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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슬픔이여, 안녕!

by 북드라망 2022. 10. 10.

슬픔이여, 안녕! 


아침마다 추워지고 나도 늙어간다는 생각에 자꾸만 걷던 발걸음이 멈춰집니다. 뭔가 무거워져요. 이런 저를 보고 아이들이 묻습니다. “엄마, 슬퍼?” 그래서 오늘은 슬픔의 신화학입니다. 그래도 이야기는 웃으며 나누어야겠지요? ^^

 

 

열대의 슬픔
레비 스트로스는 열대가 슬프다고 했습니다.(『슬픈 열대』) 열대가 사람도 아닌데 슬프다니요?  
레비 스트로스는 ‘슬픔’에 대해 직접적으로는 아무 말도 않습니다. 사실, 그의 여행기는 슬픔만이 아니라 기쁨도 다루지 않습니다. 참 흥미롭지요. 그가 탐험한 열대란 서양제국주의가 잔인하게 할퀴고 간 장소였는데 말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찢기고 버려진 아마존 인디언들의 삶에 대해 어떤 도덕적 선(先)판단도 갖지 않습니다. 벌판에 맨몸으로 누워 잠 청하는 인디언을 보고 불쌍하다 동정도 않고요. 제국주의의 나라 프랑스 출신인 자기 입장을 미안해하지도 않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들을 가여이 여길 만큼 자기가 월등하다고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또 인디언이라든가 프랑스인이라든가 하는 정체성의 잣대란 누가 만든 것인지,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읽으면 『슬픈 열대』가 시종일관 보는 자와 보이는 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피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비친 인디언, 여성, 식민지인과 같은 ‘타자’의 아이콘들은 객관적으로 정해진 실재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그도 나를 바라봅니다. 그렇게 마주침의 한 장면이 구성되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원래’의 자기란 따로 없음을 알게 됩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픔’은 무엇일까요? 곤경에 처한 특정 타자가 환기하는 비애감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래 대목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둠이 깃들인 초원에서 숙영지의 모닥불이 불타오르고 있다. 엄습해 온 추위를 막아 줄 유일한 보호자인 모닥불 주위에서, 바람과 비가 두려워 급작스럽게 옆에다 야자수와 나뭇가지로 만들어 꽂아 놓은 허술한 병풍을 뒤로 하고, 그들의 지상의 모든 부를 이루고 있는 빈약한 물건들로 가득 찬 등채롱을 곁에 둔 채, 그들과 마찬가지로 적대적이고 겁 많은 다른 무리들의 방문을 받는 땅인 그 땅바닥에 그대로 누워서 꼭 껴안고 있는 부부들, 이때 그들은 서로를 나날의 어려움과 때때로 남비콰라인들의 영혼을 뒤덮는 몽상적인 서글픔으로부터 구원해 주며, 위로해 주고 또 지주가 되어 줄 유일한 사람으로 믿는다.”(『슬픈 열대』(한길사), 535쪽)


들판에서 꼭 껴안은 채 별 이불을 덮고 자는 야생의 남자와 여자입니다. 그들은 엄습해 온 추위를 서로의 온기로 녹이지요. 두 사람은 각자가 알아서 져야만 하는 나날의 어려움과 서글픔을 다독이고 위로합니다. 벌판의 부부는 자기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서로를 깊이 신뢰하며 끌어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괴테), 『보바리 부인』(플로베르), 『안나 카레니나』(톨스토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등 저도 참 연애소설 많이 읽었는데요. 별 이불 아래의 이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처럼 든든한 이야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한편, 위의 묘사에서 저는 레비 스트로스의 따뜻한 시선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아마존 열대의 밤 아래인 듯 하기도 하고요. 저들이 느낄 생의 근원적 고독과 사랑은 매일 밤 제가 느끼는 그것이기도 하니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열대의 타자에게서 자신을 보았고, 언젠가 그의 여행기를 읽을 저도 상상했나 봅니다.   

