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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레비스트로스와함께하는신화탐구] 먹-텔링(eat-storytelling)의 기원을 찾아서

by 북드라망 2022. 11. 7.

먹-텔링(eat-storytelling)의 기원을 찾아서


먹는 이야기의 뿌리는 어디에?
아침을 먹는 와중에도 점심을 상상하고, 점심을 먹는 와중에도 간식을 고민합니다. 냉장고에 계란이며 두부며 잔뜩인데도 어쩐지 먹을 것이 없는 느낌적인 느낌입니다. 어쩌면 저는 하루의 대부분을 먹는 생각으로 채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만 그렇지는 않나 봐요. 빨래 개며 티비나 좀 볼까 하고 리모콘을 켰더니 온통 먹는 이야기입니다. 깊은 시골에 들어가서 먹는 이야기(《나는 자연인이다》, 《삼시 세끼》), 회사원이 먹는 이야기(《고독한 미식가》), 먹을 것 놓고 게임하는 이야기(《지구오락실》) 등. 그런데 생각해보니, 요즘만이 아닙니다. 「헨젤과 그레텔」도 숲에서 간식 먹는 이야기고요, 백설공주도 사과 먹는 이야기입니다(그러고보니 모두 ‘간식’이네요? @.@!). 문득 먹는 이야기가 주는 원초적 즐거움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자신의 신화학을 먹는 이야기의 틀에서 분석합니다. 인류의 최대 고민은 먹거리를 어떻게 얻고(불의 기원과 재배 식물의 기원), 누가 요리하고(소녀의 교육), 어떻게 조리할 것인가(날것과 익힌 것)였다는 말이지요. 레비 스트로스가 보기에 이는 당연했습니다. 신화란 인간이 자연을 읽고서 그것을 다시 공동체의 생활 양식으로 변용해내는 틀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화란 야생의 과학입니다. 먹음은 일차적으로는 자연물을 인간의 몸에 맞도록 분해하고 재가공해서 다른 형태로 창조하는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이차적으로는 그 과정에 함께 하는 인간과 인간의 사이를 중재하는 사회적 관계의 틀을 요구하고요.

결국 먹음이란, 한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과 자기를 매개하면서 또한 다른 인간과 자기의 관계를 규정하는 장치가 됩니다. 이는 각기 다른 문화권마다 독특한 음식 금기가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자연의 모든 종(種)이 배가 고파서, 살기 위해서, 먹는다지만 적어도 신화는 그리고 우리의 식사 관습은 먹음을 관계의 철학을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날것과 태운 것의 기호학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신화가 먹음의 기호를 사용한 문화제작술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특히 주목한 것은 조리법입니다. 『신화학』1권의 부제목은 ‘날것과 익힌 것’이고, 2권은 ‘꿀에서 재로’입니다. 3권은 ‘식사예절의 기원’이고 4권은 ‘벌거벗은 인간’(아직 번역되지 않았습니다)입니다. 4권은 제가 읽지 못해 알 수 없지만 1권부터 2권까지 놓고 보면 신화의 내용 범주는 전체적으로 날것에서 재까지 즉 자연에서 들여와 다시 문화 바깥으로 내보내는 요리의 형태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레비 스트로스는 3권의 마지막에 집중적으로 조리의 문화사를 설명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먹음의 신화학을 다음의 스펙트럼에서 정리합니다. 일단, 재료의 성질은 논외로 합니다.

날것 익힌 것 - 구운 것 태운 것 썩힌 것
삶은 것
튀긴 것

각각의 조리법은 자연물을 문화의 영역으로 변용시킵니다. 만약 특정 부족이 날것 먹기를 즐긴다면 그 공동체는 자연의 영역에 스스로를 더욱 위치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발하는 문제의 집합체를 ‘숲’으로 개념화한다고 할 때 날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다종다기(多種多岐)한 문제 속으로 자신을 더욱 들이밀려고 애쓰며, 집단의 정체성을 보다 유연하게 가져 가려고 애쓴다고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주목하는 것은 익힘입니다. 익힘은 무엇보다 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의 문화력을 상징합니다. 취사에서 단순히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음식문화는 모두 재료를 어떠어떠하게 익히도록 했지요. 익힘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운 것, 삶은 것, 튀긴 것! 이 세 구분을 나누는 것은 조리에 들어간 매개의 성질입니다. 구운 것은 불에 직접 익힙니다. 돌판이나 꼬챙이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모두 자연에서 직접 취할 수 있는 도구들입니다. 반면 삶은 것은 물이라는 매개, 그리고 그 물을 가두는 그릇이라는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튀긴 것 역시 그릇이 필요하지만 물 매개가 아니라 기름 매개이기 때문에 다시 성질이 달라집니다.

