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보학, 하찮은 것들에서 권력을 찾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2003(재판).
루쉰의 『외침』 서문은 그 글이 사후적으로 소급해 쓴 글임을 고려하더라도, 그가 묘한 상황에 부닥쳐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해준다. 전당포에서 어렵사리 얻어온 돈으로 사기에 가까운 한의사 처방에 맡기다가 아버지가 죽고 집안은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때 그는 “다른 길을 걸어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 다르게 생긴 사람을 찾아”보려고 했다(루쉰전집 2권 22쪽). 센다이 의대에서 러일 전쟁 필름을 보다가 건장한 체격의 중국인이 구경꾼에 둘러싸여 조리돌림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의학에서 문예 운동으로 탈주한다. 그때 만든 잡지 이름이 『신생』(新生). 그러나 그마저 물주가 달아나 실패한다. 그가 말했듯이 젊은 시절 그의 삶은 적막 그 자체다. 그러고 보면 이어서 루쉰이 이야기해준 ‘쇠로 만든 방’은 자신의 삶을 적나라하게 비유한 것이기도 했다. 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는 방에 갇힌 삶. 수많은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고, 곧 숨이 막혀 죽겠지만, 혼수상태라서 자기가 죽는지도 모른 채 죽어 갈 방.
이 서문에서 루쉰은 이 방 안의 풍경을 더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이후에 이어진 소설들과 잡문들은 그 풍경들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들일 것이다. 나는 이 쇠철방이 현대적으로 권력관계와 장치(dispositif)를 은유한 것으로는 가장 빼어난 묘사라고 여기곤 했다. 특히 권력에 관한 최고의 연구자 중 하나였던 푸코의 연구들이 연상되는 풍경이었다. 사실 프로이트가 성적 현상을 분석의 대상으로 열어젖혔던 것처럼, 푸코는 권력을 새로운 분석 대상으로 만들어 준 철학자이다.
특히 이 분석에 동원된 계보학의 방법에서 보면 푸코는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미 그는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1967)에서 마르크스를 19세기의 새로운 해석학자로 등극시킨 바도 있었다. 이때도 푸코는 마르크스가 모든 대상의 심오성, 모든 대상에 대한 궁극적이고 유일한 해석을 부정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는 기존의 용어와 개념들을 가지고 계속 바꾸어 배치, 사용하면서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생산한다며, ‘순환적인 해석의 시대’을 열어젖혔다고 말한다. 그 의미에서 그의 계보학과 권력론은 순환론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형상을 지녔다. 해석의 순환과 권력의 순환은 이 계보학으로 탐구되고, 계보학으로 비로소 드러나며, 마침내 계보학으로 통합된다. 사람들은 단지 권력의 미시 물리학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그가 열어젖힌 지평을 더 넓게 보질 못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전투
일반적 역사 분석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의미를 포착하려는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보면 그 의미를 촉발한 발생 지점을 찾아내고, 과장하고, 심지어 신화화한다. 그것은 상상을 동원해 영웅들을 그린 거대 벽화와도 같다. 그림은 매끈하게 연속적으로 그려진 선들, 단순하고 간명한 영웅적 서사로 가득하다. 그러나 푸코의 계보학은 그 벽화가 잡아내지 못한 미세한 것들을 추적한다. 역사가 눈길을 주지 않던 것들, 예컨대 광기, 지식, 감옥, 처벌, 섹슈얼리티 같은 현상들을 삐딱하게 바라본다. 오히려 계보학은 어떤 의미를 포착하기보다, 이미 형성되어 현실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의미들이 사실은 우연히 그렇게 되었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차라리 지금의 의미들이 어떤 일탈, 어떤 우연, 어떤 접합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외치기 때문에, 그 외침을 계속 들으면 우리의 지식과 이해의 기반이 흔들린다. 계보학은 바로 그런 교란을 노린다. 기원에 다가가 바라보면 단단하게 묶여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부표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다. 그곳은 방죽을 때리는 파도에 휩쓸려 이곳 저곳을 정처없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자명하지 않으며, 필연적이지 않다.