 

슬픔의 문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열대의 슬픔이 특정 대상에 대한 상식적 반응이 아니라면 감정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감정은 나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엇입니다. 신체적인 것이지요. 외부 물체에 대해 내 몸이 느끼게 된 정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에는 반드시 타자가 필요합니다. 그러고 보니 감정의 발생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작가가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였네요. 레비 스트로스는 프루스트를 좋아했습니다. 『야생의 사고』 9장의 제목은 ‘되찾은 시간’이고, 이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지막권의 제목과 같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는 어느 비 오는 날 어머니가 끓여주신 홍차 한 잔에 어쩌다 적신 마들렌 과자를 찍어 먹다가 유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장엄한 기쁨에 사로잡히지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다’라고 하는 저 멋진 제목이 암시하는 회상의 기술은 낯선 감각인상과의 조우입니다. 우리는 꼭 누군가 때문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것들과 접속하며 끊임없이 정서변용을 겪습니다. 가을 아침 한 줄기 찬 바람에서 느껴지는 서글픔, 퇴근길 뭉쳐서 구르기 시작한 마른 낙엽 냄새 덕분에 환기되는 긴장감, 현관 앞 강아지의 발구르는 소리가 주는 설레임 ……. 오감을 건드리는 것들이 일으키는 감정들의 세계를 따라가다보면 나의 하루가 참으로 많은 것들과 함께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프루스트는 우리 각자의 감정 세계가 우리 몸이 주파한 시공간의 넓이와 깊이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이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들의 바다였음을 이해했을 때, 화자는 아모르 파티! 진정으로 자기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프루스트를 생각하니까 스피노자도 떠오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스피노자도 좋아했지요. 『슬픈 열대』에는 레비 스트로스가 아카데미의 오만한 변증법주의에 맞서기 위해 스피노자 철학을 시험 답안에 써 놓고 나왔다고 자랑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머, 스피노자도 감정을 중요하게 다루었네요? 스피노자는 감정을 ‘행위 영략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이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이라고 했습니다.(『에티카』3부 정의 3)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정서의 기본으로 보았는데요, 기쁨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감정이며 슬픔은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해하는 감정입니다. ‘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란 더 많은 것들과 신체적으로 변용되고 그에 따라 더 많은 것들을 동시에 사고할 수 있는 행위 능력을 의미합니다. 슬픔은 그 반대가 되겠지요. 기쁨과 슬픔이란 행위 능력의 증감에 따른 느낌이기에 칼로 벤 듯 딱 자를 수 있는 무엇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출근길 아침에 느끼게 된 한 줄기 찬 바람에 따른 감정은 어제 남겨둔 업무와 함께 인생의 무상함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기쁨이 됩니다. 가을의 시작이라는 자연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일터를 향해 걸어가는 내 모습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때 나는 더 많은 것들이 살고 죽는 생의 지평을 떠올릴 수 있어, 업무의 스트레스로나 동료와의 불화를 가볍게 털고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찬 바람이 환기한 무상함에 사로잡혀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안 잡힌다면 어떻게 될까요? 곧 버리게 될지 모를 인생이라며 자포자기라도 한다면 행위 역량이 줄어드는 셈이니 슬퍼지겠지요. 스피노자에게 더 큰 완전성이란 더 많은 것과의 변용 능력을 말합니다. 사막과 툰드라를 다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 온갖 실패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너끈히 새로운 시도에 나서는 사람이야말로, 낯선 환경에서 몸이야 고생을 하겠지만 생의 온 인과를 함께 사유하기에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기쁜 사람인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슬픔’은 다시 설명해볼 수 있겠습니다. 『슬픈 열대』의 마지막 장은 미얀마의 한 불교 사원에서 끝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마침내 붓다의 제자가 되지요. 붓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걷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무지를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무지를 계속 넘어가는 자가 느끼는 감정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기쁨입니다. 슬픔은 반대가 되겠지요. 그것은 자기 무지에 끊임없이 갇혀 행위 능력이 줄어드는 상태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타인을 내가 살아볼 수도 있었을 그 삶을 사는 자로 정의했습니다. 우리 각자의 무지는 타자가 살아낸 삶의 가능성에 비추었을 때에만 깨어집니다. 무지했던 나를 반성할 때 부끄러워지므로 위축됩니다, 슬퍼지지요. 하지만 그 부끄러움으로부터 비로소 더 큰 완전성으로, 생에 대한 지극한 깨달음으로 나갈 기회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이 슬픔은 끊임없는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어떤 진리도 절대화되는 순간, 우리를 슬픔의 나락으로 빠트린다고 보았던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 그가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곳이라고들 하는 아마존에서 자책과 원망 없이 여행기를 쓸 수 있던 이유 같습니다. 내가 모시는 신의 은총으로 충만해 매일 희희낙락 웃고 산다 해도, 자기 신의 명령밖에 따르지 못할 때 우리는 덜 완전해집니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의 조건에 갇히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열대는 슬프다라고 말했던 것은 다양한 문제가 우글거리는 열대에서처럼 우리가 제 상식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스피노자는 이런 노력 속에서만 우리가 자유를 맛볼 수 있다했지요. 별 이불을 덮든 황금 금침(衾枕)을 덮든 어디서 무엇을 두르고 있는지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기뻐질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 유한한 생이 주는 슬픔에서 무한한 통찰의 기쁨으로 가는 길을 보았습니다.  
  


