체는 자기를 실현하는 가운데 주위 공간에 대한 경계를 스스로 만든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생산하면서 자신의 경계도 결정하는 분자적 상호작용들의 그물이 바로 생물이다.”
뉴런세포는 생물학의 인드라망처럼 보인다.
그러면 자기조직 개념에서 개체와 환경은 어떤 관계일까. 환경이란 객관적 지식을 갖고 있는 대상일까?
표상주의 방식으로 바라 볼 때 환경이란 삶의 토대로써 생물의 생존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는 절대적 세계다. 그러니 생물은 환경에 대한 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나도 지식을 가능한 많이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자기생성체계의 중요한 특징은 자기 구조의 변화를 일으키면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거다. 구조변화 없는 환경도 없고, 환경 없이 구조 변화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더 이상 환경이란 생물이 적응하고 기대야만 살아갈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 아니다. 생물과 함께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변화를 주고받는 조화를 이루는 관계다.
그럼 자기생성하는 개체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예로서 신경계를 보자.
본다는 것은 나를 바꾸는 것
신경계란 자기생성체계의 한 측면이고 신경들이 계속해서 자기를 생성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언제나 환경과의 접속이다. 가령 뜨거운 걸 만졌을 때 “앗 뜨거워”하면서 손을 떼기 마련이다. 이것을 자기조직하는 신경계의 관점에서 보자. 그러면 뜨거운 열에 의해 신경계가 수축했고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손을 뗀다. 그러면서 신경계는 이완된다. 이런 전체 과정이 신경계가 자기조직하는 행위이다.
놀라운 점은 마뚜라나가 인식도 이렇게 설명한다는 점이다.
유기체의 인식활동이란 유기체가 살아가는 구조접속의 영역 안에서 감각작용적 상관관계로서 일어나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ㅡ에셔의 <화랑>. '보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차이는?
표상주의적 사고에서는 인식이란 주어진 환경의 정보를 가져와 입력하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기생성체계로서의 생물에게 인식이란 신경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구조 변화이자, 자기 생성 작업에 참여하는 신경계의 활동이다.
예를 들어, 본다는 것은 눈과 연결된 시신경계가 빛과 접속하는 것이다. 그 결과 시신경계는 구조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 자체가 인식이다. 그래서 뜨거운 것을 만지는 것이나 본다는 것은 서로 동일하다. 그래서 보는 것은 내가 변하는 활동이다.
마뚜라나 식으로 공부하기
공부는 머리로 한다는 표상주의적인 방식에서는 인간이 환경이든 지식이든 받아들이고 적응해야만 살 수 있다. 얼마나 수동적인가! 그래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지식이 없으면 늘 모자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자기생성체계인 생물에게 인식이란 생물이 살아가기 위해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역동적 활동이다. 무엇을 환경으로부터 채워 넣어야만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생물은 매순간 지금의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능동적인 존재다. 이런 변화야 말로 생명의 힘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공부는 인지활동이고 그것은 곧 변화다. 그러니 알아야지만 실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생명에 반한다. 우리는 언제나 알아가는 동시에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 생물로서 구조접속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일이 바로 그 생물의 존재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식활동이다. 경구로 나타내자면, 삶이 곧 앎이다.
ㅡ에셔의 <그리는 손>.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42쪽)
고찬영 :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우연히 연구실과 접속했다. 그러다 재밌게 과학공부를 하는 친구들과 만나 과학과 신비주의(?)를 결합할 수 없을까 상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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