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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소리 객소리 딴소리

[쉰소리 객소리 딴소리] ‘동안’은 ‘성숙’을 잠식한다

by 북드라망 2023. 1. 16.

‘동안’은 ‘성숙’을 잠식한다

 

“자본주의가 바로 그랬다. 자본은 봄/여름만 알지 가을/겨울은 알지 못한다. 오직 소유하고 증식할 뿐, 버리고 비우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인생을 청년기에만 묶어 놓은 격이다. 즉, 청년기의 야망—노동과 화폐와 에로스—을 어떻게 증식할 것인가에 대한 공학과 기술만 있을 뿐! (……) 중년 이후의 이념과 가치는 오직 ‘안티 에이징’이다. 그 결과 우리시대 중년들은 청년을 질투하면서, 또 청년을 모방하고 표절하면서 살아간다. 억지로 열정적인 척 하면서, 피부의 ‘골든타임’을 지키느라 안간힘을 쓰면서,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우기면서.”(고미숙,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북드라망, 2016, 193쪽)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오는 안전문자를 보면 어이없어진다. 나만 기분이 이상한가. 국가의 행정안전부나 환경부 등에서 일괄로 보내는 문자의 내용은 “도로 미끄럼 사고와 보행안전에 유의”하라, “외출자제, 손씻기, 마스크 착용 등 위생관리 철저로 건강관리에 유의”하라, 한파가 계속되니 목도리와 장갑 등을 착용하라, 폭염이 계속되니 챙 넓은 모자나 양산을 쓰고 물을 마시며 안전사고에 대비해라, 등등―유치원 다니는 딸에게 내가 하는 말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뭐지? 영하 10도 정도의 날씨에 알아서 내복 입고 목도리 두르고 겹겹이 껴입고 나가는 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 정도로 우리는 고객국민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티내는 건가? 뭐가 되었든, 나는 갑자기 내가 미취학아동이라도 된 기분이 된다. 하긴, 우리 모두가 ‘애’가 되고 싶어하는 세상이긴 하다. ‘더 어리게’, ‘더 어리게’ 보이는 것이 우리시대의 바람 아닌가. 

 

‘어려 보이고 싶다’는 욕망은 당연히 외모에 대한 것이지만, 또 너무나 당연히 그 욕망의 결과는 ‘외모’로 끝나지 않는다. 얼굴에는 그 사람의 삶이 다 드러나는 법이다(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관상은 과학이라고). 그 삶에는 마음, 정신, 가치관 등등 드러나지 않을 것 같은 세계가 포함된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집착하면서 마음도 정신도 함께 어려진 어른들. 50대가 되어도 60대가 되어도 국가가 보내주는 목도리 챙기라는 문자가 어색하지 않고, 누가 날 안 챙겨주나가 고민의 한 축이다.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가장 큰 롤모델 같은 것은 ‘지성인’(유식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하든, 지식인이라고 표현하든, 책 많이 읽는 사람이라고 하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 전 근대 사회에서는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었고. 우리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우리는 ‘지성’을 겸비한 어른이 되는 것을 바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바람’을 접하기 힘들다. 심지어 중년들이 모방하는 청년들마저 ‘동안’을 위한 ‘자기 관리’와 ‘투자’에 소홀하지 않는다.

모두가 ‘어려 보이는’ 걸 좇으며 정말 어려진 건, 우리의 생각, 우리의 정신, 우리의 마음이다. ‘안티 에이징’이 불러온 ‘미성숙’한 마음이, 우리 삶을 더 미성숙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이제 그만 ‘동안’ 이야기는 멈추고, ‘어른’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우리 인생의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 제대로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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