타들어가는 슬픔, 불어나는 기쁨
열대의 ‘슬픔’을 통해 감정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 이후 근대 소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다루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의 소설이 한 정서에 대해 과도히 집착하는데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특정 대상으로부터 받는 맹목적 인정을 의미합니다. ‘무조건 네가 좋아, 너를 소유하고 싶어!’ 행위이기도 하고 감정이기도 한 이 ‘사랑’을 느껴야만 기쁘다는 생각이 주인공을 지배합니다. 스피노자라면 이런 사랑은 슬픈 것이라고 했겠지요. 그런데 실제로 소설의 결말이 슬픕니다. 보바리 부인이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욕망의 화신들은 ‘왜 너는 나를 안 사랑해?’ 울고불다하다가 자살해 버리니까요. 레옹이나 브론스키처럼 젊고 멋진 누군가만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갇혔다는 점에서 사랑은 그녀들을 자유롭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24시간 새끼도 잊은 채 애인만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행위 능력이 훅 떨어진 슬픈 상태이기도 했지요. 관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녀들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근대 소설사 전체가 연애소설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애인과 나’라는 2자 관계로 응축되어 버린 삶의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감정의 차원에서 신화를 보면 어떻게 될까요? 우선 레비 스트로스가 소개하는 신화를 보면 주인공이 특정 감정에 집착하는 경우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들이 표범이 되었다가, 새가 되었다가, 개구리가 되었다고 계속 존재 양태를 바꾸는 통에 감정의 변용을 일으킬 신체의 타자들이 다 달라지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열대의 신화야말로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여정을 잘 보여줍니다. M454 체로키족의 신화 ‘별들의 다툼’을 읽어 보겠습니다.  

 

 ① 해 부인의 딸은 하늘의 천정점에 살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땅의 다른 쪽에 살았다. 매일 일상의 운행을 하는 여성별(해 부인)은 점심을 먹으러 자신의 딸집에 머무르곤 했다. 


해-부인과 그의 딸이니, 여기는 해가 두 개나 떠 있습니다. 해-부인이 점심때 딸 집을 매일 방문하시니 하루 중 최고로 해가 빛나는 시각이 두 배나 뜨거울 겁니다. 아휴, 센티했던 저의 가을 아침이 갑자기 더워지네요.   
 

② 해 부인은 자신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인간들을 미워했다. 그녀의 오라비 달은 자기 앞에서 인간들이 모두 웃는다고 항의했다. 해는 이를 질투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병을 일으켰다. 모두 사라질 것을 두려워한 인간들은 수호신들에게 해 부인을 죽이라고 호소했다. 수호신들은 독사를 매복시켜 놓았다. 판본들에 따르면 별(해)은 죽고 그녀의 딸이 해를 대체했거나 뱀들이 잘못하여 어머니 대신 딸을 죽였다.

 

해-부인은 자기를 보고 인간들이 찡그리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슬픈 상태인 거지요. 과도한 열기로 대지를 태우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상대방 탓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달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이 자기는 보고 웃는다며 잘난 체를 하니까요. 인간이 달을 보고 웃는 것은 달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어둠(밤)과 빛(달)이 공존하는 그 조화를 좋아해서지요. 

 

자기밖에 모르는 자가 화가 나면 어떻게 될까요? 무차별적으로 남을 해치는 테러를 하거나 제 화에 못 이겨 자폭하겠지요. 해는 질투로 더욱 타올라 사람들을 열병으로 죽여버립니다. 테러입니다! 인간도 가만히 있을 리 없지요. 나 살고 봐야 하니 해-부인을 죽일 궁리에 들어갈 수밖에요. 결국 뱀이 두 해 중 하나를 죽입니다. 왜 뱀일까요? 다른 회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뱀이 양서적(兩棲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표에 딱 붙어사니, 땅이기도 하고 하늘이기도 한 성질을 가졌습니다. 신화는 이런 뱀에 의해서만 태과(太過)한 해의 발광(發光)이 중화된다고 합니다.  

