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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레비스트로스와함께하는신화탐구] 아무개의 누구로 타오르기

by 북드라망 2022. 11. 21.

아무개의 누구로 타오르기  



치유는 소외를 통해서만이 
큰 아이 뽕시가 코로나에 다시 걸렸습니다. 얍! 멋지게 발차기하려던 태권도 학예회 발표도, 땀 흘리며 외웠던 조선 개국 스토리 수행평가도 모두 안녀응~. 창밖으로 친구들 가방 메고 뛰어가는 것 보던 뽕시가 짧게 한탄합니다. ‘외롭다, 외로워.’ 저는 ‘네가 고독을 아느냐?’ 하며 귀엽다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 속으로, 숙제 속으로 뛰어들 수 없는 뽕시가 한동안 갖고 놀지 않던 장난감이며 책 등을 슬슬 끄집어내는 것을 보니 고독의 다른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아무리 외로워도 혼자는 아니예요. 주변에는 늘 어떠어떠한 사물이 있고, 눈을 감으면 기억과 꿈이 떠오르고, 무엇보다 고통으로 계속 자연의 메시지를 보내오는 바이러스가 있지요. 고독이란 고립이 아니라, 실은 더 많은 존재들과 함께 있음을 느끼는 상태가 아닐까요? 나란 성취되어야 할 욕망과 인정받아야 할 자존만 지닌 존재가 아니니까요. 격리 나흘 째, 뽕시는 이제 휴식의 일상을 느긋이 즐깁니다. 걸리는 것도 낫는 것도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달았다는 듯이요. ^^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갑자기 벌어진 거리는 나란 존재가 ‘누구들과 함께인 나’였는지 실감케 합니다. 그 맥락으로부터 떨어지게 되면 당연 소외감을 들지요. 아픔이란 결국 맥락 이탈이고 소외입니다. 그러니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맥락의 재구성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 세 번의 코로나를 보낼 정도로 인간들이 ‘함께하는 그 누구들’에 대해 질문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재구성의 과정 즉 치유에 필요한 것은 정말로 격리, 고독인 듯합니다. 이전 맥락으로부터의 소외이지만 더 넓고 깊은 맥락으로 뛰어드는 일입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 
보통 ‘소외’라는 말은 안좋은 뉘앙스를 갖고 있어요.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분석하면서 상품의 소외를 논했습니다. 사물이 상품화될 때 두 단계의 소외가 발생하는데요. 우선, 상품 즉 주고받는 대상이 되기 위해서 이 사물과 저 사물의 가치가 등가적이 되어야 합니다. 벌교에서 난 쌀과 이천에서 난 쌀이 ‘쌀’이라는 이유로 동일해집니다. 농부가 먹을 쌀인지, 임산부가 먹을 쌀인지, 신이 먹을 쌀인지도 중요하지 않게 되지요. 내 아버지가 기르고 내 자식이 먹을 그 쌀이 ‘쌀 자체’로, 즉 온 맥락이 거세된 상태로 변신해야만 상품이 되니까 여기에서 소외가 일어납니다. 

 

이 소외가 두 번째 소외를 일으킵니다. 상품을 소유한 사람 각자가 ‘소유자’로서 대등해져야 하니까요. 신분이나 지위의 높낮음을 막론하고 똑같아지니까 좋다고도 할 수 있지만, ‘소유자’가 될 수 있는 한에서의 동등이니까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맑스는 사물이 제 고유한 맥락을 잃어버릴 때 그 세계 속의 사람도 제 고유한 인생을 잃게 되기에 소유자로서의 인간도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상품들로 꽉 채워진 세계에서 사람은 ‘소유자’로서 자기와 남을 바라보게 된다는데요, 그렇게 되면 뭔가를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은 이 세계에 발붙일 곳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소유권이란 처분권입니다. 소유물에 대한 전제적 지배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타인의 동의 없이 그 대상을 다룰 수 있는 권리이지요. 처분에 맡겨진 그 대상은 어떻게 될까요? 제 고유한 목적이나 상태와는 무관하게 소유자의 편의에 따라 쓰이게 되겠지요. 맑스는 『자본』에서 상품이 된 인간에 대해 주목합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팔게 된 인간은 어떻게 되겠느냐입니다. 사람이기에 빵이나 컵과 달리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데리고 노동력의 주인에게 가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노동력’만 빼어 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맑스는 이때 소외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고유한 인격을 가진 한 인간이 소유자에 의해 마구 처분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고요(고병권,「1장. 상품을 소유한다는 것」,『북클럽자본3, 화폐라는 짐승』참고). 

