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되기의 어려움
⟪고독한 미식가⟫ (☞링크) 2012년부터 시작된 시리즈는 2022년 10월, 시즌 10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질리지도 않고, 다시 한번 가을’이라는 광고문구가 보입니다. 평범한 도시 샐러리맨이 도시 여기저기 혹은 이 도시 저 도시로 외근하다가 중간에 딱 시간 맞춰 먹는 한 끼의 식사! 오지상(미식가 아저씨)은 도심 뒷골목의 오래된 튀김집을 예배하듯 들어가, 음식의 정갈한 태와 맛의 다채로운 조화를 천천히 음미하지요. ⟪고독한 미식가⟫는 나날의 이 일상을 지탱하는 ‘질릴 수 없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밥입니다.
저는 이 고독한 아저씨의 혼밥을 좋아했습니다. 먹는 이야기가 주는 근원적 쾌락(요리의 색, 향기, 맛, 소리!)에 흠뻑 빠져 몇 시간이고 아저씨 식사만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알게 되었어요, 아저씨도 혼자 드시고 저도 혼자 시청하고 있다는 것을요. 해서 먹기보다는 사서 먹고, 나눠먹기보다는 홀로 먹는 우리의 일상은 닮아 있었습니다. 혼자 식당에 가기가 부끄러웠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미식과 고독이 어울리는 컨셉이 된 지 어언 10년, 잠깐 혼밥을 멈추고 인류 최초의 식탁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혼밥하는 인류의 출현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과 함께
각자도생의 세상에서는 혼밥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생인류는 혼자 밥 먹는 법 없는 상태로 진화의 걸음을 뗐지요. 인류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자연의 종 중에서 식탁을 차리는 것은 오직 인간뿐임을 지적합니다. 밥을 먹는 사이를 규정하는 일은 공동체를 꾸리려는 자에게 최고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생의 사고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관점을 차례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야생의 사고가 바라보는 정신과 신체, 둘째는 토테미즘으로 구성되는 문화제작술입니다. 문자 문화를 거절했던 야생의 사람들은 우주자연에 법칙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법칙을 주재하는 자들을 ‘신’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원시의 신은 경배대상이 아니라 만물작용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때로 ‘영’이라고 하고 ‘조상’이라고도 불리지만 ‘사람의 영혼’이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처럼 인간적 표상의 대명사는 아닙니다. 남아메리카의 오나(Ona)족이나 야간(Yahgan)족은 신이 ‘법’을 준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철저히 자연의 운행에 기반한 사회생활의 규약이었고요, 그런 까닭에 신이란 ‘죽은 자들의 세계’ 즉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출발하고 모든 죽은 것들이 되돌아가는 그 세계의 힘들 전체를 의미했습니다. 사회의 바깥, 문화의 바깥이라는 점에서, 신은 근원적 타자였던 것이죠(피에르 클라스트르, 변지현·이종영 옮김,『폭력의 고고학』(울력), 81쪽 참고). 신은 개체적이고 주관적 개념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객관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생의 인디언들은 신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태양, 바람, 밤, 무엇보다 동식물들을 통해서 압니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은 이런 힘들이 직접 드러나는 세계에서 무한히 작고 무능력합니다. “영양을 보시오. 영양은 달리기만으로도 인간보다 뛰어나지 않소. 곰은 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일부분뿐이라면 동물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소.”(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1866~1929),『뱀 의식-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 구역의 이미지들』, 112쪽) 이미지의 인류학자 아비 바르부르크도 지적하지요.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자연을 바라볼 때 그 자체, 혹은 생물학적 분류에 따른 동식물의 개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빠름’, ‘강함’이라고 하는 힘들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통찰한다고요.
