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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소리 객소리 딴소리

[쉰소리 객소리 딴소리]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by 북드라망 2022. 11. 23.
나이가 쉰을 넘어 가니, 그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마냥 고정되어 있을 것 같은 어떤 상태도 시간 속에 변화됨을 목격하기도 한다. ‘쉰이 넘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랄까. 내가 나이 들어서 좋다고 생각하는 점 중 하나는 이런 것들이 보인다는 것, 이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코너 하나를 만든다. 비정기적으로, 그러나 꾸준히 올리는 것이 목표이다. 쉰이 넘어서 하는 이 객쩍은 소리, 게다가 종종 딴소리로 빠질 이야기이지만 독자분들에게 거는 작은 말걸기로 너그럽게 보아 주시길.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임화의 시 「자고 새면」 제목과 함께 있는 글귀이다. 20대 중반, 어쩐지 알 수 없는 열패감에 젖어 살 때, 특히 이 시의 1연과 마지막 연이 자주 머리에 떠올랐다. 이 시의 1연은 이렇다. 

 

“자고 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랐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최근, 이 글귀가 자주 생각난다.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20대 때의 내가 생각한 ‘운명’과 지금 생각하는 ‘운명’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전의 ‘운명’은 통념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 어떤 처지’ 같은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손 쓸 수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하지만 곰숙씨(고미숙 샘)와의 만남으로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를 내고, 또 여러 관련 책들을 읽고 공부하고 출간하고 등의 활동을 거친 지금, ‘운명’은 내게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에는 물론 타고난 어떤 기질이나 편향처럼 주어진 것이 분명 작용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내가 그 상황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 어떤 쪽으로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때 타고난 대로, 편한 습(관)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다(정말이지 공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등골이 서늘...). 단 한순간이라도 덜 끌려간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편한 선택을 거스를 수 있다면, 대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들이 조금씩만 더 모이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내 주위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고, 나는 그들을 보며 또 확신한다(그런데... 또 이 좋은 운도 내가 그런 이들을 바라기 때문에 많이 모인 것이니 결국 내가 만든 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출판사 책 중 『아파서 살았다』라는 책이 있다. 류머티즘과의 40년 동행기를 담담히 풀어간 에세이인데, 이 책의 저자인 오창희 샘을 만나면, 누구나 그 명랑함에 놀란다. 스물한 살에 발병하여 초기 몇 년간은 누워만 지내야 해서 대소변 처리까지 어머님께 맡겨야 하는 나날을 보냈음에도, 각종 약의 부작용도 여러 번 겪고, 인공관절 수술도 하시고… 그렇게 40년을 살아오는데도 창희 샘의 얼굴과 말에는 그늘이 없다. 언젠가 선생님과 통화 중에 앞이 잘 안 보이는 내 동생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잊을 수 없다. 

 

“저는 살면서 한 번도 사람들이 나를 안 도와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고요. 아마 동생 분도 그런 생각이 아니실까요.” 


가슴이 저릿했다. 저런 생각이 오늘의 삶을 만든 거구나. 나에게뿐 아니라 아마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웃는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떠올리는 누구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띨 것이다. 

딸이 생긴 이후 나는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가 기도 중에 종종 하시던 말씀―“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시고”의 의미를 진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창희 샘의 이야기로 ‘좋은 사람’은 내가 만나게 만드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즈음 종종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좋은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글_북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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