구운 것은 태움의 정도에 따라 요리를 문화의 내부에 위치시키기도 하고 외부에 위치시키기도 합니다. 고기의 바깥족은 그을어 타고 속에는 피가 흐를 수도 있고요, 불에 가까운 부분은 타고 윗부분은 설익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구움은 탄 것을 쉽게 만들어버리기 날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식사라고 하는 양식이 문화 바깥에 가 닿게 합니다. 그 바깥이란 단순화해서 말하면 죽음이기도 합니다. 태운 고기는 재이고 그것은 다른 동물에게도 먹이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화학적으로 말해도 굽기는 생물을 구성했던 모든 요소가 다 분해되어 근본적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되기에 날것보다도 훨씬 원초적 상태를 낳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기는 다릅니다. 삶기는 날것의 자연물을 불로 변형한 다음 그 모든 성분들을 물에 녹여 가둡니다. 국이나 스튜 형태로 만들어서 고기 건더기와 국물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굽기에서보다 재료가 맛을 동등하게 품을 수 있게 합니다. 어떤 문화가 특히 삶기의 방식을 좋아한다면 이는 구성원들과의 동등한 관계를 중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동등성이 ‘그릇’이라는 확실한 매개를 통해 범위를 갖게 됩니다. 그릇은 오목하지요. 울타리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축제 때 삶는 요리를 한다면 그 공동체는 자기들끼리의 결속을 다지는 의례를 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때에는 이방인이 참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북아메리카 대호수 지역에 사는 폭스족은 의례용 음식을 끓일 때 아무것도 침투하지 말아야 한다며 매우 조심하고, 음식을 먹을 때 떨어뜨리거나 남기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한다고 합니다(『신화학3』, 706쪽). 남부 브라질의 켕강족은 삶은 고기를 과부나 홀아비 또는 적을 암살한 사람에게 못먹게 합니다(『신화학3』, 702쪽). 과부나 홀아비는 가족의 끈에서 떨어져 나갔으니 문화적 범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을 암살했다면 이 공동체 바깥 공동체와 접촉했으니 공동체의 경계 바깥으로 나가버렸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밖에도 아메리카의 몇몇 부족들은 굽기를 남성의 일에 삶기를 여성의 일에 할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성의 사냥은 숲에서 여성의 요리는 마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굽기는 반대가 되지요. 냄새도 풍기고 태움으로써 문화의 외연 자체를 마구 열어버리기 때문에 축제의 메인 요리가 구워지고 있다면 그 장(場)은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 위계가 강조되는 마당이 되며 외부인들도 이 범주 속으로 적극 초대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굽기의 최고 형식은 훈제입니다. 훈제는 불과 고기 사이에 아무 것도 개입되지 않는, 거의 무매개적 조리법인데요. 공기층의 개입이 최대화되기에 막대나 꼬치 혹은 불판 등의 중재법이 들어가서 매개도를 만들게 됩니다. 삶는 도구인 솥과 항아리는 매우 조심해서 보존하고 닦지만 여러번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훈제의 경우 굽기의 도구는 즉각 파괴되어야 하는데요. 그렇지 않으면 동물의 복수가 예고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이 열려 있고, 매개의 범위가 크기 때문에 역으로 동물들의 인간 조리의 장으로 인간들이 소환될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굽는 것은 금방 썩는 것을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파괴나 손실이 뒤따라 낭비적입니다. 반면 삶는 것은 절대로 요소들을 보존하지요. 그래서 굽는 것은 귀족적이며 삶는 것은 서민적입니다. 때문에 어떤 식사 준비가 굽느냐 삶느냐에 따라 집단의 계층성도 드러납니다(『신화학3』, 704쪽).

