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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청년 붓다』지은이 고미숙 선생님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2. 7. 1.

『청년 붓다』지은이 고미숙 선생님 인터뷰

 

 

 

1. 선생님께서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시작으로 고전의 지혜를 지금, 여기에서 사용할 수 있게 변주하고 전파하는 작업들을 그동안 쭉 해오셨습니다. 연암에서 그 다음에 『동의보감』으로 다음 명리학으로 그리고 지금 불경으로 계속 변화해 왔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렇게 공부의 궤적이 계속 이동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고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붓다를 만나고 또 붓다로 고전평론을 하게 되신 건지 궁금합니다.

 

연암에서 동의보감, 동의보감에서 명리학. 사실 그다음에 주역으로 주역 공부를 좀 했기 때문에 주역으로 이제 책을 쓰고 강의를 하려고 했으나 주변에 주역을 너무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가지고 제가 통 크게 양보하고 그다음에 이제 불경을 만나게 된 거고요. 계속 이렇게 이제 공부의 방향 이렇게 변하고 흘러가는 거는 왜 그럴까요? 간단하죠.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살아 있으면 계속 어디론가 가야 되거든요. 삶 자체가 어디론가 가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저는 당연히 고전평론가고 고전평론가는 고전을 읽고 쓰고 말하는 게 일상이에요. 다른 분들이 직장에 와서 일을 하고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하시듯이 저는 고전의 지혜의 밭을 일구는 게 제 직업인 거죠. 그러니까 그걸 계속 일구다 보면 아주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게 되어 있죠. 머무를 수는 없어요.

 

그리고 동양 사상이 유불도(儒佛道) 이렇게 삼교 회통이니까 불경을 만나는 건 너무 당연하죠. 안 만나면 오히려 좀 이상한 거죠 사실은. 그건 요리조리 피했다는 얘기인데 그거 이상하잖아요. 왜 지혜의 바다를 피하겠습니까. 근데 좀 늦긴 늦었어요. 저는 매사가 좀 늦깎이고 뒷북을 치는 스타일이라 남들처럼 앞서 나가지를 못한 채 지금 60대를 맞이했는데, 40대 연암 열하일기로 그 공부가 저의 40대를 이루었다면 50대쯤에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이죠. 2012년에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를 냈고 그 전해에 동의보감을 리라이팅한 책을 내고, 그러니까 50대의 동의보감하고 명리학을 공부하고 감이당 시작하고 여기서 많은 사람들하고 명리 공부와 동의보감공부를 했고요. 몸에 대한 탐구를 하다 보니까 그러면 이제 자연히 마음의 세계가 궁금해지죠.

 

근데 동의보감에도 희노애락애오욕, 칠정이 있긴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도 마음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는데, 마음이 너무 잠재력도 많고 아주 심층적이고 아주 다양한 지층으로 구성이 돼 있으니까 그걸 탐구해야겠다라고 늘 마음에 품고 있었고요. 그런데 딱 시절 인연을 못 만나서 이렇게 간접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정화 스님이 한 달에 한 번씩 한결같이 20년 동안 우리에게 강의를 해주셨잖아요. 제가 출석은 했는데, 반은 듣고 반은 졸고 했어요.^^ 이렇게 간접적으로 듣다가, 내가 직접 공부를 해야겠다. 이런 거는 2017년부터 시작이 된 거죠. 직접 불경을 읽고 탐구를 하니까 간접적으로 듣는 거하고 굉장히 다르더라고요. 정말로. 그래서 아주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 이런 마음이 드는 거죠.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고전평론가니까 당연히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임꺽정, 서유기이런 고전을 읽어요. 읽다가 보면 당연히 의학, 역학이 궁금해지고 그러면 주역을 배우게 되고 그 다음에 이제 불경으로 가게 돼요. 물론 불경을 통해서 다른 것들을 또 배우기도 하겠죠. 그래서 불경에 다다른 건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좀 늦긴 했죠.