만일 이 ‘권력’을 계보학적으로 살펴본다면 어떻게 될까. 푸코는 이 주제를 살피기 위해서 『리바이어던』이나 『사회계약론』 같이 주권을 다루는 주요 텍스트들이나, 부르주아지의 철학을 드러내 보여주는 고전적 철학 텍스트를 분석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정전(正田) 텍스트를 버리고 정부의 개혁안이나 탐정소설 같은 것들을 뒤진다. 거대 담론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곳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은 헤겔 안에서도 오귀스트 콩트 안에서도 아니다. 그 성스러운 텍스트의 옆에 실제의 정치적 행동을 야기한 하찮은 서류 더미(une masse de documents inconnus) 속에 진짜로 의식적이고 조직적이고 반성적인 전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말과 글』, n°151 「고문에서 독방까지(Des supplices aux cellules)」, p. 1587)
이렇게 쓰고 보면, 푸코는 이단아의 선구자 같은 느낌이다. 벤야민은 역사유물론자라면 기록되지 않은 것들과 전승되지 않은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록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하며, 기념비적으로 보존될 필요가 전혀 없는 하찮은 것들에 주목한다. 역사유물론자는 사물화된 역사적 연속성으로부터 폭파시켜 그 시대로부터 무엇을 이끌어낸다(「수집가와 역사가로서의 푹스」,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275쪽). 이 의미에서 푸코의 계보학은 벤야민이 이야기하고 있는 역사유물론과 연결된다. 사실 푸코의 마르크스주의는 여러 겹의 중계를 거치고서야 도달하는 터널이다.
물론 푸코가 권력을 연구하는데 나름의 규칙이 있다. 그는 주권이나 복종, 지배의 관점에서 권력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에게 누가 권력을 잡았는가, 지배자가 어떤 목적으로 권력을 운영할 것인가는 전혀 관심 사항이 아니다. 그는 특정 집단, 계급, 그리고 특정 개인의 이해관계, 국가나 주권의 정체(政體)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권력이 움직이면서 낳은 효과가 어떻게 주체를 구성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관심이다. 바로 그 효과 때문에 그에게 권력의 문제는 늘 신체가 문제가 되는데, 그 이유는 권력관계의 결과가 언제나 신체에 아로새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압축된 권력 중심, 이를테면 국가, 주권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중앙 집권적인 권력과는 완전히 다른 상상이다. 그것은 분산된 여러 점이 서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힘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이미지이다. 그 생성과 소멸이 모이고 거쳐 가는 곳은 오로지 신체이기에 그 신체를 중심으로 탐구가 시작된다. 권력은 신체를 공격하고, 그것에 낙인을 찍고, 훈련시키고, 고통을 주고, 노역을 강제하고, 의식을 강요하고, 그것에 여러 가지 기호를 부여한다. 기존에는 잔잔한 호수에 돌 하나를 던져 하나의 파문(波文)이 이는 것이라면, 푸코가 상상하는 모습은 수천 수만 개의 파문이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고 중첩되고 사라지는 이미지이다. 파문의 파문들이 물결 위에서 춤을 춘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그것은 경제적 이익 혹은 정치적 효용성을 입증되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작동한다. 즉 신체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공격은 복합적이고 상호적인 여러 관계에 따라서 신체의 경제적 활용과 연결된다. 물론 그전에도 권력은 경제주의와 관계를 맺어 왔다. 그전에는 권력을 법률적으로 정식화해서 권력을 일종의 권리로 받아들이고, 권력을 상품과 같이 소유물로서 대상화시켰다. 즉, 그전 관점에서 바라보는 권력은 소유되고, 이전, 양도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이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의 권력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소유할 대상으로서 주권이나 국가 권력 기구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권력의 페티시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와 달리 푸코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은 하나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권력 지배의 효과는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열, 조작, 전술, 기술, 작용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권력 속에서 우리는 소유할 수 있는 어떤 특권을 찾아내기보다는, 오히려 항상 긴장되어 있고, 항상 활동 중인 관계망을 찾아내야 하며, 그 권력의 모델로서 어떤 양도거래를 하는 계약이라든가, 어떤 영토를 점유하는 정복을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영원히 계속되는 전투를 생각해야 한다. 