 

③ 해는 상복을 입었다. 아무도 이제 더 이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한 밤이 지속되었다. 왜냐하면 해가 나타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보호신들의 충고에 따라 인간들은 해 부인에게 딸을 데려다주기 위해 영혼의 나라에 원정대를 보냈다. 소녀를 몽둥이로 후려쳐야만 했다. 소녀가 쓰러져 죽자 그녀의 시체를 상자 속에 넣고 잠갔다. 돌아가기 전에는 절대 뚜껑을 열어서는 안 되었다.

④ 일곱 명의 남자가 사명을 맡았다. 그들이 서쪽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 소녀가 상자 안에서 부활하여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며 소동을 부렸다. 운반자들은 거절했다. 그녀는 배가 고프다고 하고, 또 목이 마르다고 하더니 숨을 쉴 수 없다고 애원했다. 남자들은 그녀가 이번에는 숨이 막혀 다시 죽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들이 뚜껑을 조금 들어올리자 소녀는 새로 변하여 도망갔다. 


그런데 이때부터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두려움에 빠진 해가 나타나지를 못하는 거지요. 결국 해가 필요했던 인간들은 영혼의 나라에서 해-딸을 구해오자 합니다. 왜 일곱 명의 남자일까요? 여기서 슬쩍 우리는 M454의 주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타는 낮도, 영원히 계속되는 밤도 치우침이 있는 슬픔 상태라면 중간적인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요. 7일 즉 주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7이라는 숫자가 체로키족에게 갖는 의미를 더 연구해야겠지만요, 7에서 1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 즉 숫자를 센다는 것 자체가 주기성의 모색입니다. 

 

소녀는 왜 상자에 갇혀 지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걸까요? 그리고 굳이 그 상자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까요? 그런데 만약 소녀가 상자에 잘 들어가 있다가 다시 해-어머니 곁으로 돌아오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말 그대로 차이 없는 반복입니다. 다시 대지는 낮밤 없이 활활 타오르기만 하겠지요. 그러니 소녀는 중간에 도망을 쳐야했습니다. 새로 변했다지요? 왜 새일까요? 새도 뱀처럼 양서적 동물입니다. 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상의 가장 높은 곳 나무 위에 있어야 하지만 먹고 놀기 위해서는 하늘을 날아야 하지요. 그러니 중간자적입니다. 이편에도 붙고 저편에도 붙는 식으로 떨어진 둘 사이의 거리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죽는다. 만일 전달자들이 금기를 어기지 않았다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해 부인에 대해 말하자면 자신의 딸을 잃은 것이 너무 슬퍼 그녀는 또다시 눈물로 땅 위에 홍수를 이루었다. 수몰될 것이 두려웠던인간들은 해 부인을 즐겁게 하려고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가장 애쁜 소녀들을 그녀 앞에서 춤을 추게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노래와 춤에 주의를 주지 않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북 치는 사람이 리듬을 바꾸라고 명령했다. 깜짝 놀란 해 부인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 광경이 너무 즐거워 웃었다.(『신화학 3』, 418~419쪽) 

 

이렇게 새로 변해준 해-소녀 덕분에 사람들은 죽게 됩니다. 덕분에 죽는다니, 단명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화는 죽음을 ‘덕분’이라 합니다. 이야기를 표면에서만 읽으면 불멸 대신 필멸을 얻으니 비극이지요. 그런데 이 죽음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나고 죽는 방식으로 자연의 거대한 주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어이구, 딸을 두 번이나 잃게 된 해-부인은 울기 시작하네요? 그러자 마른 하늘이 홍수를 일으키고 대지는 물과 불이 공존하는, 생기로운 세계로 바뀝니다. 새로운 주기, 만들어지는 많은 리듬들! 그리고 해-부인은 다양한 북소리를 들으며 웃는 자가 됩니다. 기쁨이지요. 별들의 다툼 신화는 자기밖에 몰랐던 해의 슬픔이 모두와 함께 웃는 기쁨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애도, 농경의 부채감
『신화학』의 신화들은 모두 수렵과 채집의 세계로부터 나왔습니다. 농경과 정주가 본격화된 세계의 신화는 감정을 어떻게 다룰까요? 놀랍게도 농경의 신화도 슬픔을 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학』은 제임스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 1854~1941)의 『황금가지』로부터 영향받았습니다. 프레이저는 인류학자는 아니었고요, 원시 종교의 상상력에 관심을 가지고 동서고금의 다양한 의례를 연구했습니다. 보통 의례를 떠받치는 이야기를 신화라고 하니까요. 프레이저가 분석한 자료들은 기본적으로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전세계에서 수집한 민속자료들이었습니다. 