 

 

2. 책 제목이 『청년 붓다: 바람과 사자와 연꽃의 노래』인데요. 붓다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청년’이라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책에서 ‘붓다는 청년이고 붓다의 깨달음은 청년기의 산물이다’라고도 하셨는데요, 제목을 이렇게 잡으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일단 제가 불교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불경을 읽었죠. ‘니카야가 붙은 초기경전을 읽고 대승경전인 금강경, 화엄경, 이런, 보통 많이 들어본 그 경전들을 읽었어요. 그런데 대승경전에는 정말 큰 가르침들이 막 충격, 반전 이렇게 다가와서 불교는 진짜 어렵다, 이건 어떻게 뇌구조가 바뀌기 전에는 배우기가 불가능한 거 아닌가 싶게, 그랬어요. 어느 정도 이상은 좁혀지지 않는 거예요. 아직 준비가 안 됐으니까, 나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가르침이야, 이런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런데 초기경전을 읽으면 거기에는 부처님의 생애랑 부처님이 직접 설한 얘기들이 나오고 수많은 인연담이 나와요. 한마디로 스토리의 바다인데 일단 너무 재미있어요. 이야기니까 인물이 나오고 인물들이 일으키는 사건이 나오고 하는데, 이 사건을 보면서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지 따져봤더니 전생의 업이 나오고요. 그런데 그 전생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 앞의 생이 아니더라고요. 엄청 길어요. 무지막지하게 길죠. 이 이전에 억겁의 전생이에요. 그래서 그 이야기 구조에 너무 충격을 받았고. 거기에다 부처님의 생애 자체가 너무 흥미로웠어요.

 

근데 우리는 보통 불교 그러면 부처님의 생애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랄지 금강경아상에 사로잡히지 마라랄지 왜 이런 얘기만 주로 환기를 할까 싶었어요. 아니면 선문답이나요. 부처님의 생애가 먼저 떠올라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물론 부처님의 생애도 대강은 알고 있었죠. 출가하고, 깨달음에 이르고 이런 것들이요. 그리고 열반. 열반 하니까 저는 어렸을 때 부처님이 열반에 이르기 전에 식중독에 걸렸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니 부처님이 왜 이렇게 시시하게 식중독에 걸리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너무 거칠게, 그런 것밖에 모르다가 초기경전에 부처님의 생애가 굉장히 자세히 나오니까 거기서 되게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철학적인 수준이 좀 낮아서 그런지 이야기가 재밌고 감동적이더라고요. 거기에 불교가 뭔지 다 집약이 돼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초기경전에서 받은 충격이 또 하나 있는데, 저는 막연히 부처님은 막연히 연로하다는 느낌, 중년 이후의 중후한 느낌이 있었어요. 절에 가면 대웅전에 있는 부처님 상들도 모두 중년 이후 아닌가요. 청년의 모습으로 있는 불상 보셨어요? 왜 이렇게 중후한 걸까요? 대웅전에 있는 불상들은? 아무튼 그랬는데, 부처님이 스물아홉에 출가하시고 서른다섯에 깨달았다. 이건 누가 쓴 부처님 생애든 공통적인 거예요. 나이가 그 이전에 출가하셨다든지 이런 얘기는 있어도 이후는 아니거든요. 또 서른다섯이면 지금은 뭐 확실하게 청년이죠. 제가 젊었을 때는 30대 넘으면 약간 아줌마 아저씨라고 했으니까, 조금 나이가 들었다 생각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사람의 생애는 기본적으로 100년이라고, 이렇게 잡혀 있기 때문에 30대면 젊은 거예요. 그러니까 새삼 초기경전을 보면서, , 젊은 붓다네. 근데 나는 왜 이렇게 노인을 생각했을까, 이런 부분이 깨졌고. 그다음에 서른다섯 이후에는 여든까지, 45년간 설법을 오로지 한결같은 설법을 하신 거예요. 이것도 갑자기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45년 동안을 교육 활동을 하신 거잖아요, 길 위에서. 이런 생애가 있나요? 보통 처음에 이렇게 가르치다가 유명해지고 명망을 얻고 이러면 그다음에는 좀 지위가 높아지거나 뭐 이러면서 바뀌지 않나요? 우리는. 근데 정말 한결같이 길 위에 계셨다는 거. 마지막 열반에 이를 때도 석 달 동안 여행을 하면서 열반의 죽음을 맞이하는 거죠. 그때도 마지막까지 가르치시거든요. 그 사실이 너무 충격이었어요. 불교를 이렇게 저렇게 접하면서도 왜 이런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일단 이 책은 저 자신을 위한 책이에요. 내가 만난 붓다 그리고 붓다가 저 같은 중생한테 어떤 점이 감동인가, 그 포인트를 제가 새로 잡고 저랑 비슷한 사람들이 있으면 이런 거부터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먼저, 붓다는 청년이다. 그다음에 또 우리가 불교를 배운다고 할 때 나중에 나이 들어서, 정년 이후 은퇴해서 배워야지,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여생을 정리할 때 불교를 좀 본다, 이런 이미지가 있어요. 이것도 터무니없는 거죠. 스물아홉에 출발해서 서른다섯에 깨달음을 이룬 이 가르침은 청년의 사상이잖아요. 이 사상 자체에 엄청난 에너지가 있는 거예요. 근데 왜 우리는 이걸 노쇠할 때 접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아주 잘못된 전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60대가 되어서 불교를 만난다는 건 정말 내 안에 있는 청년 에너지를 꺼내 쓰는 거예요. 그래야 이 사상과 만날 수 있어요.