조리법 하나로 동등성과 폐쇄성, 위계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형식 장치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사냥에 나간 남자들이 음식물을 삶아야 할 때도 있겠고요. 체코인들은 삶은 음식을 남성의 음식으로 간주한다는데요, 레비 스트로스는 이 이유는 이웃인 슬로바키아나 폴란드 사회보다 체코 사회가 더 민주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 스트로스가 민주화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지요. 그가 보기에 민주화란 일인 일표로 대표되는 대의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차이를 전면적으로 긍정하며 나아가는 정치체제입니다. 그래서 체코에서는 더 많은 것을 삶아내는 일을 남성이라는 젠더가 대표하는 문화적 기호로 표현했다는 것이지요. 요점은 인간의 조리란 여러 관계성의 표현장치라는 점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지역에서 튀긴 것의 축이 잘 보이지 않기에 일단 『신화학3』에서는 더 분석하지 않습니다(그런데 제가 찾아본 바에 따르면, 인류가 튀김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바삭한 질감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생물 중 바삭한 것으로는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훗! 곤충이죠? 그러니까 인류는 단백질 보충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곤충도 먹을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자신을 훈육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EBS 다큐프라임《요리의 과학》(2020)). 이 밖에도 레비 스트로스는 태운 것과의 관계에서 날것을 중재하는 구움은 분석하지만, 썩힌 것도 따로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지점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생각을 적극 활용해볼 수는 있지요. 썩힌 것 즉 발효된 것은 불을 매개로 하지 않고 또 곰팡이 같은 기타 자연물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는다는 점에서 문화적 가공술의 끝판왕이면서 문화 바깥과의 최고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요?

레비 스트로스의 관찰에 따르면 대평원 인디언들은 이런 조리법의 차이를 적극 활용한다고 합니다. 몇몇 부족들은 오랫동안 익히고, 다른 부족들은 잠시 익힙니다. 삶기의 시간 차가 이미 자연과의 관계 공동체 내적 관계의 관계성을 만들어내니까요. 대부분의 부족들은 고기를 구워야 하는가 또는 삶아야 하는가에 따라 익히는 시간을 불균등하게 하려고 한답니다. 아씨니보인족은 삶은 고기보다 구운 고기를 선호하지만 요리가 어떤 종류이든 약간 익힌 것을 선호한다고 해요. 카미나족은 과도하게 끓인 음식을 먹는데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 2시까지 불 위에 고기를 올려두고 끓인 후 낡이 밝을 때까지 놓아두었다가 먹는다는데요, 여기에는 끓임에 더해 ‘식힘’의 차원까지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항문은 오만하다
자연과 문화의 구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또한 그것을 먹고 싸는 과정에서 부단히 조정됩니다. 이때 주의할 것은 이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내가 ‘인간’이 되는 것이지 ‘인간이기에 이런 문화를 만들었다’가 아닙니다. 야생의 신화는 이런 문화적 장치의 출현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 인간의 형태로 정체성을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을 잘 알 수 있는 예가 M524. 톨리팡족의 신화: 소화의 기원입니다.

M524. 톨리팡족의 신화:소화의 기원
옛날에 인간들과 동물들은 항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입으로 변을 보았다. 항문 푸이이토는 천천히 동료들과 거닐다가 그들의 얼굴에 방귀를 뀌고는 달아났다. 화가 난 동료들은 서로 협력했다. 그들이 자는 척하고 있자 푸이이토가 그들 중 한 명에게로 다가와서는 평소에 하던 행동을 준비할 그때 동물들은 그를 사냥하여 잡아서는 썰어 토막을 냈다.

각 동물들은 자신의 몫을 받았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각 동물들의 구멍의 크기에 따라 크고 작은 몫(조각)을 받았다. 이것이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들이 하나의 항문을 갖고 있는 이유이다. 항문이 없다면 이 창조물들은 항상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입으로 변을 보아야만 했을 것이다.(『신화학3』, 689~690쪽)


항문이 이름(푸이이토)을 갖고 있다는 것도 놀랍고, 천천히 동료들과 산보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보통 산책이라고 하면 두 사람이 걸어가는 풍경이 떠오르니까요. 그런데 역시 신화입니다. 항문이 함께 걷는 대상은 항문은 없는 인간일 수도 있고, 새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도 있습니다. M524는 산책은 여러 동물종들이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M524를 통해 신화의 신체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신화의 신체들은 부분들의 복합체입니다. 인간 자체, 개구리 자체, 그런 개체적인 구분이 선험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몸체는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분해되거나 합체됩니다. 때문에 항문이 아예 없는 인간도 가능하고, 누군가의 항문을 찢고 나누어 떼다 붙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조건이라면 ‘하나의 의식’(칸트) 같은 것을 정하기란 불가능할 테지요.

