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당신이 있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우정은 삶의 ‘본질적’인 요소일 거라고 생각해요.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나에게 말했듯이 우정은 사랑에 비해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어요. 사랑의 경우, 당신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 항상 걱정을 하게 돼요. 늘 슬프고 근심스러운 마음 상태에 놓이게 되지요. 반면 우정의 경우 친구를 2년쯤 보지 못할 수도 있어요. 친구가 당신을 무시할 수도 있고 당신을 피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당신이 그의 친구라면, 그리고 그가 당신의 친구라는 것을 당신이 안다면 그걸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우정은 일단 형성이 되고 나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답니다. 그냥 계속 가는 거예요. 우정에는 어떤 마술적인 게, 일종의 마력 같은 게 있어요.”(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말: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드느이 인터뷰』, 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2015, 182쪽)
10대 때 친구는 세상이었다. 좀 이상하게도 함께 자주 노는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 그룹이 따로 있었지만, 두 그룹이 곧 나의 세상이었다.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가고 그룹은 달라졌지만, 친구는 삶 자체인 건 변함 없었다. 친구가 빠진 일상이 있었던가?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매일 통화하고 매일 이야기하던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거리가 생겼지만, 그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친구들이 생겼다. 친구들의 나이 폭이 커졌다. 10대 때는 또래였고, 대학 때는 위아래 서너 살 차이 정도였다면, 사회에서는 열 살을 넘나들었다. ‘선생님’이지만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나면서, 이탁오의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배울 게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했다.
인문서 편집을 직업으로 하지 않았다면, 가지기 어려운 행운이었다고 확신한다. 늘 공부하는 분들, 배우고 싶은 분들 주변에서 그분들의 사유가 담긴 책을 만들다 보니, 일반적인 직장생활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우정을 경험했(고, 경험하는 중이)다. 출판계에서 일하다 보면 책마다 운명이 있다는 말을 믿게 된다. 흔히 책 팔자도 다 다르다고. 내게 그 책의 운명은 또 생각지 못한 새로운 우정을 불러오곤 한다. 하나의 예로, 내가 읽은 책들을 가지고 변변치 않은 글을 (회사)블로그에 연재했을 때 편지(이메일이 아니라)를 보내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지금 어느덧 햇수로 10년이 넘게 편지를 드문드문 주고받는다. 정갈한 글씨로 빼곡히 마음을 적어 보내주는 친구의 편지를 받아 읽노라면, 내가 그래도 전생에 좋은 일을 하긴 했나 보다, 라는 때 아닌 자기 긍정(?)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 거의 이 끝에서 저 끝에 살아서 생활공간에서라면 만날 일이 정말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글 하나로 인해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선한 마음이 내게 그 자체로 배움이 된다. 이렇게 선한 마음으로, 사람은 물론이고 사물 하나하나도 정성스럽게 대하는 이가 있구나. 그 정성스러운 마음이 거울이 되어 익숙한 사물은 홀대하는 내 일상을 비춘다. 그러면 나도 잠시 홀대하는 마음에 브레이크를 걸게 된다.
내가 어제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사물에 정성을 다하는 부분이 생겼다면 그 친구 덕분일 터다. 그리고 또 내가 어제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책 읽는 데 이해가 높아졌다면 또 다른 친구가 먼저 한 공부 덕분이다. 그리고 또 내가 어제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면 또 또 다른 친구가 보여준 공감 덕분이다.
“훌륭한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훌륭한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필요가 없지.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의로 사귀는 것일세.” 연암 박지원의 말이다.
“지혜가 행복을 위해 준비해 준 모든 것들 중에서 우정보다 더 위대하고, 더 풍요로우며, 더 기쁨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피쿠로스의 말이다.
글_북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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