 

이게 하나 있고, 또 우리 시대 청년들을 보니까 일단 마음이 너무 정처가 없어요. 방향이 없는 거예요. 꿈이 있다고 하면 전부 성공하는 거예요. 나머지는 없어요. 없어. 열심히 살아야 되나? 꼭 살아야 되나? 뭐 삶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게 너무 만연해서... 이런 청년들에게는 최고의 스승이 필요하다. 보통의 멘토로는 안 된다. 그래서 인류 최고의 스승, 청년기에 그런 고뇌를 안고 출가해서 그 에너지로 깨달음에 이르고 45년간을 길 위에서 길을 알려준 이런 스승이 필요하다, 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제목 청년 붓다청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거죠. “붓다가 청년이다하고 우리 시대의 청년들에게는 붓다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 의미요. 그래서 제가 부처님을 21세기 슈가맨이라고 썼어요. 슈가맨이 노래는 다 아는데 가수를 모르는 거 아닌가요. 가수는 잊혀진. 비슷해요. 우리가 불교 그러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런 건 많이 들어봤어요. 그런데 그 가르침을 펼친 분을 잘 몰라요. 그분의 인생도 잘 모르고요. 이제 우리 시대 청년들이 그분을, 그 스승을 찾아서 만나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요. 또 제가 책에도 썼지만, 저희 감이당+남산강학원이 있는 깨봉빌딩의 청년들은 의외로 불경을 좋아해요. 왠지 끌린다는 거. 이게 미스터리인데, 사실 잘 모르는데 끌린다 이게 굉장히 강한 거 아닌가요? 우리가 연애할 때도 왠지 끌려가 제일 힘이 센 거잖아요.

 

 

3. 부제인 ‘바람과 사자와 연꽃의 노래’의 의미도 마저 말씀해 주시죠.

 

붓다의 가르침은 열반이나 해탈 이런 건 불교 용어인데 이걸 그냥 우리가 쓰는 언어로 풀면 모든 존재론적 구속에서 벗어난 대자유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자유는 우리가 다 좋아하죠. 자유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근데 뭐에 구속됐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고요. 뭐 나는 돈이 없어, 집이 없어, 또는 차가 없어. 이런 것도 구속이고, 또 몸이 아프다 그러면 몸이 바로 구속이 되죠. 그리고 기본적으로 생로병사, 태어나면 죽는다. 이 길을 내가 바꿀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게 다 구속이고, 또 만나면 헤어져야 되고. 그러니까 이거는 누구나 갖고 있는 거죠. 만나면 헤어져야 돼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괴로움이야. 그러면 여기에 대응되는 게 헤어져야 되는데 못 헤어지는 사람. 그것도 보통 괴로움이 아니잖아요. 그것도 꽁꽁 묶여 있는 거죠. 그리고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면 얻은 다음에 잃거나 얻은 다음엔 더 얻고 싶은데 절대 안 채워지는 거. 이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죠. 동등해요. “내가 원하는 만큼 얻었어이런 사람은 세상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아주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어떤 괴로움, 구속. 여기에서 벗어난다, 이런 존재론적 그물망에서 벗어난다, 이게 대자유라고 말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바람, 사자, 연꽃은 그 대자유에 이르는 길이에요.

 

첫번째 바람이 된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된다. 그물은 관습의 그물 또 자의식의 그물 또 인연의 그물. 그물투성이죠, 사실. 또 내가 많이 만들어요. 없으면 막 만들어서 그물에서 허우적거려 버둥거리고. 그래서 그런 그물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최고로 멋진 비유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잖아요.

