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하시는 청량리 샘의 영화 이야기, 일명 '청량리발 영화이야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산업과 자본의 도구를 너머,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싶으시다는 청량리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으며,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멋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네 멋대로 해라 | À bout de souffle, Breathless
장 뤽 고다르 감독 | 1960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첫 번째 장편영화이자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를 소개하는 책마다 언급되는 대표작으로 대개 비슷한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혁신적인 영화형식’이라든가 ‘세계를 놀라게 한 영화기법의 교과서’라는 평가는 ‘영화사상 최초의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정성일 평론가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어쩐지 형식과 기법의 한계에 가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당시에는 굉장히 새로운 실험이었으나 지난 60여 년 동안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이미 봐왔던 터라 더 이상 혁신적이거나 놀랄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고다르가 누벨바그의 친구들과 함께 내세운 ‘새로운 영화’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아쉽지만 낡은(?) ‘점프컷’과 ‘핸드헬드’는 버리고 이 영화 <네 멋대로 해라>도 '제로'에서 다시 읽어보자.
두 번의 유럽전쟁(이른바 세계대전) 이후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영화에 대한 주도권도 완전히 미국 할리우드로 넘어가 버리게 된다. 이때 등장한 누벨바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넓게는 유럽영화에 대한 각성의 목소리였다. 영화의 탄생지인 유럽이 불과 50년도 안 되서 할리우드 영화를 따라 하기 바빠진 상황, 젊은 비평가들은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봉건 중세시대에 대한 반성으로 ‘르네상스’가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재건과 부흥의 실마리를 찾고자했던 움직임처럼, 누벨바그 역시 1920년대 ‘러시아 몽타주이론’과 함께 영화 속 카메라 자체의 미학적 의미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통해 영화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찾으려 했다. ‘무엇을 위한 영화’가 아닌 영화는 과연 가능한가? 늘 그렇듯, 좋은 질문은 좋은 답을 낳는다.
그들, 누벨바그는 영화에 대한 비평 활동뿐만 아니라 직접 영화도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이론에 적합한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영화 두 번 보기, 영화로 글쓰기, (직접)영화 만들기. 국내 영화비평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인 정성일 평론가가 직접 찍은 영화 <카페 느와르>(2009)가 관객과의 만남에 성공했는지는 중요치 않을 수 있다. 그건 영화에 대한 정성일의 ‘사랑’의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네 멋대로 해라>에 대한 평가는 고다르의, 아니 어쩌면 누벨바그들의 영화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러브레터인지도 모른다.
고다르의 편지 내용을 보자면, 영화 속에서 공간과 시간을 조작하는 흥미로운 장면 둘이 있는데, 첫 번째는 아파트에서 미셸(장 폴 벨몽도)이 파트리샤와 함께 머무는 장면이다. 미셸의 머릿속에는 파트리샤(진 세버그)와의 잠자리만이 가득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지만, 화면은 며칠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이리저리 편집되어 나눠진다. 두 번째는 자동차에서 미셸이 파트리샤를 태우고 파리를 돌아다니는 장면이다. 왼편에서 미셸은 목소리만 들리고 화면은 파트리샤의 얼굴을 고정해서 잡는다. 역시 차 안의 대화는 계속되지만 파트리샤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거리는 끊임없이 ‘점핑’한다.
소리(대화)는 현재진행형인 시간 속에 있는데, 화면(공간)은 그와 상관없이 편집, 나열되다 보니 머릿속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이건 멀미가 일어나는 상황과 유사하다. 눈(화면)으로 인식하는 화면과 귀(공간감, 균형)가 느끼는 진동이나 움직임이 서로 다르게 뇌로 전달될 때 멀미가 발생한다. 앞의 두 장면은 일부러 시공간의 감각을 깨뜨려 관객의 편안한 몰입을 방해한다.
허나 이 영화에서 앞서 소개한 점프컷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에 총을 맞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어가는 미셸의 뒷모습이다. 피를 흘리며 이리저리 넘어질 듯한 주인공의 모습을 카메라가 함께 흔들리며 따라간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장 폴 벨몽도의 ‘등’연기는 일품이다. 게다가 넘어질 듯 위태로운 두 다리는 관객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그러나 몇몇의 눈부신 장면을 제외하면, 자동차와 여자에 집착하고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미셸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날, 침대 위에서 파트리샤가 윌리엄 포크너의 글 <야생종려나무, The Wild Palms>을 인용하면서 미셸에게 묻는다. 당신은 슬픔(grief)과 무(無, nothing)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냐고 묻는다. 슬픔은 어리석은 것이며, 이것저것 복잡하다면서 미셸은 무(無)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고다르에게 미셸은 어떤 의미일까?
그가 선택한 ‘nothing’은 바로 고다르의 선택이기도 했다. 누벨바그의 대모이자 고다르의 친구인 80대의 아녜스 바르다가 30대의 젊은 아티스트 JR과 함께 만든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에서 그녀가 고다르를 만나러 가는 후반부 장면이 있다. JR과 함께 고다르의 집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바르다는 고다르를 회상한다. “그는 고독한 철학자야. 그는 영화를 창조하고 영화계를 바꿔놨지. 창조자이자 탐구자야. 영화계엔 그런 사람이 필요해. 지금도 좋아하지만 서로 못 봐.”
약속한 시간에 고다르의 집에 도착했으나 문은 잠겨있었다. 대신 바르다에게 보내는 암호만이 유리문에 적혀 있다. ‘카페 두아르네네즈에서. 그리고 <해변에서>’ 해석하면 이렇다. ‘바르다, 당신이 온 걸 알고 있어. 그리고 우린 아직 자크 드미를 기억하고 있지’ 먼저 세상을 떠난 자크 드미는 바르다의 남편이자 고다르의 친구였다. 노년의 친구가 어렵게 기차를 타고 찾아왔으나 고독한 그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새로운 영화이론의 정립과 함께 기존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하며 스스로 영화가 되어야했던 장 뤽 고다르.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 역시 자신만을 위한, 한 편의 영화로 만들고 있는 듯했다. 제작, 각본, 감독, 그리고 관객 고다르. 허나 다르게 말하면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영화적 집착이었을까?
미셸은 차를 훔치고 운전하고 도망 다니며 돈을 훔치거나 받으러 돌아다닐 때도 늘 혼자였다. 경찰이 쏜 총을 맞고 비틀거리다 거리에 쓰러져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눈을 감기듯 철저히 혼자였다. 그러나 그 상황은 관계의 부재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고독에 가까웠다. 미셸의 죽음은 사랑하는 여인의 배신이 그 표면적 원인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다르가 미셸의 고독한 죽음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부패한 기성세대, 알제리 독립전쟁이 드러낸 프랑스 사회의 추악한 이면들, 과거의 고전적 답습으로만 이어지는 영화계와의 결별선언이자 사회적 원인고발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 인터뷰 장면에서 파트리샤가 어느 작가에게 인생의 목표를 묻는 장면이 있다. 그러자 작가는 이렇게 답한다. “불사조가 된 다음에 죽는 겁니다.” 불생불멸의 삶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만 생(生)·사(死)를 반복하는 고다르의 고독한 삶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망설’ 루머를 뚫고 2018년 영화 <이미지의 책>으로 칸 영화제에서 깜짝 등장한 장 뤽 고다르. 스마트폰의 인터뷰 영상화면으로나마 그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글_청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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