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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과학

못하는 건 없다, 하기 싫을 뿐! ㅡ나의 뇌구조그림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3.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신근영(남산강학원 Q&?)

 

이번 글은 뇌에 대해 써야지 마음을 먹고,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뇌구조그림’이라는 게 눈에 띠었다.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뇌구조, 남자와 여자의 생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뇌구조, 온갖 연예인들의 뇌구조, 친구의 뇌구조를 추측해 그린 그림, 직접 자신의 뇌구조를 그린 그림 등 온갖 뇌구조 그림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정도 얘기로도 대충 짐작하셨겠지만, 뇌구조 그림은 값비싼 비용이 드는 의학 검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종이 하나,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누구나 그릴 수 있다. 대충 사람 얼굴 윤곽을 그리고, 뇌가 있는 머리 윗부분에 크기가 다른 칸을 몇 개 만든다. 그리고 큰 칸부터 자신이 주로 생각하게 되거나 관심을 갖는 내용을 적어 넣으면 끝이다.

 

과학이란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어 보이는 뇌구조 그림. 하지만 여기에는 신통하게도 뇌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다.

 

뇌, 내가 살아온 삶의 자취

 

1861년, 프랑스의 해부학자 피에르-폴 브로카는 뇌 피질에 언어를 담당하는 특정한 부분이 있다는 발표를 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신경과학계는 인간의 뇌지도를 밝히기 위한 경주에 돌입했다. 이 뇌지도 프로젝트의 요점은 이렇다. ‘뇌 피질은 역할에 따라 구획되어 있고, 그 모습은 모든 인간이 똑같다.’

 

여기서 핵심은, 구획된 경계와 각 부분이 맡은 일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뇌 피질의 각 부분은 죽을 때까지 맡은 바 일만 하고, 언감생심 다른 일을 해보겠다고 덤비지도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경계 안에서 그저 그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가는 일종의 신분제 사회 같은 게 뇌의 생태라는 것. 이를 어려운 말로 하면 ‘신경 기능의 비가소성’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인터넷의 수많은 뇌구조 그림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거다. 뇌구조 그림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하지만 실제 뇌의 활동은 이 그림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동일한 뇌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뇌구조는 똑같다, 거기에 무엇을 채워넣느냐가 모두 다를 뿐!


 

1912년 영국의 신경과학자 그레이엄 브라운과 찰스 셰링턴이 원숭이를 대상으로 했던 실험은 뇌가 어떻게 각 개체의 특이성을 나타내는지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동물실험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실험은 운동 피질 영역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운동 피질은 신체의 어느 부분을 움직이게 하는지에 따라 일정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세링턴과 브라운은 이 운동 피질을 미세하게 구별해가며, 동일한 부분에 자극을 주고 근육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그 결과 동일한 자극에도 어떤 원숭이는 안면근육이 움직였으나, 다른 원숭이는 입술이 움직였다.

 

그 결과 마치 지문처럼 뇌의 운동 지도는 개별적이라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으로 과일을 집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원숭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습관으로 인해 원숭이의 두 손가락은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동시에 구부러지게 된다.…동일한 집단에 속하지만 음식을 먹는 습관이 다른 원숭이도 있을 수 있다. 이 원숭이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과일을 집는다면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는 신경과 집게손가락을 움직이는 신경은 나란히 위치하게 된다. 두 원숭이의 뇌 운동 지도는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운동 지도는 신체의 어느 부분들이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는지를 반영할 뿐 아니라 특정 신체 부위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도 반영한다.

 

샤론 베글리, 『달라이 라마, 마음이 뇌에게 묻다』

 

이후에 시각이나 청각 등 외부에서 자극을 받아들이는 감각 피질에서도 이런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인간 역시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한 개체의 뇌는, 그 개체가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거다. 요컨대, 뇌의 생김새는 바로 내가 살아온 삶의 자취를 닮는다.

 

자발적인 활동이 뇌를 바꾼다

 

뇌는 뉴런이라는 신경세포들로 얼키설키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 연결을 좌우하는 게 각자가 살아온 삶,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습관이다. 그러니 뉴런의 연결구조가 사람마다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네빌이라는 신경과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뇌가 전문화되는 것은 해부학적 기능에 따른 것도 아니고 유전자 명령 때문도 아닙니다. 이것은 경험의 결과입니다.”