 

그다음에 두번째. 생로병사를 겪고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이런 것들을 우리가 컨트롤을 못하니까 항상 두려움을 안고 있어요. 누구나 다 두려움을 안고 있어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고 그래도 확신에 차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내일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가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라고 해도 내일 게임에서 내가 골을 넣을 걸 확신할 수 없죠. 이런 것들이 주는 두려움. 잃어버릴까 봐, 내가 소멸될까봐, 또는 내가 사랑한 사람이 또 사라질까봐 뭐 이런 두려움. 그 두려움을 벗어나는 것을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그러니까 아마 당시 인도에서는 사자가 가장 용맹스러워서 어떤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그런 존재로 여긴 거겠죠.

 

다음으로 연꽃은 그 청정함인데요. 연꽃은 진흙에서 꼭 자란다는 거죠. 근데 진흙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 그게 아주 아이러니하면서도 정말 신기한 일이잖아요. 우리는 다 태어날 때 욕망의 진흙탕에서 태어나죠.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진흙. 거기에서 늘 허우적거리잖아요. 근데 그 진흙탕은 늪처럼 막 헤어나려고 할수록 더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거죠. 그런데 또 그것이 아니면 연꽃이 피질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수렁에 빠뜨리기도 하는데 거기서 청정한 연꽃을 피워내기도 하는 그 바탕이라는 거죠. 이 욕망의 진흙 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내가 수렁에 잠기냐 아니면 연꽃을 피워내느냐. 자기 욕망을 부정하고 갖다 버리고 없애 버리고 이러면 수렁도 없겠지만 연꽃도 피어날 수가 없어요. 그것을 아주 소중한 자양분으로 써야 해요. 그러려면 여기에 어떤 양분이 있는지 잘 관찰을 하고 이 욕망이 갖고 있는 속성 그리고 어떤 영양가가 있는지 뭐 이런 거를 잘 알아서 연꽃을 피워내는 거죠. 그래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이 세 가지가 붓다가 성도, 깨달음에 이른 지 가장 얼마 안 된 그 청년기에, 붓다가 돼서 길 위를 걸을 때 했던 그 설법이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구절이라 이것을 부제목으로 쓰게 됐어요.

 

 

4. 이 책에서 선생님께서 붓다의 생애 중에서 주목할 만한 순간들을 클로즈업하시면서 불교의 핵심 사상을 재미있게 풀어주고 계신데요. 근데 우리는 보통 붓다의 생애를 대충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별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또 그에 비해 불교의 사상은 좀 뭔가 어렵고 심오한 게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우리가 붓다의 생애를 디테일하게 알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러니까 일단 뭐 아는 것 같은데 실제로 아는 건 없는 거죠. 하긴 대부분의 고전이 그렇긴 하죠. 우리가 공자님도 잘 아는 건 아니잖아요. 근데 공자님이나 부처님이나 노자나 소크라테스나 예수님이나 이런 분들은 진리의 궁극을 추구해서 그 존재가 일치된 분들이잖아요. 그분들의 가르침이나 사상은 공기하고 물 같은 거예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계속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공기와 물에 대해서 우리가 별로 관심이 없지만, 이것이 없이는 살 수 없잖아요. 그런 사실은 알고 있다가 어떤 계기에 의해서 아, 살아 있다는 게 정말 신기하구나, 이 공기가 너무 감사하구나, 이런 때가 있죠. 우리가 코로나 때문에 정말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대단한 거구나를 알게 되었듯이요. 그러니까 잘 모르고 관심 없고 이거 자체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거예요.

 

근데 어떤 계기에 의해서 마주치게 됐을 때, 그러면 뭐 금강경이나 선문답이나 또 화엄경을 통해서 접속하는 경우도 있을 거고, 티베트불교를 통해서 마주칠 수도 있고, 어떤 스님을 통해서 갈 수도 있고.... 수많은 길이 있는 거죠. 있는데 저는 부처님의 생애, 그러니까 불교의 핵심은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그러니까 신도 신의 사자도 아니니까 갑작스럽게 어떤 영감을 받거나 기적이나 이적에 의해서 뭐가 펼쳐진 게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앎으로 이걸 찬찬히 밟아가서 완전한 자유에 이르렀다는 거, 이게 불교의 핵심이거든요. 그것이 다른 종교나 사상과 완전히 다른 지점이에요. 사람의 몸으로, 사람의 마음, 사람의 지성, 이 힘으로 완전한 자유에 이르렀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당연히 어떻게 살아서 어떤 코스를 밟았는가가 궁금하지 않나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 그 계시 자체가 중요한 거잖아요. 그런데 불교는 그게 아니죠. 글쎄요. 저는 그래서 그 사실이, 그러니까 어떤 코스를 밟아 간 거지? 어떻게 깨달음에 이르지? 이것이 일단 궁금했고, 처음에 경전을 읽을 때도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부분이 눈에 훨씬 더 많이 들어왔던 것 같아요.