즉, 그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오히려 행사되는 것이며, 지배계급이 획득하거나 보존하는 ‘특권’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인 효과이며, 피지배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는 연장시켜 주기도 하는 효과라는 것이다. 한편 이 권력은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다만 단순하게 일종의 의무 내지 금지로서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 권력은 그들을 포위공격하고, 그들을 거쳐 가고, 그들을 통해서 관철된다. 더구나 그 권력은 그들을 거점으로 삼는 것이다.”(『감시와 처벌』, 57~58쪽)
여기서 권력은 주권이나 국가기구의 형태와 완전히 다른 형태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해기반 위에서 경제와 연결한다. 물론 주권이나 국가기구에 대한 분석론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지만, 푸코의 지평에서 권력은 새로운 경제주의에 입장에서 탐구된다. 사실 기존의 주권 이론은 권력이 주권 속에서 실체론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여기거나, 절대 왕정에 반대해서 의회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이 경우에는 비권력자들은 그 주권 밑에, 그리고 절대 왕정과 의회 밑에, 납작하게 존재한다. 그들은 전혀 힘이 없는 투명체이다. 그러나 신체적 힘들의 경제적 효용성과 정치적 순종성을 증대시키며 역동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현대적 메카니즘에서는 그런 권력론은 전혀 쓸모가 없게 된다. 즉, 비권력자들도 힘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주권 이론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봉건적 형태의 권력관계에 대응하는 권력 분석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푸코는 법적-정치적 주권이론을 사용하지 않고 권력을 분석할 수 있는 지평을 연다.
이미 국가와 주권 밖에서는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은 갑자기 일어나서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준비 중이다. 푸코는 그 모습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푸코가 천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푸코야말로 가장 하찮은 존재들의 수준으로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더 넓은 것을 바라보고, 더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그 시선에선 모든 사건을 예기치 않은 결론으로 이끌고, 그때까지 여백으로 있던 곳을 전부 채우고, 역사의 원재료 자체에 잠재된 힘들을 불러내는 것을 갑자기 가능하게 만들었다.
쇠철방은 권력관계이다
규율 권력이 권력관계로서 정착되고 원활하게 작동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경제적 이익과 관련하여 효과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익이 비대칭적일지라도 권력관계의 구성원들에게 모두 나눠져야만 가능하다. 즉 규율의 효과가 힘의 위계를 구성함과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생산하고 그 위계에 따라 이익을 자동으로 배분되는 데까지 나아갈 때 비로소 규율 권력은 유의미해진다.
이 의미에서 푸코가 마르크스의 ‘결합노동일’을 분석한 것은 뜻밖의 장면이지만, 탁월한 통찰이었다. 한 사람의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일 때, 12명이 결합하면 144시간이 된다. 그런데 이 순간 다른 생산을 구축하게 된다. 노동자 각자가 온종일 홀로 노동한 것보다, 12명이 함께 노동한 결합노동일이 더 많은 생산물을 생산해낸다. 즉, 노동자의 결합은 생산성을 높인다. 그런데 이렇게 결합하기 위해서는 그저 사람들을 모이게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규율을 통해(“기계를 가운데 두고 6명은 여기서 재료를 넣고, 나머지 6명은 저기서 완성된 제품품을 포장하라!”) 기계와 인간을 효율적으로 결합하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 순간에야 ‘공장’은 공장다워지는 것이다. 즉, 규율의 효과는 생산성 향상으로 나타나고, 참여자는 그 향상으로 이익을 향유하는데, 그 향유는 공동 노동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정도의 비대칭적인 이익까지이다. 즉, 공동노동의 현장에 다시 나올 정도까지는 이익을 나눠준다. 그러고보면 마르크스가 그토록 주장하던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조응은 ‘규율 권력’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어쩌면 푸코는 더 근본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을지 모른다.