이 힘들의 법칙은 실제 물체들의 법칙과는 구별됩니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해 자연에서 사유 속성과 연장(길이를 갖는 것) 속성이 서로 인과를 맺지 않는 것처럼, 야생의 사고에서도 영들의 질서와 물질들의 질서는 각기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다만 관념은 물체 없이는 드러날 수 없고, 물체는 관념 없이는 의미화될 수 없기 때문에 둘은 최적화의 방식으로 연합되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하게 지적하고 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물체적 차원에서 만물은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과 나무가 특정한 영이 들어갈 수 있는 동등한 보기들로서 존재론적으로 같은 위상을 갖게 됩니다. 이런 조건에서 힘들이 정미롭게 발휘되도록, 힘과 물체의 최고 합일이 일어나게 하는 자리를 인식하기가 존재 생존에 필수 과제가 됩니다. 빠름이 들어갈 제일 적당한 자리, 강함이 들어갈 제일 적당한 자리란 다 따로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영들이 잘 맞는 그릇을 찾아들어 간다면 문제없이 자연이 잘 돌아가겠지만, 영과 그 그릇인 물체의 크기가 안 맞게 되면 사고가 납니다. 프레이저가 소개하는 인신왕(人神王)의 살해를 그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왕의 노쇠한 육체는 엄청난 생기의 영력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영은 서둘러 그 육체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신민들은 왕도 살리고 자기들도 살기 위해 서둘러 왕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사람은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서부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는 개인을 복합적 인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인격의 일부는 태어나기 전의 그 개인적 인생 행로를 얘기합니다. 출생 후, 만약 그 개인이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에서 성공을 도모할 경우 실패는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 됩니다. 예를 들면 가나의 오지에 사는 탈렌시족은 개인인 의식적 인격을 온화하고 비경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엄격하고 통제된 신분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만약 공격적이고 경쟁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그의 전인격이 가한 힘 때문이어서 반드시 점을 통해 치유해야만 합니다. 반대로 나아지리아 델타 지역의 이조족은 사회 자체가 유동적이고 경쟁적인데요, 비경쟁적인 사람은 치유 대상이 되지요. 이렇게 사람은 자율적일 수 없고, 전인격적 힘들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와도 영들과도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갑니다(메리 더글러스, 유제분·이훈상 옮김,『순수와 위험』(현대미학사), 137~138쪽).
식구, 서로 죽이지는 않는 사이
영들, 즉 힘들의 자리찾기가 만물의 최고 과제라면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람도 힘 관계를 이해하면서 자기를 그 관계의 장 안으로 밀어넣을 수 있게 변용시켜야 합니다. 그 방법으로 나온 것이 바로 토테미즘이죠. 토테미즘은 특정한 동물을 공동체의 상징으로 갖고 가는 사회 구성의 원시적 양식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연합을 꾸려가면서 자연 전체의 운행 즉 영들의 전체 질서에 딱 맞는 삶의 양식을 동물종을 기호로 삼아 만들어내려고 했습니다(레비 스트로스, 류재화 옮김,『오늘날의 토테미즘』(문학과 지성사) 참고).
왜 동물인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빠름 혹은 느림, 높음 혹은 깊음과 같은 힘들 중 하나를 자기화해야지만 인간도 자연에 맞출 수 있는데, 동물은 그 힘의 상징이니까요. 토테미즘을 쓸 때 사람들은 모든 동물을 다 갖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바나에서도 툰드라에서도 똑같은 전통과 관습을 고집하는 그런 공동체는 없지요. 우리 각자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조건은 시공간에 따라 다 다르니까 지금 여기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 힘 하나를 자연으로부터 얻으면 됩니다. 그래서 곰을 토템으로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곰’으로 지정하고 자신을 그 힘의 자식으로 하는 신화를 사용했습니다. 한반도 사람들도 모두 웅녀의 자손 아닙니까? 이 땅에서도 사람들은 곰의 자식으로 자기를 자리매김함으로써 그 힘의 주체로 스스로를 변용시키려 했습니다. 아비 바르부르크는 토테미즘을 “유기체와 그 유기체에 속하지 않는 대상을 과거 지향적인 방식으로 연결하는 것”(아비 바르부르크, 앞의 책, 164쪽)이라고 정리했는데요, 웅녀 신화로 적용해보면 ‘지금 나에게 없는 곰의 힘을 조상으로 가정해서 연결하기’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본주의는 정말 낯선 사회 시스템입니다. 적도에서나 극지 모두에서, 인간이라면 같은 욕망과 재화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하는 사고를 전제로 작동하니까요. 이것은 사람을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는 관념적 인격으로 추상화한 결과입니다. 야생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발 딛고 있는 자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깊이 간파했습니다.