 


맑스는 상품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자가 자기 처분권을 잃는 상황을 소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처분권을 지닌 자로 인간을 바라보게 된 점 아닐까요? 맑스의 분석대로라면 노동자의 자유는 자기 처분권을 회복하는 데에 있게 됩니다. 하지만 신화학에 흠뻑 빠져 있는 저로서는 ‘소유자’로 자기를 바라보는 일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잠깐, 자기를 ‘소유자’로 가정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그는 사물만이 아니라 욕망이나 경험처럼 비물질적이면서도 역사적인 것에 대해서까지 자기 의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더 나아가 ‘자기는 자기를 소유했으니까, 자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이런 사고까지도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기 느낌과 생각이라지만 소유물처럼 다룰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구체적인 온갖 상황 속에서 타자들과 함께 만드는 것들이니까요.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우기게 되면 안나 카레니나처럼 살게 됩니다. ‘내 사랑을 돌려줘!’ 안나는 남편에 자식까지 두었고, 대저택과 마차까지 가졌건만 기차 앞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애인 브론스와의 사랑이라는 소유물을 갖지 못해 슬펐기 때문입니다. 안나는 기차에 부딪치기 직전에 깨닫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어디에, 왜 서 있는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자기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기를 자기가 처분할 수도 있다고 하는 그 사고, 자기를 ‘소유자’로 바라보는 이 생각 방식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물화된 인간과 그의 주술 
‘동등’을 겨우 상품 소유자로서밖에 바라볼 수 없었던 자본주의에서와는 달리, 신화의 세계에서는 동식물과 사자나 망령까지 인간과 동등합니다. 이 세계에서는 누구도 자기를 소유할 수 없기에, 맑스의 분석대로라면 소외가 넘쳐납니다. 생명을 지닌 것들은 그 자체로 독립해서 존재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은 사물화되어 있다고까지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물신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고대의 인신(人神) 개념입니다. 제임스 프레이저가 소개하는 인신왕의 살해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생기발랄한 부족의 생명력이 인격화된 것이기에 고대 왕국의 왕(=신)들은 자신의 노쇠와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왕의 육체의 쇠락은 왕국의 영력과 직결되었기에 후궁들은 매일밤 왕의 정력을 시험했습니다. 늙어가는 왕은 공동체의 쇠퇴이기에 신민들은 왕의 힘이 떨어지자마자 그를 살해했습니다. 왕에게 깃들었던 영력은 왕을 시해한 자에게 옮겨가는데요, 그때부터는 살해자가 왕이 됩니다.(프레이저,「제50장, 신을 먹는 관습」,『황금가지2』참고)   

 

프레이저는 이 같은 살왕자 모티프를 통해 고대의 영성 개념을 분석했습니다. 위대한 영혼은 자기가 담길 그릇을 고르고 바꾸기 때문에, 그 영력을 체화할 뿐인 인간에게 개체적이고 자율적 삶은 불가능합니다. 국가의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는 만큼 왕은 국력을 상징하는 존재로서만 살아야 하며, 국력을 위해 죽습니다. 왕의 신체는 국력이라는 개념의 수단이 되지만, 왕이 된 자에게는 그것만큼 명예로운 일도 없지요. 그래서 그는 노쇠한 자신의 육신을 왕국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스스로 제단에 올라 코와 귀를 베고 자기 목을 따면서도 후회와 망설임이 없다고요. 

 

이토록 극단적인 자기 부정이 감행되는 야생이지만, 여기서의 소외는 자본주의에서의 인간 소외와는 다릅니다. 전자는 우주 전체의 영력 증대라고 하는 대의를 위해 늙고 죽는 생명을 ‘증식 의례’의 일부분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한 개인은 우주 자연의 다른 모습으로 자기를 바꾸면서 물체적으로는 죽지만 생사의 온 관계가 맺는 대칭성을 보존합니다. 후자는 오직 자본의 축적이라고 하는 비대칭적 목적을 위해서 인간에게 그 고유한 관계를 박탈합니다. 둘 모두에서 제 인격은 무시되지만, 신화적 사고가 말하는 소외는 우주적 관계성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되고 자본주의에서의 소외는 인간을 우주적 미아 상태로 유실시키는 장치가 됩니다.      