물론 푸코는 마르크스에 끊임없이 비판적이었다. 심지어 마르크스에 진절머리를 낸 적도 있다. “마르크스 얘기는 더 이상 하지도 말게! 그 사람 이름은 듣고 싶지도 않아. 그게 직업인 사람한테나 가 보게. 그걸로 돈 버는 사람들, 거기에 복무하는 사람들한테나. 나는 이제 마르크스와는 완전히 손을 끊었어.”(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450쪽) 그러나 이런 평소 투정과 달리 그는 사안에 따라 마르크스에 대해 양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만일 마르크스를 과학의 추구라는 직선의 축에서 보려고 하면, 푸코에게 마르크스는 극렬한 비판의 대상이자, 심지어 조롱의 대상이다.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마르크스가 에피스테메 차원에서 아무런 인식론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조롱한다. 오히려 마르크스가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그것은 오히려 해방의 철학이기 이전에 지배적인 과학 이데올로기로서 다른 것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권력관계’라는 순환의 축에서 보면, 푸코는 그를 완전히 새로운 인식론적 담론을 구성한 사람으로 은밀히 인정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푸코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도 크게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푸코는 그 마르크스의 관점을 계보학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푸코는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추방된 인물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외부인으로서,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도 마르크스를 활용하는 특권을 가진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마치 마르크스의 중력으로부터는 자유로우면서도, 마르크스의 영토에 이륙과 착륙을 자유롭게 하는 헬리콥터 같았다. 『감시와 처벌』의 마르크스는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에서 이야기했던 순환의 해석학자 마르크스를 권력의 순환론자 마르크스로 더 확산하고, 더 심화하고, 궁극적으로 더 다양하게 변신하고 있었다.
루쉰의 쇠로 만든 방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떤 공간 안에서 영원히 돌아가는 공의 모습. 감옥은 살짝 기울어져 있고, 어쩌면 그 벽들이 우리이며, 공은 우리 사이의 관계를 상징하는 갖가지 커뮤니케이션이다. 커뮤니케이션들은 벽들을 오락가락하지만, 밖으로 빠져나갈 방도는 없다. 그것 자체가 감옥을 만드는 것이고, 우리는 벽으로 굳어져 버렸으니까. 이 벽과 공으로 이루어진 감옥 자체가 규율의 궁극적인 귀착지이다. 감옥이 범죄자들을 교정하여 정상인을 만들어낸다는 목표는 표면적인 이유다. 사실은 감옥을 만들어내는 것이 감옥의 목표이다. 왜냐하면 권력관계 그 자체가 쇠철방 그 자체, 감옥의 형상이니까.
영혼은 신체의 감옥
감옥 안에 자리 잡은 개인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간수의 입장에서 그 개인은 감옥-장치에 반응하고 변화하는 영혼이다. 감옥 밖에서 개인은 그 영혼을 쉽사리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감옥 안으로 들어오면 사소한 처벌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간수 시선에 잡히고, 기록을 남긴다. 가벼운 처벌에서부터 사소한 권리의 박탈까지 다양한 징계 수단에 의해서 영혼의 반응을 파악할 수 있고, 또한 그 반응과 함께 변화하는 모습을 기록하며 계량화할 수 있게 된다. 계량화가 원숙해지면 그 정보를 갖고 있는 자가 이제 거꾸로 반응을 만들어내고, 변화를 주도적으로 구성해 낼 수 있게 된다.