토테미즘이란 공동체 구성의 논리, 문화 제작술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공동체들이 서로를 차별화하는 논리로도 이어집니다. 곰 부족과 연어 부족을 예로 떠올려 보죠. 각각의 토템 부족들은 저마다 다른 습속과 성정을 가지도록 사회의 법을 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토테미즘은 대단히 자민족중심주의적이게 됩니다. 레비 스트로스를 비롯해 클라스트르나 에두아르도 콘 같은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보고 자기 아닌 자들은 ‘비인간’이라고 보기까지 합니다. 차이의 극대화이지요. 그런데 이 차이화가 차별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다른 부족 즉 저쪽 인간들은 언제나 이쪽 인간을 ‘비인간’이라고 본다는 것을 서로가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식사 문제가 중요해집니다. 자기 공동체 바깥은 ‘비인간’이기에 그것은 먹어도 될 것으로 범주화되거든요. 야생의 부족 중에는 사자(死者)를 먹는 집단도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사자란 인간 공동체 바깥으로 나간 자들인 것입니다. 클라스트르는 베네수엘라 아마존 야노마미(Yanomami)족의 자식행위(endocannivalisme)를 소개했습니다. ‘족내식인(族內食人)’인데요, 야노마미족은 시체를 장작불에 태워 타고 남은 뼛조각을 수습해서 빻아 바나나 죽에 섞어 먹는다고 합니다. 파라과이의 과야키족은 시체를 잘라서 굽기도 하고요. 여기서는 죽은 이의 가족을 제외한 부족 전체가 시체의 살을 핀도(pindo) 종려나무 수액에 곁들여 먹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식(自食)함으로써 이들은 죽은 자를 자기에게 완전히 통합합니다. 부족민이 지닌 특별한 영력을 집착해서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라고 하는 위험한 존재, 생의 타자를 흡수하려고 해서입니다. 그들은 자식행위를 통해 비인간들에게 어떤 장소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지요. 그토록 자기중심적이었던 것입니다(피에르 클라스트르,「제5장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와 의례」,『폭력의 고고학』, 85쪽).
이런 자기중심주의, 타자에 대한 극단적 부정은 20세기 인종학살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야생의 사고는 타자를 먹기 때문이죠. 그것은 배제가 아니라 들여옴이며, 소화 흡수의 방식으로 이적인 타자와 끊임없이 합치를 이루려는 노력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리안 민족주의는 일반적인 자문화/자민족중심주의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레비 스트로스는 이를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 자문화중심주의에서의 먹기가 아니라 뱉기의 방식을 수용한다는 데에 있지요. 즉 자기가 아닌 비인간들을 토해내기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야생의 토테미즘은 문화구성 논리로서 그 안에 들어온 자들은 서로를 먹지 않는다는 규정을 통해 작동합니다. 서로를 먹지 않는 대신 남을, 함께, 먹지요. 그런데 하나의 공동체를 ‘서로를 먹지 않는 사이’로 규정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인간들은 언제든지 서로를 먹을 수 있는 사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자연 상태에서 만인이 늑대이다라고 했던 홉스는 특별히 새로운 말을 했던 것이 아니네요. 토테미즘은 자연발생론이 아닙니다. 서로를 먹을 수도 있는데, 굳이 안 먹기로 하는 사이를 만들어내기 위한 논리이므로 철저한 사회계약론이고, 사회란 계약적이라는 것을 인식한 냉정한 우주론입니다.