 

여기에서 신화적 사고가 ‘신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야생의 사고에서 정신과 신체는 유기체적으로 합체하지 않습니다. 신체를 주재하는 정신, 그것도 소유격을 쓸 수 있는 즉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신체 자체가 수많은 부분들의 복합체이며, 주변의 동식물(유정물)과 무정물과 함께 부분적으로 절단되어 관계적 신체를 계속 생산해낼 수 있습니다. 신화적 세계에서는 꿀벌과 개구리가 같습니다. 이들은 모두 알집과 같은 형태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기 때문입니다. 옥수수와 뱀이 같습니다. 둘 모두 껍질을 벗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분의 유사에 따라 존재성이 대체 가능하므로, 모든 신체는 항시적으로 소외 상태에 있는 셈입니다. 프레이저는 이 세계에서 주재자와 사람이 맺는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매년 대지의 표현에 일어나는 변화의 위대한 장관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그처럼 광대하고 경이로운 변화의 원인에 대해 사색하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거기서 인간의 호기심은 온갖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원시인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이 자연의 생명과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강물을 얼게 하고 대지의 식물들을 시들게 하는 자연의 과정이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프레이저,『황금가지 2』, 756쪽)

 


자연사란 없다 
신화의 세계에서 ‘인격’ 개념이 따로 없다는 점을 식인 문화를 통해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식인이라고 하면 끔찍한 생각부터 들지요. 인간이 인간마저 먹어야 하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야만! 식인의 이미지는 도저히 인간이랄 수 없는, 윤리라든지 도가 땅에 다 떨어진 상황 같기만 합니다. 그런데 레비 스트로스는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라고 하지요. 인간에게 식인이란 허기와 상관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를 구성한 인간은 오직 위대한 왕과 뛰어난 적의 능력을 흡수하기 위해서만 인간을 먹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현대 인류가 장기를 이식하는 일과 야생의 인디언이 식인하는 것을 외부로부터의 힘을 포섭하여 자기 정체성을 증식시키려는 원초적 사고 위에서 발생한 동일한 사태라고도 설명합니다.(레비 스트로스,「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참고) 


제임스 프레이저가 말하는 신성왕의 살해, 인신왕을 둘러싼 식인도 이 같은 사고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죽은 자가 과연 인간인가하는 부분입니다. 인신왕은 ‘그 자신’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왕은 부족 전체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기호이기에 살아 생전에도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는 없었습니다. 프레이저는 세계 도처의 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로 일본의 천황을 꼽을 수 있습니다. 황제는 땅에 발을 내딛어서도 안 되고 햇빛을 쬐어서도 안되었지요. 왕을 땅과 하늘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했습니다. 즉 자연 그대로의 한 사람일 수는 없었다는 말이지요. 

 


프레이저가 소개하는 것 중에 세계 여러 부족의 소녀 통과의례가 있습니다. 소녀들은 초경이 시작될 조짐만 보여도 큰 소리를 지르며 가족들로부터 특히 남자들로부터 도망가 어떤 어둡고 깊은 곳에 유폐되게 되는데요. 때로는 4~5년 동안 굴에서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혼자 먹고 자야 하고요, 인신왕의 경우처럼 누군가가 음식물을 갖다주어야만 하고 때로는 떠먹여 주어야만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월경을 시작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자연의 주기성을 타기 시작했다는 뜻이고,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자연의 주기성이 아니라 그 부족의 주기성에 따라 사람을 낳아야 하기 때문에 초경을 시작한 소녀는 철저하게 부족의 일원으로 관리되어야 했던 것이죠. 이 단계에 이르면 소녀도 인신왕처럼 자연적 존재일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이제부터 부족의 일원이 되어야 하기에 먹을 것, 입을 것에 제 취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녀는 부부의 인연을 맺을 자와 낳을 아이까지 부족 전체의 우주론을 통해 만들어내야 할 의무를 지닌, 문화의 한 구성 요소가 됩니다.(프레이저,「제60장, 하늘과 땅 사이」,『황금가지2』참고)  

 

그래서 레비 스트로스는 문화 속 인간에게 ‘자연사’란 없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고 죽으니까요. 누군가의 아이로 이 세상에 와서 누군가의 엄마로, 나아가 어떤 이들의 친구, 학생, 부하, 상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꼭 인간만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 책상의 주인으로, 그 까페의 사용자로, 그 이데올로기의 추종자로, 그 신의 신민으로입니다. 