이제 영혼은 장치와 연동하여 움직이는 장치의 식민지 총독부이다. 감옥 장치와 완벽히 결합한 영혼이 탄생하는 것이다. 개인의 영혼은 독립적이지 않고, 장치의 일부로서, 아니, 장치 그 자체로서 행세한다. 그 순간 플라톤에 대한 푸코의 그 유명한 패러디, “영혼은 신체의 감옥이다.”(『감시와 처벌』, 62쪽.)란 말이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권력관계(감옥-장치)에 의해서 생성된 규제적 자아(영혼)가 자신의 신체를 감시하고 훈육한다. 규율 권력은 감옥-장치를 통해서 신체에 고통을 기입하고, 그 고통에 따라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신체를 가두어 둔다.
17, 18세기에 발명된 것 중 ‘규율 권력’만큼 몰입감 넘치는 발명품은 없다. 근대 초입을 배경으로 한 이 장치는 ‘터지기 직전의 불꽃놀이’처럼 갑작스럽지만 은밀하게 출현했다. 그러나 정점에 오른 뒤 한꺼번에 폭발하자, 그것은 불꽃들이 사방으로 튀듯, 온갖 곳으로 퍼져나갔다. 미치광이 같은 주장일지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감옥 장치는 모든 현대의 출발이다.
다시 말하면 규율 권력은 다양하고 자동적이면서 익명적인 권력으로 조직되고 구성되어 간다. 그러면서 권력은 더욱 추상화되고 더 교묘해진다. 감옥에서는 그나마 직접적으로 신체를 구속했다. 그러나 갈수록 장치와 영혼이 결합도가 커지자, 이제 감옥 아닌 곳도 감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재주가 생겼다. 신체를 구속하지 않을수록, 신체는 더욱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 갔다. 그러니까, 구속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영혼이 장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신체는 장치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학교, 병원, 회사 등등 자유로울 것 같은 곳은 이미 장치와 결합된 영혼에 구속되었다. 이미 신체에 달라붙어 있는 영혼이 장치였으니까. 이제 권력은 한두 명 구속하여 소유물을 빼앗는 것 정도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것을 스스로 내놓으며 비대칭적인 권력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순환에 빠져 버렸다. 모든 사람의 영혼은 쇠철방이 되었고, 모든 신체는 그 쇠철방을 지고 다닌다.
푸코는 루소처럼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거나, 네그리처럼 내용이 형식을 압도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 푸코에게는 루소처럼 주권 형식을 중심으로 사회계약을 도식화하여 인민의 권력을 탐구하지 않으며, 네그리처럼 흘러넘치는 권력의 변화무쌍함을 활극처럼 묘사하는 흥미진진한 내용도 없다. 푸코의 문체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주장하거나 심지어 묘사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일식이나 월식으로 가려져 있던 천체가 일식이나 월식이 끝나면 드러나듯이 그를 통해 현출되는 세계가 보여질 뿐이다. 그의 문체는 그 순간의 모습이다. 감히 말한다면 근본적으로 그에겐 방법론도 논리학도 없다. 그가 철학의 방법을 발명하거나 의미 있게 확장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자신을 통해서 우리 주변의 계보학적 구성물들을 완전하게 표현했다. 그는 학문의 프레임이 아니라, 삶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이다.
사유의 최고 발명품으로서 우리는 이 계보학을 가리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방법론으로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방법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방법을 규칙화해서 일반적인 학술적 방법론처럼 다른 사람이 그와 똑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이나 핵처럼 처음 발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한동안 계보학이 무엇에 필요한 것인지, 또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우리의 몸도 말하고, 물건들도 말한다. 죽은 것, 산 것들도 모두 끊임없이 말을 한다. 푸코는 자신을 통해 그것들을 더 선명하게 말하도록 하였다. 감옥의 처벌들에서, 정신병원의 광인들에게서, 서류 더미의 지식체계에서 등등. 계보학은 이제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의심스럽게 만들며 세상을 다르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글_약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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