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고통을 느끼기는 하는 것일까? (1)
신근영(남산강학원Q&?)
근래 들어 ‘심리상담’ 분야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융 강의를 하면서 만난 많은 분들이 한 번쯤 심리상담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심지어는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나면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는 대학생 친구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비용이 만만치 않음에도, 유명한 심리상담사나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려면 1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런 얘기를 처음 접했을 때, 마음이 불편했다. 살기 팍팍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온통 ‘아프다, 아프다’를 입에 달고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그 아픔이라는 게 자기연민에서 나온 투정처럼 들리기도 했다. 더욱이 ‘나 상처있어요, 그래서 아파요’라는 말을 마치 자기 삶의 방어막처럼 이용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불쾌해지기도 했었다.
이런 와중에 어떤 여성이 라디오에 보낸 사연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래서 약을 타러 병원에 가던 중, 우연히 그 라디오 프로에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가 나온 것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전에 TV에서 그 아이돌들을 보면서 우울증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다며, 감사의 사연을 보냈다. 그 사연을 듣고 난 황당했다. ‘이런…이게 우울증이야?’
그런데 그 때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정말 아픈걸까? 아파서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그저 아픈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나도 그랬다. 뭔가 몸과 마음이 묘하게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게 아픈 건지 뭔지 몰랐다. 고통 자체는 없었고, 그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막연한 느낌만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푹 꼬꾸라져 버렸다. 그렇게 30대를 두 번의 전신마취 수술을 하며 보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제대로 앓을 능력을 잃어버린지도 모른다. 아프다는 게, 고통이라는 게 어떤 건지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심리상담사를 찾는 이유가 역설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실제 어떤 고통을 느끼지는 못할 때, 그래서 그 묘한 간극이 느껴질 때 심리상담 쇼핑에 나서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감각, 고통
일본에서 나오는 잡지 『현대 사상』의 2011년 8월 호의 주제는 ‘아픈 몸’이었다. 그곳에는 신다 사요코라는 심리상담사가 임상을 바탕으로 고통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찾아오는 고통, 부여하는 고통」이라는 이 글에서, 사요코는 ‘고통에 능동적 기능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고통에 능동적 기능이 있다? 고통에 대해 뭔가 긍정적 뉘앙스를 주는 이 말이 낯설었다. 더욱이 얼마 전 ‘복합부위 통증증후군’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로서는 고통은 영 마뜩치 않은 존재였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말 그대로 죽을 만큼 고통을 느낀다. 스치는 바람에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진통제를 몇 십 알은 먹어야 겨우 진정이 된다. 이런 심각한 경우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고통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지나가는 감기몸살에 욱씬거리는 몸만으로도 아픈 게 얼마나 귀찮고 싫었던가. (-_-;;)
그러나 죽을 만큼의 고통 반대편에는, 고통이 없어 죽음의 위협을 받는 경우가 있다. 사요코는 10년 전 쯤 알코올 의존증인 남자를 만났다. 그는 술의 독성 때문에 모세혈관의 혈액 순환이 되지 않았다. 그는 발끝이 마비되어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엄지발가락의 상처가 심하게 곪아 발 전체로 퍼져 갔다. 그가 자신의 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의 발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발을 절단해야 했다. 사요코는 이런 상황에 대해 그가 했던 묘한 말을 들려준다. “전혀 아프지 않기 때문에 두렵지요.”
아픔을 느끼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생명유지가 어렵게 된다. 무통증의 사람은 유소년 때부터 혀를 깨물어 자르거나 이를 뽑아버리거나 하는 일도 일어난다고 한다. (……) 고통조차 없으면 공포도 사라질 거라고 우리는 상상한다. 마취약의 발견이 수술을 가능하게 하고, 생존의 괴로움을 완화하려는 목적으로 알코올을 비롯한 여러 약물을 사용하는 행위도 생겨났다. 그러나 한편에서, 고통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감각이기도 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는 바로 중독상태가 아닐까?
일상에서 고통이란 없을수록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통념과 달리, 고통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감각이다. 고통은 단적으로 악하다고, 단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 없다. 사요코의 말대로 고통이란 양의적 성격을 가진 감각이다.
