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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소리 객소리 딴소리

[쉰소리객소리딴소리] “마음을 살피기 위해 노력하면 인간의 정신은 훌륭하게 발전한다. 이것은 내가 확실히 보증한다.”

by 북드라망 2022. 12. 14.

“마음을 살피기 위해 노력하면 인간의 정신은 훌륭하게 발전한다.

이것은 내가 확실히 보증한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함이 없다고 우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점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는 몸에 밴 습관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다듬는 데 도움이 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마음을 살피기 위해 노력하면 인간의 정신은 훌륭하게 발전한다. 이것은 내가 확실히 보증한다.”(달라이 라마, 『행복한 삶 그리고 고요한 죽음』, 주민황 옮김, 하루헌, 2022, 30쪽)


같이 여행 며칠 가본 걸로는 알 수 없다. 그게 한 달짜리 여행이라도 마찬가지다. 살아 봐야 안다. 이게 내가 타인과 아이를 함께 낳으며 살게 된 후 갖게 된 확신이다. 그 전에는 긴 여행 정도면 같이 사는 거에 비할 바야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략의 면모는 파악할 수 있지 않나 생각했다. 오산 중의 오산이었다.

여행은 ‘일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상태에서 내 몸과 마음에 배어 있는 수많은 습관들이 펼쳐진다. 타인과의 동거는 습관과 습관이 맞붙는 ‘전장’이다. 뚜껑을 어떻게 따느냐부터 어느 정도 꽉 닫아 두느냐까지(당신의 걱정 때문에 너무 꽉 닫은 뚜껑을 나는 열 수가 없다, 혹은 열다 화가 난다), 식습관부터 설거지 뒤처리까지(설거지의 마무리는 그릇을 다 닦은 상태가 아니라 싱크대의 물기까지 없는 상태다), 빨래를 내놓는 방식부터 거는 방식까지(왜 티셔츠 목이 늘어나게 거는 거지), 아이에게 내복을 입힐 것인가 말 것인가부터 아이가 소파 등받이에 올라가는 걸 위험하게 보느냐 안 보느냐까지(아이 입에서 잔소리쟁이라는 말이 나왔다)…. 일상에서 만나는 나와 다른 방식은 모두 ‘틀린’ 것으로 일단 즉각적으로 와 닿는다. 이때 실제 상대와 말로 이 ‘건’에 대해 한마디하는 데까지 나아가느냐 멈추느냐는, 내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상대가 틀린 게 아니다”라고 내 자신에게 한 번 말하는 순간을 갖느냐 안 갖느냐로 갈린다.


나의 행동은 나에게 너무 익숙하고, 내 머릿속에서 충분히 ‘이성적으로’(?) 합리화된 것이므로, 다른 이의 다른 방식은 어쩐지 불합리(!)하거나 좀 부족한 것으로 ‘느껴’진다. 이 ‘느낌’은 비단 ‘가족’으로 일상을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만이 아니라, 회사 동료, 공동체 도반, 단체의 동지… 등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다만 가족이 아닌 경우에는 그래도 아주 약간이나마 ‘나의 올바름’을 회의해 볼 기회가 더 있는 듯하다). 회사에서든 어디에서든 나에게 익숙한 어떤 일을 타인과 함께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왜 이 일을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하지???” 그런 경험담 가운데 하나를 내과의사로 30년간 일해 온 이여민 선생님의 『대중지성, 금강경과 만나다』에서도 볼 수 있다. 간호사 한 명과 일하는 작은 병원의 원장인 선생님은 몇 년 전 만난 간호사 분이 면접 때 이야기와 달리 컴퓨터를 제대로 못 다루고, 동명이인의 환자를 수시로 잘못 접수해 혼선을 일으키고, 실수한 뒤에도 “환자들과 수다를 떨거나 개인적 통화를 하는 등 업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데다가 더 나아가 실수에 미안해하기는커녕 월급인상까지 요구하는 바람에 병원에 출근하기가 싫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해결책 없이 경전반 공부로 마음을 달래던 중, 법륜 스님이 강의 도중에 “화가 나는 마음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 생각이 옳다!’ 하는 아상(我相)이 버티고 있다”고 하신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원하는 간호사의 올바른 상(相)은 접수를 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접수도 제대로 못하고, 일을 대하는 태도도 내 생각[我相]과 다르니, 그녀만 보면 화가 났음을 알게 되었다. 접수를 잘해야 한다는 간호사에 대한 나의 기대를 고집하지 않자 청소를 깨끗하게 하고 환자들과 웃으면서 응대를 능숙하게 하는 그녀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호사와 의사라는 상을 내려놓자 나 또한 ‘의사’로서 환자를 잘 보는 일 외에도 필요한 순간에는 ‘간호사’가 되어 접수일도 하고 청소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여민, 『대중지성, 금강경과 만나다』, 북드라망, 2022, 15~16쪽)


‘내 생각이 옳다’는 아상을 자각하면, 습관과 습관이 만나는 전장은 ‘웬만해선 알 수 없는’ 나에 대한 훌륭한 배움터가 된다. 일상의 사사로운 일들―설거지 방식부터 0도의 날씨에 유치원 갈 아이에게 내복을 입히냐 안 입히냐의 판단에 깔린 ‘내 생각이 옳다’는 숨쉬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 그 오만한 미욱함을 미처 깨닫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무지에 무관한 번뇌는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번뇌’로 마음이 들끓을 때 우리는 ‘누구 탓’이 아니라 ‘나의 무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아주 전투적으로. 그렇게 일상의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의 정신은 ‘훌륭하게 발전’할 수 있다고, 달라이 라마는 확언에 ‘보증’까지 더하신다. 나는 덜 번민하고 싶다. 나는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나의 언행에 1초만큼이나마 더 주의를 기울인다. 내일은 오늘보다 1초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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