 


자기화된 타자들
야생의 식인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최근에 번역된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입니다. 카스트루는 브라질 투피남바 부족의 식인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타자의 능력을 섭취한다고 하는 레비 스트로스의 관점을 보다 확장시킵니다. 식인은 제 정체성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기보다 타자에 의한 자기화의 무한한 회로를 여는 일이랍니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한없는 포식의 연쇄 속에서 타자와 다르지 않은 자기를 인식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이 되는 것이죠. 카스투르의 해석에서 식인은 끊임없이 타자를 통해, 타자로 채워지고 채워지는 자기를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드려 보겠습니다. 투피남바 족은 엄청난 전쟁광이었습니다. 그들 전쟁의 명분은 복수에 있었지요. 저 부족이 우리 부족의 누군가를 죽였기 때문에 우리도 되갚아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었는데, 유럽의 선교사들이 식인이 나쁘다고 아무리 말해도 겉으로만 끄덕거릴 뿐 돌아서면 다시 전쟁에 나설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은 포로를 잡아 처형시킨 후 적의 고기를 넣고 끓인 매우 묽은 국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투피남바족의 식인은 전쟁 포로 먹기입니다. 그런데 ① 전쟁이 아니라 포로를 먹는 것이 목적이기에 그들은 적이 되는 그 부족민 전부를 먹지 않습니다. 몇몇의 포로를 잡으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뛰어난 장수 몇이면 중단될 게임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대학살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을 만난 카스트루는 투피남바족의 상냥함과 너그러움, 정중함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포로 앞에서 호전적이었지 성정이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② 이들은 잡은 포로를 마치 가족처럼 대했습니다. 포로와 함께 사냥에 나가기도 하고 그들에게 아내를 선물하기도 하고요. 자기들의 사회 깊숙이 그들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가족이었던 포로는 어떻게 먹이가 될까요? 중요한 국면이 포로가 죽기 직전에 ‘만들어집니다.’ 사형 집행자와 포로 사이에 적대에 찬 말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포로들은 자신이 고통받아야 할 때가 왔음을 알기에 연설을 시작하며 담대하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이미 복수가 이뤄지고 있다고, 본인의 업적과 함께 자신을 죽이려는 자의 친척들에게 다가올 죽음을 말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친척이 복수할 것이라 말하며 죽음의 집행자를 비롯해 모든 마을 사람들을 위협한다(Soares de Souza 1587:326; 카스트루,『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94~95쪽 재인용) 


포로쪽이 훨씬 더 당당하지요. 포로는 자기 부족의 누군가가 과거에 적군의 장수를 죽였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죽음 덕분에 죽이려는 자들 역시 복수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며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피식자는 죽기 직전까지 적의 복수를 찬미한다는군요. 이때 정해진 살인자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죽이는 그 자의 말은 나중에 그가 하게 될 말이라는 것이 이 살인자의 말 속에서 보다 확실해집니다. 그래서 이들은 뜨겁게 말싸움을 하면서 죽이는 자와 죽을 자의 자리를 계속 바꾸게 됩니다. “그래, 넌 나를 죽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친척이 너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일 너는 내 마을에서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일 것이다.”(앞의 책, 179쪽 재인용) ③ 죽음 앞에서, 식인의 직전에, 지정된 살해자와 포로는 주체성을 교환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포로를 구하려고 했음에도 오히려 포로 쪽에서 그들의 포획자를 설득해 제발 먹어달라고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적에게 잡아 먹히는 것은 역병에 걸리거나 늙어 늘어진 시체로 썩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명예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연이어 발생할 복수극은 처형된 개인에게는 영광이 되고요, 그를 잃은 부족에게는 치욕이 됩니다. 여기서도 발견되는 부족민 개인과 부족 자체의 불일치는 현대 전체주의 시스템에서 발견되는 ‘전체를 위한 부분’ 논의와도 잘 대비됩니다. 죽을 때 그는 자신을 위해 복수할 누군가의 이름으로 죽고 그 미래의 누군가로서 죽습니다. 시간적 차원에서 그 존재는 영광의 연쇄를 만듭니다. 투피남바족에게 ④ 식인이란 전사를 잃은 부족이 과거의 치욕을 음미하고 미래의 영광을 예감하는 의례였습니다. 카스트루는 복수가 끊임없이 미래를 향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복수는 시간을 생성시키고 시간 속을 여행하는 기계였다.”(앞의 책, 99~100쪽 참고) 이들이 말싸움을 통해 치욕의 과거와 영광스런 미래, 집단의 치욕과 개인의 명예를 구성해냈습니다. “처형은 과거의 죽음을 미래의 죽음으로 연결하면서 시간에 의미를 부여”합니다(카스트루, 앞의 책, 95쪽). 하지만 죽는 이 순간은 다르지요. 이 국면의 공간적 차원에서 그는 자기 부족에게 모욕을 안기게 되니까, 부족과의 불화자로서 공동체의 균열을 일으킵니다.  