방문하는 고통,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통
TV 같은 데서 가정 폭력 피해 여성을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생명체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 일을 피하고자 한다. 그건 설명이 필요 없는 본능이다. 그럼에도 가정 폭력 피해 여성들은, 온 몸에 멍이 시퍼렇게 들고 때로는 뼈가 부러지는 폭력을 당하면서도 집을 떠나지 못한다. 마치 무통증 환자처럼, 생존의 위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보인다. 흔히들 이는 지속적인 폭력이 피해 여성을 무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요코는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이 문제를 바라본다. 그녀는 많은 가정 폭력 피해 여성과 학대 아동들을 상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자신이 당했던 심한 물리적 폭력으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건 단지 그 일을 고통으로 기억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교통사고처럼, 시간이 흘러 폭력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서야 비로소 그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어떤 가정폭력 피해여성은, 남편과 별거하고 법적인 도움으로 위자료를 받아내고 생활의 안정이 가능해진 이후로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과거에 남편에게 맞았던 부분이 지금에 와서 아프다는 것이다.
뭉크 - <절규>. 우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찾아오는 절규와 고통의 순간을 똑바로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바로 그것이 가장 큰 '고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폭력이 발생하는 상황 아래서는 아프지 않았다. 폭력적 상황 아래에 있는 동안, 그들은 실제로 무통증 환자였다. 그들은 고통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집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고통이 찾아온 것은 오히려 그 상황에서 벗어났을 때였다. 이런 현상은 교통사고와 비슷해 보인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너무나 놀란 마음이 고통 그 자체를 덮어버린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온 몸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상담에서 그들이 지목하는 고통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갑작스레 이유도 모른 채 덮치는 폭력에서 느끼는 공포다. 언제 어떻게 자신을 덮칠지 모른다는 공포. 이 공포로 인해, 그들은 고통이 발생하는 순간, 사요코의 표현을 빌자면 고통이 방문하는 순간, 그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기에 아플 수도 없는
사요코는 우리가 방문하는 고통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폭력 피해자들처럼, 자신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우발적이게 보이는 고통인 경우 이런 일이 발생한다. 돌발적으로 자신을 침범해 들어온 고통. 그 고통이 가진 예측 불가능성과 그로 인한 이해불가능성.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고통은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삶의 맥락을 끊고 들어오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런데 사요코에 따르면, 묘하게도 우리가 실제로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사건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요컨대 설명할 수 있을 때다. 나름의 설명을 통해 끊어진 삶의 맥락을 이어붙이고, 그 붙여진 자리에 고통이 들어선다.
거꾸로 말하자면, 맥락이 끊어진 상황을 자각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설령 고통이 찾아와도 느끼지를 못한다. 자신의 납득할 만한 설명을 통해 절단된 삶의 맥락을 이어 붙이지 못하면, 고통은 마치 문 밖에서 서성이는 손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 이해할 수 없기에 아플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고통 대신, “뭔가 숙제를 하지 않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뭔가 해결되지 못한 기분, 뭔가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 우리는 이를 풀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다. 자기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 또는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니는 일 모두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그럼에도 그런 시도들이 진정 숙제를 해결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요코에 따르면, 고통은 숙제가 해결될 때 느껴진다. 그리고 이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문제 상황은 매듭지어진다. 반대로 말해서, 숙제가 잘 해결되면 아이러니하게도 편안함이 아닌 고통의 순간을 맞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랜 기간 삶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왔다면, 그래서 그걸 해결하고자 노력해 왔다면, 그 과정을 한 번 돌아보자. 문제 상황을 나름대로 합리화하고 난 다음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혹 상담을 받았다면, 그 후에 어떤 느낌이 찾아왔는지. 만약 거기서 고통에 앞서 편안함이 먼저 찾아왔다면, 지금 내 숙제 풀이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물어야 할지 모른다. 그 편안함이 오히려 삶을 위협하는 무통증의 증상이 심화되는 징후는 아닌지, 라고.
고통을 피하려 하거나 제대로 절망을 겪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만'인 것은 아닐까. 괴로워지는 순간에 비로소 우리는 지금까지의 삶을 자세히 살피게 된다.
'생명과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못하는 건 없다, 하기 싫을 뿐! ㅡ나의 뇌구조그림 (2) | 2012.10.03 |
---|---|
배운다, 고로 존재한다!ㅡ마뚜라나의 생물학 (0) | 2012.09.19 |
몸이 내게 내준 숙제, 아픔 (0) | 2012.09.05 |
우연과 필연을 넘어서 '풍성한 생명'을 꿈꾸다! (3) | 2012.08.08 |
생명체 지구의 또 다른 이름, 가이아 (0) | 2012.07.25 |
유행병, 도시문명의 산물 (0) | 2012.07.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