 

부처님 생애를 보면서 너무 놀라운 게 디테일이 살아 있는 거였어요. 우리 생각에는 막 팍팍 점프를 해가지고 어느 날 깨닫고 어느 날 신통한 일이 막 일어나고 이럴 것 같은데, 너무너무 정교하게 디테일이 살아 있어요. 거기에 굉장히 놀랐고 진짜 감동을 받았어요. 이게 인간의 길이구나, 정말 인간이었구나. 솔직히 안 믿었죠. 사람으로 깨달았다고 해도 설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신이거나 신의 아바타거나 뭐 이런 거겠지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불교를 믿는다면 부처님을 다 신으로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절대 신이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신이라고 하면 다른 종교랑 차이가 없어요. 사람의 몸, 사람의 마음, 사람의 인지력,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자기의 속박을 다 풀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 충만하다. 그런 게 붓다의 생애에는 담겨 있어요. 그런데 그걸 부정하고 싶은 거죠. 왜 그럴까요? 수행하기 싫으니까, 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냥 누가 알아서 다 풀어줬으면 좋겠는 거죠. 사실 그런 마음이 담겨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기대는 마음 그걸 해체하는 거예요. 그 기대는 마음이 계속 구속을 만들어 낸다. 나를 어디에 계속 이제 의존하게 한다. 그럼 의존하는 그 순간부터 온갖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것들이 개입을 하기 시작해요. 행위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 여기에서 모든 사실로부터 해방이 있다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믿기 어려운 거죠. 설마 내가 그럴 리가 있어, 내 생각과 마음과 말 이런 게 그렇게 대단한 힘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지금도 있는 거죠, 사실은.

 

이것이 붓다 가르침의 아주 특별한 지점이고, 그럼 일단 이걸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그렇게 하려 어떤 과정을 밟았는가. 신화적인 내용도 많이 들어가는데 거기에 담겨 있는 인간적 윤리적 의미는 뭘까. 이걸 살펴봐야죠.

 

우선 전생담이 너무너무 길게 나오는데, 그건 뭐 유적이나 이런 걸로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그럼 이 전생담에 담겨 있는 의미가 뭘까. 두 가지구나, 보시하는 마음하고 진리에 대한 염원 이게 있으면 붓다가 된다는 거네. 이런 식으로 보면 되게 쉬워지잖아요. 실천은 어렵지만 일단 간단하죠. 끝없이 보시하고 그 다음에 내가 진리를 염원한다. 그런데 왜 진리를 깨달아야 하느냐면 나를 포함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이런 마음을 키워 가는 거다. 그냥 내가 이렇게 엉성하게 살다가 갑자기 깨닫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그런 마음을 매일매일 밭을 갈듯이 갈고닦아야 한다는 이런 생각을 못 하잖아요. 보통 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하루에 감정 처리를 하지 않나요? 근데 그거 자체가 사실은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근데 부처님은 딱 그런 마음을 계속해서 갈고 닦고 계발을 해 나가면 그 깨달음에 이르는 인연이 온다고 하시죠. 왠지 맞는 말 같지 않나요? 우리는 그냥 억지로 참으면서 착한 일을 해야 돼, 누구를 사랑해야 돼, 이런 말을 해도 내가 정말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또는 나와 모든 사람들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그런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라는, 이런 생각을 안 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제가 저한테 쇼크를 받았죠. 내가 조금은 착한 줄 알았는데 너무 안 착한 거예요. 선함이라는 게 없으면 진리의 빛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근데 선하다는 게 딴 게 아니고 마음을 긍정적이고 자율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일구는 거 마음을 계발해 내는 거죠. 그러면 잠재력이 계속 무한하게 뻗어나오는데, 이거는 그냥 적당한 수준에 딱 이렇게 묶어놓고 그냥 이 상태로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겠어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이 순간 깨달음에 이르는 방향으로 내가 마음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거예요. 오늘 이 순간에 그쪽으로 방향을 둘 수 있느냐. 근데 그건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요. 돈이 드는 일도 아니고 힘이 드는 일도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안 하죠. 이거를 알게 됐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생애를 하나하나 따라가게 되면 나중에 깨달으면 막 휘황찬란한, 뒤에 후광이 비치는 이런 붓다가 되고 안 되고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삶의 방향, 마음의 방향,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기준 이런 것들이 굉장히 충만하게, 그날 그날 충만하게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면 사람이 이 삶의 허무를 이기기가 참 어려울 것 같아요. 지금 청년들도 그 허무감에 빠져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노동과 쾌락에 올인할 때만 막 살아 있다고 느끼고 나머지는 그냥 너무 공허한 거예요, 간략히 말하면. 근데 이 공허함은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뭐냐면 깨달음이나 구도 혹은 지혜를 향한 마음이나 내가 온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이 자비의 마음은 전혀 없는 거죠. 그냥 설명할 수 없는 이 공허감에 빠져 있으면 다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죠. 근데 붓다의 생애를 보면 인간은 원초적으로 세상 모두와 연결되면서 그 존재와 세계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는 그 진리에 대한 염원이 이 생명을 끊임없이 낳고 기르는 것인데, 그 마음을 잃어버리면 공허할 수밖에 없어요. 삶의 의욕뿐 아니라 동력을 다 잃어버리게 돼 있어요. 그걸 저는 일상에서 좀 느끼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 삶이 너무 재미없는 순간이 있거든요. 너무 재미없고 지루해. 근데 원고를 막 쓰고 힘들 때, 그때는 좀 열심히 살고 삶이 충만한 것 같아. 근데 이렇게 편안하고 느슨하면 지루함과 허무함이 쑥 밀려오거든요. 그런데 그때 이게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인가, 세상과 단절될 때 내가 이렇게 하는구나. 그게 그러니까 지혜와 자비라는 그 마음이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거예요. 생명력의 원천이죠, 원천.