 

카스트루는 ⑤ 이 식인을 기호식(記號食 ; semiophagy)이라고 합니다. 치욕과 영광이라는 기호를 먹음으로써 시간을 생성해내는 식사법이지요. 카스트루가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이 식인 의례에서의 중요한 점 하나는 죽음의 집행자는 절대로 적의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앞의 책, 138쪽) 그의 혀는 맛보지 않고 말합니다. 그는 타인의 기호를 씹고 있는 중이니까요. 기호식을 진짜로 하는 자는 이 사람입니다. 카스트루는 식인주의를 ‘타자가 되는 한 가지 방식’(179쪽)으로 정의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레비 스트로스와는 강조점이 다르지요. 레비 스트로스가 보기에 식인은 자기 욕망의 부족분을 타자로부터 흡수하는 행위가 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카스트루의 식인은 나란 타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혀로, 신체로, 되돌아오는 나의 죽음으로 각인시키는 행위였습니다. 타자를 나로 흡수하기가 아니라, 나를 타자로 열어가기입니다. 

 

투피남바족은 적의 신체를 확실히 씹어 맛봄으로써 자신의 신체를 적에 대한 기억과 적을 통한 예감으로 채웠습니다. 16세기까지 투피남바 사회에서는 적을 죽인 자만이 결혼하고 자녀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타 부족 사람을 죽여야만 자기 부족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죠. 내가 나일 수 있던 때는 적이 나를 통해 “그의 자기”로 나타날 때뿐이었습니다. 

 

카스트루가 관찰한 투피남바족의 식인은 타자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사고 형식이었습니다. 이런 사고에 철저하다면 투피남바족은 결코 배가 고파서 혹은 맛 자체만을 보고 음식을 먹지는 못했을 겁니다. 식인이라는 방법을 통해 나란 무수한 남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내가 먹는 그 많은 것들 없이는 나도 없음을 적극적으로 의식했던 그들이기에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깊이 연구했을 것 같습니다. 

 

 

   
불꽃인 나   
‘나’란 자명한 실체 같지만, 문자 문화의 긴 역사 안에서 그 ‘나’가 의미하는 바는 계속 변해왔습니다. 개개(individual)라는 낱말은 고대부터 내려오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모호하지 않다’는 뜻으로 썼다고도 하고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 대해 ‘아무개의 아들로 턱수염이 있고 말이 많은 사람’이라 했다합니다. 직업이나 성격으로 소크라테스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습과 버릇으로 즉 그가 보여지고 반응하는 방식으로 그를 부른 셈이지요. 누군가의 이름은 부르는 자의 몫이지 불리는 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라는 것을 낱말과 기억, 생각과 역사, 거짓말과 서술 등과 마찬가지 수준에 있는 문자적 구성개념으로 봅니다. 구술 시대에는 구전 서사시와 그것을 노래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었어요. 이반 일리치는 활발한 구술 문화 속의 ‘나’는 마치 양초처럼 활동할 때에만 불을 비추며 그 나머지 때에는 꺼지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말하거나 들을 때 양초에 불을 켜지며 ‘자기’가 됩니다. 그런데 불이 꺼져 있을 때에도 죽은 것은 아니예요. 이야기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그런 이야기들 사이에 부여된 연속성으로서의 ‘나’란 없습니다. ‘나’는 말할 때에만, 사물과 영들과 그리고 또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에만 존재합니다.(이반 일리치,『텍스트의 포도밭』, 113쪽) 이렇게 불꽃 같던 나는 문자 문화의 확산과 인쇄자본주의의 발달 속에서 욕망, 경험, 생각의 소유자인 ‘자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외로움은 자기를 소유자로 바라보는 습관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요? 나란 늘 누군가의 나임을 천천히 이해한다면 고립에 대한 불안보다는, 아파 혼자 있더라도 타자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방 안을 밝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_오선민(인문공간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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