톨리팡족은 왜 소화의 기원에 대해 이해하려 했을까요? 항문이 있고 없고가 갖는 의미적 차이란 무엇일까요? 항문이 없으면 들어간 음식이 곧바로 밖으로 배출됩니다. 혹은 입으로 먹고 입으로 싸느라 한정도 없고 경계도 없이 엉망진창인 형태로 있어야 합니다. 톨리팡족은 항문에게서 신체가 무엇을 가둘 수 있게 하고, 가둠으로써 그 안에서 형질변화를 일으키게 한다는 의미를 읽습니다. 즉 항문은 뚫린 신체에 형식을 만드는 장치 즉 문화적 기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톨리팡족이 항문의 성질을 교만하다고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항문은 경우 없이 막 방귀를 뀌어대며 동료를 모욕했고, 그래서 벌 받습니다. 항문 즉 열린 신체를 닫는 것, 오목한 것, 문화적으로 자타를 구분하는 것은 오만하다는 것이지요. 어떤 문화를 그 자체로 가치있다고 보는 태도가 여기서 경계되는 것입니다. 항문은 때에 맞게 열리고 닫힐 줄 알아야 하며, 늘 그 폐쇄적 도도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항문이 어떤 벌을 받는지 볼까요? 모두에게 딱 맞는 항문으로의 변용입니다. 여기서도 선험적 선악은 없다고 할 수 있고요. 각각의 동물이 저마다의 항문을 갖고 있다고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형식으로 자연과 자기들 사이의 관계 중재법이 있다는 뜻입니다. 문화란 각각의 방식으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M524는 상대주의도 넘어갑니다. ‘각자 다른 항문을 알아서 잘 쓰자!’ 라는 결론으로 나가지 않으니까요. 이 모든 항문이 원래는 하나였음이 끝까지 강조되니까요. 우리는 똑같은 필요를 지녔다는 점에서 동등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먹는 이야기가 항문 이야기와 직결된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항문의 신화는 여러 가지로 변주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항문 이야기의 변형이 달과 해의 결혼에 출현한 개구리의 씹기라고 봅니다. 별 가문의 일원이 될 시험에서 인간의 아내는 창자 고기를 질긴질근 잘 씹었던 반면 수상생물인 개구리는 침이나 오줌을 지립니다. 개구리의 뚫린 구멍은 닫힐 줄 모르고 들어간 모든 것을 경우 없이 쏟아냅니다. M524가 항문의 유무로 신체의 개폐를 설명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개구리 아내는 이빨의 유무로 신체의 개폐를 설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와 관련해서 다양한 민족지적 상식을 예로 듭니다. 남부 베네수엘라의 사네마족(Sanema)은 지하의 난쟁이 주민들을 오테이티브(oneítib)라고 부른다는데요, 이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말하고 또 먹는답니다. 이들은 내장과 항문이 없으니까요. 오테이티브들은 늘상 배고프며 날고기와 젊은 여성들을 잡아먹는데 특히 결혼하기 싫어 자신의 첫 월경을 숨기려는 여성들을 먹어치운다고 합니다. 당연하지요. 월경을 숨긴다는 것은 결혼을 거부한다는 것이고, 가족 이루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꿀에 미친 소녀들처럼 자기애에 빠져 있다는 뜻이니, 오테이티브의 먹이는 문화를 부정하는 여인인 것입니다. 문화를 부정하는 여인들은 항문이 없는 즉 문화를 구성할 능력이 없는 부족과 관계하기에 그들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먹는 이야기의 뿌리를 조금 추적해보았습니다. 약간의 탐구였음에도 불구하고 먹음을 둘러싼 엄청난 도덕적 압박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신화는 하나의 부족이 자연과 인간을 부단히 읽어낸 결과였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먹텔링의 핵심 화소인 과연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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