 

그럼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일생동안 이 뉴런의 구조는 바뀔까? 다시 말해, 습관은 바뀔까? 바뀐다면 어떻게 해서 바꿀 수 있을까? 뇌구조 그림은 이 문제들에 대해서도 힌트를 준다. 나의 뇌구조 그림은 시간에 따라 바뀔 수 있나? 그렇다! 그림은 무엇에 따라 바뀌나? 관심!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으면, 뇌구조 그림에 있는 칸의 크기는 무엇에 비례하나? 이 답 또한 관심! 바로 이런 뇌구조 그림의 특징 그대로가 실제 뉴런의 상태다. 뉴런은, 습관은 바뀐다! 이를 ‘신경 기능의 가소성’이라 한다.

 

사실 어려운 뇌과학 용어를 들먹이지 않아도, 습관이란 게 바꾸기가 어려운 게 문제지 언제나 바뀔 수 있는 거라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뇌는 유연해서 새로운 걸 잘 받아들이고 습과도 쉽게 바뀌지만, 어른들이 되면 웬만해서는 바꾸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게 딱, 현재 뇌구조 프로젝트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바다. 이런 주장은 뉴런이 새로 생기지 않는다는 전제로부터 나온다. 즉, 우리는 일정한 뉴런을 가지고 태어나고, 어려서 이리 저리 뉴런들이 배분돼서 기능이 구조화되면, 게임은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다는 것! 왜냐하면 우리 뇌의 뉴런들은 죽어나갈 수는 있지만 새롭게 만들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런 오해는 뉴런이 가진 특성 때문에 생겼다. 뉴런은 다른 세포들과 다르다. 생식세포나 체세포는 분열을 한다. 이런 세포 분열이 새로운 세포를 만든다. 이로 인해, 그 작은 난소가 어엿한 사람으로 변하고, 상처에 새 살이 돋는다. 하지만 뉴런은 분열하지 않는다. 그래서 뉴런은 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허나 분열만이 새로운 세포를 만드는 방식이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뉴런은 분열하지 않지만, 뉴런이 될 씨앗들이 뇌에는 잔뜩 있다. 뇌에는 ‘신경줄기세포’라는 게 있고, 여기서 완전 따끈따끈한 ‘신상’ 뉴런들이 만들어진다. 말 그대로 완전 신상이다. 다른 세포는 이전 세포에서 분열해서, 일종의 복사의 방법으로 만들어지지만, 뉴런은 새로운 씨앗에서 새로운 싹이 자라나는 형식이니 말이다.

 

뇌에는 신경줄기세포라 불리는 예비세포가 있어서 뉴런이나 다른 세포로 자라고 분화할 수 있는 전구세포 역할을 한다. 따라서 현재의 세포 하나로부터 다른 세포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하더라고, 뇌는 온전한 뉴런으로 성장하게 될 씨앗을 가지고 있다.

 

샤론 베글리, 『달라이 라마, 마음이 뇌에게 묻다

 

하고 하고 또 하면? 새 새싹, 즉 없던 뉴런다발이 쑥 올라온다! 단 좋아서 해야 한다는 거^^


 

뉴런은 매일 500개에서 1000개가 새롭게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이건 애들이나 성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신상 뉴런의 생산은 우리 몸의 활동과 관련된다. 우리가 어떤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그 움직임과 관련된 뉴런들이 자꾸 생겨나서 뉴런 다발이 굵어지게 된다. 뇌구조 그림으로 말하자면, 칸의 크기가 커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난 것은, 그런 활동이 ‘자발적’일 때만 의미 있을 정도의 뉴런 생성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억지로 하는 활동들, 그러니까 자신이 별 관심이 없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건 새로운 뉴런 생성에 도움이 안 된다. 요컨대,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발성이 필수조건이다. 
 

습관을 바꾸려면, 미련을 버려라!

 

손이 곧 눈이 되는 것이 실제 뇌구조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뇌지도 프로젝트 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이런 말을 던진다. ‘사람마다 뇌지도가 다르고, 새로운 뉴런도 생긴다고 하자. 허나 그건 구획된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부차적인 차이들이다. 경계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일테면 청각 피질은 더 잘 들을 수 있게 될 수는 있게 되겠지만, 볼 수 있게 되는 일은 없다!’