외삼촌이 감춘 것(친족의 기본구조)
야생의 토테미즘이 자민족중심적이면서도 홀로코스트와 같은 인종학살 방식으로 나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결혼입니다. 우연적으로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 두 개의 집단이 필연의 차원에서 반드시 서로 상보하도록 야생의 사고는 친족의 기본구조를 족외혼의 방식으로 공식화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가족’은 생물학적이며 심리적으로 이루어지는 본능적 재생산 장치가 아닙니다. 여타의 사회 조직과 대립하는 자기만의 방일 수도 없고요.
레비 스트로스가 설명하는 ‘친족의 기본구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가족은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삼각형과 다릅니다. 야생에는 즉 인류의 근원적 상상력에서는 두 개의 가족 유형이 발견됩니다.
◦R(O : N)=R(Fr : S)
◦R(P : Fr)=R(M : F)
(R=관계, O=외삼촌, N=조카, Fr=형제, S=자매, P=아버지, M=남편, F=아내)
두 개의 친족모델에서 상수는 ‘남자 자식’입니다. 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남자 아들이 조건에 따라 다르게 불립니다. 다짜고짜 아버지, 아들,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무엇’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 표는 기능적인데 각각의 친족모델에서 한쪽이 두드러진다면 등식의 반대쪽도 가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삼촌과 조카가 친밀하다면 그 집단에서는 남자형제와 여자형제가 친밀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이 친밀하다면 그 집단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친밀할 것입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가족 삼각형은 아래(P:Fr)의 규칙을 따르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친족’을 자연발생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나아가 부성과 모성 같은 육친의 감정도 위의 구조에 따라 발생하는 것으로 봅니다. 모든 실재는 선험적 범주를 논리적으로 따른 것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독특한 것은 R(O:N)의 구조이죠. 아버지의 자리가 없습니다. N의 입장에서는 어머니도 ‘남자형제와 친분이 있는 여자형제 즉, 외삼촌의 누이인 S’로서 기능하니까 어머니도 약한 값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누구도 자기 자식과는 애착관계를 가질 수 없겠네요? 생물학적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지는 않지만 그들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은 산업화시대 핵가족 모델을 따르는 우리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친족의 기본구조는 선험적인 틀이지만 자연의 특정한 요구를 받아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R(O:N) 모델의 효과는 무엇일까요? R(O:N)은 족외혼을 가정합니다. 조카가 외삼촌에게 속한다는 것은 두 부족의 결혼이 한 여자를 주고 한 아들을 받는 형태를 갖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각 부족은 자기 내부에서는 절대로 여자를 취하지 않는 근친강간의 금지를 철저히 지키고요.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소개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클라스트르 자신이 인디언인 자신의 친구가 어머니 뵈러 가는 길에 동행한 적이 있었는데요, 아버지 부족과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터라 그들이 어머니의 땅에 들어가는 일은 위험천만이었습니다. 날아오는 화살을 맞아 죽어도 원망할 데가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때 그의 외삼촌이 나섭니다. ‘이 땅에서 내 조카와 그의 친구를 건드리지 마라!’ 이 짧은 에피소드에서도 아내는 남편과 함께 살지 않습니다. 외삼촌은 조카의 보호자로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 더 흥미로운 점은 사실, 이 아들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모자상봉을 기획했다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이 Fr은 외삼촌 가계에 속하기 때문에 근친상간의 금지 규칙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누구와 결혼하면 안되는지를 외가에 물어야 하는 겁니다. R(O:N)에서 이렇게 대립하는 두 부족은 여자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고 자신을 나누어 키울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개인적 차원의 필연적 친밀함을 부족간 전체적 대립의 상보성 확보 열쇠로 씁니다.