 

프레이저로부터 받은 레비 스트로스의 영향을 간단히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선 프레이저도 장수했습니다. 호호호. ^^ 두 번째, 프레이저는 고대에서 중세로, 근대로 단선적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문명사를 부정합니다. 고대인은 미개하고 현대인은 진보했다는 사고관 말입니다. 프레이저는 인류의 근원적 사고는 모든 문명의 종교제의를 관통하고 있다고 보았고, 아무리 산업화된 나라라 해도 기본적으로는 원시신화가 품은 상상력과 윤리학을 버리지 못한다고 분석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도 인류사를 진보의 직선적 시간관으로 보지 않지요. 호모 사피엔스라면 우주 만물과 함께 치우침 없이 관계하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레비 스트로스가 명명한 ‘야생의 사고’는 크리스마스 같은 자본주의적 축제 속에서도 힘차게 작동합니다.(레비 스트로스, 강주헌 옮김,「산타클로스의 처형」,『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세 번째는 인류가 만든 모든 이야기는 즉흥적 수다가 아니라 자연학이자 문화학이라는 점입니다. 신화란 문화 조작술입니다. 즉 인간의 여러 문화는 자연의 이치를 인간사에 덧입힌 결과입니다. 그래서 과학이지요. 레비 스트로스와는 달리 프레이저는 직접적으로 신화를 ‘과학’이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레이저는 밀농사의 서유럽과 벼농사의 아시아에서부터 아즈텍의 식인 풍습에 이르기까지 똑같이 발견되는 자연 인식을 언급하며, 결국 인간의 신화는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보입니다. 대표적인 자연 이해가 농경신화에서 기본적으로 발견되는 자연의 주기성입니다. 파종과 추수라고 하는 리듬은 인간이 조작한 것이지만, 그 목적을 위해서 농부들은 별을 읽고 대지의 기온을 분석해야 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M454도 주기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처럼 표면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의 많은 신화들이 실은 우주 하나에 대한 같은 해석에 뿌리를 둔 것임을 밝혔다는 점에서 레비 스트로스는 프레이저를 계승했다 할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프레이저가 분석한 세계가 문자문화였던 반면 레비 스트로스의 세계는 구술문화였다는 점입니다. 프레이저는 농경 정주민의 신화를 중심으로 읽어나가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수렵 채집민의 신화를 중심으로 합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감정’의 문제에서 『황금가지』의 여러 신화에서 독특한 점 하나가 발견됩니다. 그것이 ‘애도’입니다. 

 

『황금가지』의 39장에는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이시스의 신화가 나옵니다. 오시리스 신은 농경의 신인데 형제에게 죽임을 당해 지하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여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가 이것을 슬퍼해 울었답니다. 고대 이집트의 농민들은 오시리스와 이시스 신화에 바탕을 두고 추수감사제를 지냈는데요. 이때 설령 곡식을 수확하고 저장할 때 남모르는 즐거움을 느낀다하더라도 수확자는 슬픔으로 그것을 위장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곡물신의 몸뚱이를 낫으로 잘랐으며 그것도 모자라 곡물신을 방앗간에서 가루로 부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애도를 위한 만가(挽歌)는 추수감사절의 중요한 형식이었습니다.(『황금가지2』(을유문화사), 59쪽) 여기서 프레이저와 레비 스트로스의 네 번째 공통점이 나옵니다. 두 분 모두 슬픔에 주목했어요. 물론 슬픔을 정의하는 방식은 달랐습니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프레이저가 분석하는 농경 신화의 애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집트는 나일강 주변에서 발흥한 문명입니다. 고대 문명의 원류 중 하나지요. 농경이 일찍부터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주문화와 안정적으로 결합되어 기원전 3200년부터 국가가 건설되었습니다. 고대 나일강 유역의 사람들이 자기 수확을 애도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차적으로는 그들이 죽은 곡식단을 자신과 무관한 대상으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슬퍼한다는 것,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 그것도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나에 의해 벌어졌다는 것은, 이것은 대지로부터의 수확에 대해 심한 부채감을 느끼고 있음을 뜻합니다.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질렀다는 미안함인 것입니다.   