 

그 마음이 들 때 깨봉 청년들을 먹여 살려야 돼, 애들을 빈곤에서 탈출시켜야 돼, 이렇게 뭔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할 때 기운이 나는 거예요 사실은. 그리고 뭘 새로운 걸 알고 싶다. 예컨대 지금 제 앞에 저 책 마하바라타가 있는데, 이게 재밌긴 한데 사람이 너무 많이 나와서 괴로워요. 그런데 저걸 통해 인도 사상이 이런 거구나라는 걸 알 때 그럴 때 충만하죠. 그럴 때만 충만하죠. 그게 아니면 정말 너무 삶이 공허한 거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이 전쟁을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 이게 되게 무서운 감정이에요. 그래서 이 공허함이라든가 또 막막함에 오래 방치가 되면 거기서 싹 트는 건 혐오와 파괴력이지, 절대 새로운 것이 생성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정말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붓다를 만나야 될 때가 됐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5. 선생님께서 책에서 붓다가 자아를 확장하는 길과 자아를 벗어나는 길, 이 두 개의 길 중에서 자아를 완벽히 벗어나는 길을 갔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붓다하고 비교하면 현대인들은 반대쪽으로 자아를 확장하는 쪽으로 열심히 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선생님께서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마음의 방향만 바꾸면 된다, 방향을 바꿔서 한 걸음씩만 가면 된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났을 때 예언자들이 전륜성왕이 되거나 붓다가 되거나 한다 그랬죠. 그럼 최고의 운명을 타고난 거잖아요. 근데 아버지는 뭘 원하겠어요. 아버지는 아마 전륜성왕이면서 붓다가 되는 길은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겠죠? 요즘도 그렇지 않을까요? 성스러운 인물인데 최고의 셀럽이 됐으면 좋겠어, 뭐 이렇게. 이 두 개를 같이 가야 된다고 그러잖아. 그리고 이생에서의 최고의 부와 권세 그리고 내생의 영광, 이걸 다 갖고 싶어 하는 게 일반적인 거예요. 근데 이 마음 자체가 이미 자아를 증식하는 쪽의 방향으로 선 거예요. 그 두 개를 같이 누리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근데 이걸 해보면 불가능하다는 걸 바로 알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붓다가 되는 건 이 모든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니까요.

 

제가 요즘 아인슈타인과 과학을 배우고 있는데, 과학을 빌리면 전륜성왕이 된다고 하는 길은 직선 운동을 하는 거예요. 근데 붓다가 되는 건 원 운동을 해야 되는 거죠. 이거는 질적으로 다른 거예요. 직선 운동을 하면서 원 운동을 어떻게 하겠어요. 직선의 레일를 벗어나서 계속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변속할 수 있어야 원 운동이 되는 거지. 원은 계속 방향을 바꾸는 거잖아요. 그래서 일단 이 둘이 공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출발했죠.