 

이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볼 수 있는 청각 피질이 있다. 청각 장애인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의 청각피질은 소리의 자극을 받지 못한다. 그럼 이 피질들은 놀까? 아니다. 시각을 처리하는 일을 한다. 시각 장애인들의 경우는 이와는 좀 다르다. 시각 정보를 받지 못하는 시각피질은 촉각에 반응한다. 그러니까 손가락으로 점자책을 읽을 때마다 시각피질이 활성화된다. 그들 손끝에 눈이 달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시각장애인의 이런 변화는 14세 이후 시력을 잃은 사람에게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뇌의 가소성은 역시나 성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일까. 더욱이 여기에 시각장애나 청각장애처럼 극단적인 경우들만이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신경과학자 파스쿠알-레오나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뒤늦게 맹인이 된 사람들의 뇌가 가소성에 제약을 받는 것은,……‘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속도’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아무런 시각을 갖지 못했거나 갑작스레 시력을 잃을 때만 자신의 역할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샤론 베글리, 『달라이 라마, 마음이 뇌에게 묻다

 

파스쿠알-레오네는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지원자들을 모집했다. 그들은 눈가리개로 눈을 가리고 오로지 촉각과 소리에 의지해 생활하며, 이런 감각에 관련된 여러 활동들도 배웠다. 그렇게 완전히 빛이 차단된 채,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의 시각피질은 촉각과 소리에 반응했다. 오로지 시각 정보만 처리하며 수십 년을 살아온 시각피질이 단 며칠 만에 새로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ㅡ뭉크, <이별>. 아름다운 연인이 아닌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우리는 웬만해서는 떠나보내기 싫어한다(^^;).

    

 

중요한 것은 나이도, 습관이 지속된 기간도 아니다. 어려서 형성된 뉴런의 연결망은 그에 관련된 정보가 조금이라도 들어오면 유지된다. 쉽게 말해, 문제는 ‘미련’에 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미련을 가진 것에 대해 뉴런들은 알고 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삶의 방식이나 습관을 바꾸고 싶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 과거의 방식에 대한 미련들을 안고 산다. 일테면 어떤 습관을 내일부터 바꾸겠다고 하는 건, 어떤 면에서 안 하겠다는 소리와 같다. 이 마음에는 지금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연장하고픈 미련이 배여 있기 때문이다. 그 미련은 기존의 방식이 익숙해서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변화 후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은근히 그 방식을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든 우리가 지나온 그 방식들에 대한 마음을 말끔히! 딱! 거두어들이지 한, 습관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못하겠는 거? 하기 싫은 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맞고, 어떤 의미에서는 틀렸다. 우선 아이든 어른이든 뛰어난 뇌의 가소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 속담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련이란 게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가기가 쉽다.

 

생각해보면, 미련 자체가 습관을 형성하고 새롭게 만드는 관건이 되는 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을 보자. 아이들은 방금 친구와 싸우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손잡고 논다. 우리 조카만 해도 그렇다. 헤어질 때는 세상에 이보다 슬픈 일이 없다는 듯 울지만, 그 울음 5분도 안 간다. 그뿐이 아니다. 조카에게 잘 보이려고, 갈 때마다 과자나 김 등을 가지고 가지만 다음에 보면 나름의 그 선물들은 깡그리 잊은 듯 행동한다.

 

나 같은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한 번 미운 마음이 들면 웬만해서는 가시지 않고, 선물 따위에 쉽게 마음을 뺏기곤 한다. 더욱이 살아온 세월이 길어지면서, 가진 것들이 많아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많아질수록, 그것들과 관련된 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산다는 게 어려워진다. 그러니 애들이 뇌가 어른보다 유연한 이유는, 지나온 삶의 자국에 대한 미련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뇌과학이 주는 이런 성찰이 가장 잘 담겨 있는 말 하나가 있다. 스피노자가 한 말인데, 들어보시길.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안,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어떠신지. 마음에 완전 다가오지 않으시는지. (난 완전 다가왔는데…그러니까 완전 찔렸다는 얘기.^^;;)

 

아이란 천사도 악마도 아닌, 미련을 모르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 역시 언제든 '아이-되기'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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