 

이는 고대 아테네의 희생제의에서도 확인됩니다. 과거 아테네인들은 곡물정령의 동물화신인 황소를 추수감사절 때 희생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연극을 했다고 합니다. 프레이저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도살꾼 중 한 사람이 도끼로 황소를 쓰러뜨리면 다른 사람이 칼로 목을 딴다. 이때 황소를 쓰러뜨린 도살꾼은 즉시 도끼를 내던지고 도망친다. 황소 목을 딴 자도 똑같이 따라 한다. 한편 황소는 가죽을 벗긴 다음 모든 참석자들이 날고기를 나눠 먹는다. 그리고 나서 황소 가죽 속에 밀짚을 채워 꿰맨 다음 속을 채운 황소를 일으켜 세워 쟁기질하는 모양으로 매놓는다. 이윽고 왕(사람들이 그렇게 일컫는 호칭)의 주재에 따라 누가 황소를 살해했는지 판정하기 위한 재판이 열린다. 이때 물을 나른 처녀들은 도끼와 칼을 간 사람들을 비난한다. 이에 대해 도끼와 칼을 간 사람들은 무기를 도살꾼들에게 건네준 사람을 비난한다. 또한 무기를 도살꾼에게 건네준 사람은 도살꾼을 비난한다. 한편 도살꾼들은 도끼와 칼을 비난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끼와 칼이 유죄를 선고받고 바다에 던져진다.(『황금가지』2권, 263쪽)

 

곡물정령의 동물화신을 죽이고 책임자를 색출하는 연극을 굳이 했다는 것은 마을 전체가 농사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확인하는 일도 됩니다. 결국 도끼와 칼에게 유죄가 선고되지만 그렇다고 벌을 피해가는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농사에는 뭔가 대가가 필요하다는 의식이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즉 농부들은 농사가 자연의 리듬을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데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뭔가가 벌을 받기는 해야 한다는 이 감수성이 곡물 신화의 슬픔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농부들이 죽음을 나쁜 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새롭고 고귀한 생명이 싹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땅에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생명 저 너머의 세계는 씨앗이 돌아오게끔 하는 힘을 지녔지요. 보다 풍요로운 시간은 그곳에서부터 온다는 점에서 ‘곡식 베기’란 다시 내년이 시작됨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애도는 이러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찰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미안하지만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영원히 증식하는 부란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태어났으면 죽어야 하고 죽음으로써 더 큰 생명이 온다는 것, 받은 것은 돌려주어야 하고 준 자는 다시 받게 되어 있다는 것. 순환의 거대한 장에서만 풍요가 가능할 때, 나란 기꺼이 소멸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 통찰을 놓치고 단지 벤 곡식 많음에 히죽거리는 것은 어리석다라고 농경의 신화는 가르쳤습니다.  

 

 

더 나아가 프레이저는 세계의 곡물 어머니에 대해서도 논합니다. 농경이 들어간 지구의 도처에서는 추수 감사 대상인 곡물의 신을 어머니로 표상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의 어머니가 ‘낳는 자’이듯, 자연의 낳는 힘 역시 ‘어머니’라 불러도 됩니다. 인도네시아로 가 볼까요? 인도네시아에서는 벼의 생명을 좌우하는 영혼이 있다고 보아, 마치 사람을 대하듯 경외심을 갖고 벼를 대한다고 합니다. 발생기의 벼는 임신한 여자와 같으므로 놀래키지 않으면서 조산에 대비하지요. 논에서 총을 쏜다거나 경우 없이 큰 소리를 지르며 논다거나 하면 마을 전체가 부정 탓다며 제를 지냈다 합니다.  