 

그런데 우리는 이를테면 싯다르타 왕자로서 인도 통일을 하고 그다음에 붓다가 되자, 이랬으면 좀 빨리 통일하고 40대 이후에 출가해서 깨달음을 이루면 더 완성된 삶 아닌가, 이런 식으로 생각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일단 전륜성왕이 되려면 무수히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야 돼요. 사람들은 전륜성왕은 멋있잖아 하면서 천하통일한 뒤만 생각하죠. 우리는 막 엄청난 부와 권세를 누린 다음에 오는 호화로움만 보는 거죠. 거기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혀야 되는지를 보지 않고. 그러면 요즘 사람들도 열심히 살아서 내가 엄청난 돈을 벌고(요즘은 작은 돈은 안 되더라고요, 꼭 엄청난 돈이라야 되더라고), 그걸로 최고의 집도 사고 등등을 다 한 다음에 나 영혼도 위로받고 싶어 이러는 거잖아요. 사실 그거 아닌가요? 근데 엄청난 돈을 버는 동안에 그야말로 마음이 너무 많이 오염될 수밖에 없잖아요. 늘 돈, 경쟁 그리고 실적. 여기에 시기와 질투, 이런 마음으로 24시간을 꽉 채워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고 되나요? 비트코인을 하든 주식 투자를 하든 이 마음이 거기에 완전히 가 있어야만 성공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고 성공할 수가 있나. 그런 다음에 영원히 평안을 얻겠다. 그거 자체가 불가능한 거죠. 왜냐하면 자아가 너무 비대해져서 자아로 꽉 차 있어서 틈이 없게 돼 버려요. 그런 현대인들이 겪는 대표적인 증상이 불면증이죠. 자아가 곤두서 있으면 잠을 못 자요. 잠을 못 잘 때 고전을 낭송하고 숫타니파타를 읽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요. 너무 고통스럽죠. 이 자아를 비우는 게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너무 달렸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제 싯다르타 왕자만 이 두 가지의 길로 고민을 한 게 아니고 사실 모든 사람은 이 고민에 봉착을 해요. 그냥 쫙 달려갈 것이냐, 아니면 내가 조금이라도 자아를 비우는 방향으로 이 청춘의 순간들을 통과할 것인가 근데 지금 청년들은 이분법적으로 이거 아니면 그냥 다 그냥 방치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직선 운동을 해서 내가 성취를 이룬다. 그러면 멈춰지지가 않고 여기서 이 라인을 도저히 탈 만큼의 체력과 뭐 하여튼 등등 다른 조건이 안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면 완전히 또 자괴감에 빠져요. 이렇게 같은 운동을 하는 거야. 그래서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라인은 똑같은. 그게 정말 큰 문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정말 이 길을 갈 사람은 가고, 전륜성왕 길을 갈 사람은 가고, 나머지는 그럼 정말 나는 물질과 부 이런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그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를 충만하게 하는 길을 가겠다. 이렇게 하면 참 좋잖아요. 청년이 이 길로 갈 수도 있고 이 길로 갈 수도 있고. 지금 시대에는 그게 다 가능한 시대가 됐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이걸 따라가지 않으면 굶거나 자존감을 지킬 수 없는 상태가 됐어요. 극빈이라는 상태죠. 그런데 지금은 가난하다고 누가 그걸 잘 알아보지도 못해요. 왜냐면 의상이 비슷하고 그렇지 않아요? 여기 청년들도 겉으로 봐서는 전혀 백수라고 느껴지지 않아. 그러니까 그렇게 됐으니까 이제는 선택을 할 수 있잖아요. 이 길, 나는 정말 내 존재를 충만하게 채우는 길을 가겠다. 그러려면 이제 자아를 비워야 되거든요. 비우는 그걸 연습하면 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딱 하나의 라인밖에 없다는 게 저는 좀 너무 서글퍼요.