왜 이래야 하냐구요? 마가렛 미드(Margaret Meed)라는 인류학자도 같은 궁금함이 들어서 뉴기니의 한 원주민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간단명료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뭐라고, 너는 네 누이와 결혼하고 싶다고? 그러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너는 결혼을 해서 매형이나 처남을 얻고자 한 게 아니었어? 만일 네가 다른 남자의 누이와 결혼하고 또 어떤 다른 남자가 네 누이와 결혼하면 너는 적어도 두 사람의 매형이나 처남이 생기지만, 네가 만일 바로 네 누이와 결혼한다면 아무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진 않겠지? 너는 누구와 사냥을 나가며, 누구와 경작을 한단 말인가? 또한 너는 누구를 방문할 수 있겠나?”(마가렛 미드; 레비 스트로스 외,『가족의 역사』, 43~44쪽 재인용) 나도 다른 집으로 장가가고, 누이도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야 처남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족을 이루는 궁극의 목표는 두 사람의 사랑을 완성하는 데 있지 않고, 좀 다르게 놀 친구를 찾는 데에 있었습니다. 인생은 재미! 물론 이유는 좀 더 심오하지요. 낯선 사람이나 적으로부터 즉 위협적인 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은 결혼을 통해 그들을 동지로 바꾸는 것입니다. 멜라네시아 원주민들은 전쟁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에서만 신부를 데려왔습니다.
인류는 엄청난 창조성으로 거의 모든 유형의 가족 제도를 창안, 실험했습니다. 인도 나야르(Nayar)족은 모계 사회로, 남편들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애인을 두고 아내에게 종종 들르는 은밀한 방문자 역할밖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인도의 아삼 지방과 아프리카에서는 젊은 남녀가 성적으로 자유롭고, 결혼은 자신의 애인이 아니었던 사람과만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제한을 두기도 한답니다. 에스키모족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은 부인을 빌려주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고, 그래서 때로는 친부를 부정해는 일도 빈번하다고요. 온갖 형태의 가족이 온갖 형태의 친밀함을 만듭니다.
공생자 행성에서의 식사
이제 밥을 누구랑 먹는지가 비로소 밝혀졌습니다. 밥은 절대로 혼자 먹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식구 규정은 정해져 있지 않고,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내적 구성의 인적 배치를 따릅니다. R(O::N)에 따르면 아버지랑은 먹지 않습니다. 역시 클라스트르가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야생의 사냥에서는 흥미로운 규칙이 발견됩니다. ‘①내가 잡은 것을 내가 들고 올 수 없다’, ‘② 내가 들고 온 것은 내가 요리할 수 없다.’ ①의 경우가 R(O:N) 모델의 지배를 받는 친족관계입니다. 각기 다른 집단의 두 사냥꾼이 이렇게 잡고 나르며 상보해야 합니다. ②의 경우는 젠더적 상보인데요, 남자들이 들고 온 사냥감은 반드시 아내들이 요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식탁에 누가 앉을지가 확실해지지요. 한 접시의 요리를 만들기 위해 손을 모은 이들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뭐라 할 수 있을까요?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식구’란 이들에게 내 한 끼의 밥을 위해 필연적으로 손잡을 수밖에 없는, 절대 의무에 묶인 타자들을 의미합니다.
도나 해러웨이라는 철학자는 ‘가족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라는 슬로건으로 폐허로 치닫는 우리 시대의 윤리를 모색합니다(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옮김,『트러블과 함께하기』(마농지)). 해러웨이가 말하는 친척은 공존함으로써 서로 유능해지며, 그렇게 생산되는 우리들의 범위를 결정짓는 존재적 그물입니다. 해러웨이가 가족이 아니라 ‘친척’이라는 키워드를 고집하는 이유는 ‘가족’이라는 사회의 한 집단에 대한 상상이 ‘재생산’을 곧바로 환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 또 그 아들, 그런 식으로 핏줄로 줄기차게 이어지는 ‘수목(樹木)형 생물발생적 생식 계보’는 일차적으로는 그 자체로 가족애라는 늪으로 욕망을 고이게 하는 편집증을 낳을 뿐이기에 나쁩니다. 더 확장해서 생각해본다면 ‘인구수’의 증가라고 하는 현재의 이 인류가 만든 엄청난 종적 불균형을 가속화시기키에 옳지 않습니다.