 

그러니 벼 이삭이 나올 때는 어떻겠습니까? 마을에 새 아이가 온 듯 경건하게 맞았겠지요. 이러니 추수꾼이 낫으로 벼를 밸 때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스스로 씨앗을 떨어뜨릴 벼를 인간의 편의에 따라 베어야 하고 보니, 재왕절개하는 의사 심정이 되어 괴롭고 미안한 마음으로 추수를 했겠지요. 그래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되도록 손으로 칼날 부분을 가리고 벼가 모르는 사이에 재빨리 모가지를 자름으로써 벼의 영혼이 놀라지 않도록 했습니다. 참으로 깊은 윤리감각입니다. 고통 없이 죽이는 것으로 예를 다한다! 이런 맥락에서 논일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언어를 썼다고도 합니다. 이삭이 창고에 들어갈 때까지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 벼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말이지요. 수마트라의 미낭카바우얼(Minangkabauer) 족은 ‘벼의 어머니’를 찧을 때 절구통에서 찧는 것을 꺼린다고 합니다. 절구통에서 찧으면 쌀 몸뚱이에 상처가 나서 병의 영혼이 도망가버리니까요. 농사가 가을에 이르도록 작물을 경건히 모시고 추수에서는 충분히 애도를 했을 때야만 곡물의 어머니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해했습니다. 

 

프레이저는 이 애도의 기원을 흙을 갈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냅니다. 북서아메리카의 살리시Salish족 인디언과 티네Tinneh족 인디언들은 최초의 딸기나 해당 계절에 처음 나는 구근류를 캐 먹을 때 반드시 그 열매나 식물에게 말을 걸어 호의와 협조를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부족들은 야생과일을 따기 시작할 때 특별한 수확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고요. 연어를 먹는 부족이라면 ‘소케이sockeye’ 연어가 올라올 무렵 그런 의식을 행한다고 합니다. 이 의례를 경건하고도 철저하게 행하지 않으면 딸기나 연어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아메리카 북서부 톰프슨 강 유역 인디언들과 그 밖의 여러 부족들은 자신들의 채집식물이 익어 처음 따기까지 정령을 조심히 위무하면서 생활하고요. 첫 번째 작물을 먹어야 할 때 특히 주저하며 그 부채감을 극복하기 위한 의례를 행했다고 합니다. 프레이저가 소개하는 많은 농경 신화는 첫 수확 즉 살해의 시작과 마지막 수확 즉 새 봄의 기다림 사이에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의 부하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농경 문화에 바탕을 둔 신화의 슬픔에 대해 조금 더 정리해보겠습니다. 추수의 애도 의례에서 슬픔은 다음과 같은 인식을 깔고 있습니다. 첫째는 곡물의 영을 농사꾼의 편의에 따라 마구 죽였다는 탐욕에 대한 미안함입니다. 즉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이치에 대한 이해입니다. 둘째,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유한함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자연 전체가 늘 변화하며 죽음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생명력으로 돌진할 의무를 가졌다는 통찰입니다. 셋째, 죽음과 삶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죽음을 충분히 음미할 때에만 삶이 충실히 되돌아온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니 이 슬픔은 추수꾼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농경의 애도 역시 수렵 문화가 통찰해 낸 주기적 삶, 관계적 삶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글을 나가며 잠깐 기술의 발달사에 대해서도 말씀드려보고 싶습니다. 인류의 기술사는 농경에서부터 산업혁명까지를 단선적 진화 과정으로 봅니다.(제레드 다이아몬드,『총, 균, 쇠』). 하지만 신화가 쟁기질이라든가 낫질을 곡물신에 대한 살해라고 보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생산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농업기술을 계속 발달시킬 수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기원전 8000년경 지금의 이집트 북동부에서 이란 고원까지 이어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농경문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원전 3000년 무렵 소가 쟁기질을 시작한 이래 1830년 바퀴 달린 현대식 쟁기가 개발되기까지 무려 483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왜일까요? 인류는 생산 기술을 발명시키지 않기 위해 애썼을 수도 있습니다. 소위 잉여 생산이 농부의 최대 목표는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산업혁명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애도의 그 무거움을 털고 ‘생산, 생산, 오직 생산만!’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해야 했을 텐데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농경의 신화를 대체할 만한 압도적인 신화가 필요했을 겁니다. 저는 자기애에 빠진 근대 소설이 바로 애도를 쓸어가 버린 주범은 아닐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시월입니다. 추석이 지났고 할로윈이 다가옵니다. 나이 드니 좋습니다. 이토록 생각거리가 풍요로워지니까요. 가볍게 산책을 계속해야겠습니다. 

 

 

글_ 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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