 

이런 게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민주주의가 되는 거였나? 이게 너무 좀 당황스러울 때가 되게 많아요. 제가 젊었을 때는 우리나라가 정말 국민소득이 1만 달러 되고 2만 달러 되고 막 이러면 청춘의 자유가 풍부해질 줄 알았어요. 좋은 나라가 되는 게 뭐냐 하면 청춘이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그렇게 되면 청년들이 뭐든 하겠구나. 민주주의를 이뤄서 경찰 눈치 안 보고 살고. 요새 누가 경찰 눈치를 보나요. 그렇게 됐고 또 남녀 간의 불평등도 엄청 심했는데 여성한테도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여성의 능력도 막 펼쳐지고 이런데, 그러면 청춘이 얼마나 활발하고 빛나고 눈부실까라고, 그때 저뿐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가 모두 그렇게 기대를 했어요. 그런데 웬일이에요. 지금 선택지가 없다고. 사는 게 너무 팍팍해졌다고. 연애도 힘들다고 이런 얘기 나올 때 진짜 처음에 너무 쇼크였다니까요. 아니 이러려고 그렇게 민주주의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분투했단 말인가. 이런 걸 왜 토론을 안 하는지... 저는 정말 궁금해요. 우리 사회 지도층에서 이걸 가지고 공청회를 좀 해봤으면 좋겠어요. 지금 오히려 청춘이 빛나기는커녕 청춘의 빛이 더 지금 시들어가고 있잖아요. 그게 라인업이 하나만 돼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 부처님이 정말 전륜성왕의 길을 갔다 그러면 이 붓다의 길은 2,600년 지나고 지금까지 오지 않았을 거예요. 우린 지금까지도 불교의 가르침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고, 그냥 인도의 한 유명한 대단한 군주가 하나 있었다. 그렇게 되겠죠. 싯다르타라는 군주가. 그래서 진시황, 아소카왕, 알렉산더 대왕 이런 대왕 중에 한 명이 있었다고 되겠죠. 근데 우리가 뭐 마음이 외로울 때 알렉산더 대왕을 보고 위로받나요? 진시황한테 길을 묻나요? 그렇게 위대한 왕이 죽자마자 자식이 배신해서 바로 그냥 나라를 말아먹고. 아니 그 인생이 보통 사람 인생보다도 못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왜 이런 게 사람들이 이렇게 진짜 영광 보는 순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을 못하니까 이렇게 되는 거지. 그 삶이 얼마나 사실 황폐하고 또 불안하며 세상과 차단되었는가 그래야만 그 길을 갈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전륜성왕이 되는 길은 참 유혹적이죠. 부처님도 계속 그 갈등을 겪잖아요.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니까 약소국의 왕자로 태어나면 당연히 그게 책임감으로서 그게 얼마나 강하겠어요. 게다가 될 수 있다는데. 그런데 그렇게 해봐야 석가족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석가족도 많이 희생돼야 돼요. 전쟁을 해야 되니까. 그리고 우리가 아주 카리스마 넘치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으면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안전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죠. 표적이 되기 때문에. 그런 디테일한 사실들을 못 보고 어떤 사람이 영광 봤어이것만 생각하죠. 지금도 마찬가지죠. 누가 대박 쳤어, 이것만 보지 않나요. 그 사람들의 앞뒤와 그 삶의 맥락을 보면 절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불교를 배운다는 건 우리가 마음을 탐구하는 것이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그 복잡한 맥락을 보는 통찰력을 가지는 거예요. 그 맥락을 보게 되면 내가 어디에 금방 휩쓸리거나 아니면 금방 좌절하거나 하는 일을 덜 하겠죠. 맥락을 안 보고 그냥 결정된 사항들만 보게 되죠. 나를 좀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는 이 방향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죠.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어떤 상처뿐인 영광, 열심히 살수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자꾸 자기 자신에게 하는 그런 상태인 것 같아요. 요새 화제가 됐던 그 <해방 일지>라는 드라마 보니까 정말 자존감을 갖고 사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게 놀랍지 않나요? 굉장히 잘살고 있는데 왜 저럴까. 하나같이 다 삶이 왜 저렇게 어둡고 힘들고, 힘겨운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제가 연암에서부터 수많은 스승들을 슈가맨으로 불러냈는데 제일 센 슈가맨^^을 등장시킨 이유입니다.

 

 

6.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분들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상투적인 질문이군요^^;; 청년 붓다라는 말이 종교적인 것 때문에 불편하시다면 그냥 청년 구도자라고 해도 좋아요. 2,600년 전에 한 청년 구도자가 어떻게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탈출해서 바람처럼 사자처럼 연꽃처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 제가 그것을 그리고 싶었으니까 그런 과정을 생생하게 좀 느껴서 각자의 삶에서 그런 자유와 당당함 그리고 청정함. 이런 거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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