인구수에 대해서는 레비 스트로스도 중요하게 다룹니다. 야생의 사고는 만물이 대칭성을 지향하는 사고를 한다는 가정 아래에서, 그럼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연의 다른 종들과 어울릴까를 고민합니다. 이러한 전체적 사유 안에서 각 문화는 구성원 각자가 서로서로가 자연의 한 종으로서, 부족의 한 사람으로써, 제 할 일을 찾아가도록 사회적 배치를 설계하지요. 곰부족이라면 곰의 해부학에 바탕을 두고 사회적 역할을 곰의 머리, 곰의 발바닥, 곰의 꼬리 등과 같은 역할값으로 배분한 뒤, 구성원을 하나하나 그 역할 안에 집어넣는 식입니다. 이러한 토테미즘적 사고에서 모두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역할값에 중복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자리를 두고 다투게 되면 반드시 상대를 없애고자 하는 증오심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필요한 것은 내 피와 내 욕망, 내가 가진 것을 대물림할 수 있는 후계자가 아니라 친척이라는 이 논의는 공상과학소설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해러웨이는 이 개념을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5~2011)라고 하는 생물학자의 세포공생설로부터 가지고 왔습니다. 마굴리스는 우리가 진화라고 생각하는 모델 안에서 작동하는 가족 재생산 모델을 비판했습니다. 단세포생물의 다세포생물로의 진화를 단세포생물 자체의 전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최초의 지구에는 산소가 부족했습니다. 혐기성 세포로 꽉 차 있던 그 세계에 시아노박테리아라고 하는 광합성을 하는 생물이 출현함으로써 지구의 대기 중에는 산소가 조금씩 차오르게 되었고, 덕분에 드문드문 존재했던 호기성 세포의 역할이 점차 커지게 되었습니다. 산소 농도가 짙어지는 환경 속에서 버틸 방법을 찾지 못했던 초기 단세포 생물은 호기성 세포와 맞서다가 그만 그것을 먹어버리게 되었는데요, 그 과정에서 완전히 다 죽지 않았던 호기성세포가 혐기성세포와 공생하게 되면서 다세포가 되었다고 합니다(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홍욱희 옮김,『마이크로 코스모스』(김영사)).
해러웨이가 드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예는 오징어 안에 기생하는 비브리오피스케리(Vibrio fischeri)라는 박테리아입니다. 비브리오피스케리는 오징어가 복부의 주머니를 이용하여 냉광을 발하는데 필수인 박테리아입니다. 어린 오징어는 초기에 이 박테리아에 잡수셔야만 즉 감염이 되어야만 몸을 발광체로 만들 수가 있어요. 그래야 자기 몸을 밤하늘의 별빛으로 보이게 할 수 있고, 달 밝은 밤의 심연에서 그림자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먹이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몸에 타자를 들여야 살고, 그 타자에 맞추어 자기를 바꾸면서 더욱 더 잘 살게 되고입니다.
도나 해러웨이의 ‘친척 만들기’ 개념은 ‘부모’는 아니면서도 낳고 기르는 자로 우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또한 타인을 먹어야만 내가 산다는 점의 당연함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레비 스트로스가 바라본 족외혼 가족모델의 기본 컨셉과 같지요. 낳고 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이 우주 자연에 존재하는 만물의 소명입니다. 존재는 그 소명을 수행함으로써 우주를 영원히 현존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나의 자기복제일 필요는 없지요. 야생의 사고에서 식탁을 차린다는 것은 ‘우리’라는 것이 임의적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먹음에 의해 존속한다는 부채감을 함께 환기하는 사이가 됨을 의미합니다.
원시의 식탁에 고독한 미식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 자식으로 화목한 그런 가족도 없네요. 혼밥을 할 수밖에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이지만 내가 누구 덕분에 살고 죽는지를 천천히 생각해보는 그런 한 끼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를 먹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배가 고파집니다.
글 _ 오선민(인문공간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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