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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선생의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 거짓말과 위장의 봉기

by 북드라망 2022. 9. 23.

 

거짓말과 위장의 봉기

 

미셸 푸코, 『정신의학의 권력-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3~74』, 오트르망(심세광, 전혜리) 옮김, 난장, 2014. 

 


오래전 젊은 시절 나는 어떤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본 적이 있다. 혹시 사회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처럼 행동해 본 적 있어? 나도 그래본 적이 있어서, 한창 취기가 오르고 비슷한 주제로 얘기하던 차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술을 마시며 물어봐서인지, 그는 웃으며 친구들과 어느 바에서 여자들에게 접근할 때 그래본 적이 있다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다니는 직장을 숨기고 마치 사업하는 사람인 척하며 서너 시간 대화해보았다고 한다. 그러고 헤어졌다고 하니, 아주 은밀하지만, 결론은 건전한 단막극 같았다. 그래, 그래서 그게 재미있었어? 응, 이게 말이지 은근 스릴이 있고, 그게 먹혀드는 것 같으면 기분이 아주 묘해. 이 연기는 끈적한 욕망이 뒤섞인 술집에 딱 어울리는 것이었으리라. 아무래도 연기는 보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야, 어쩌면 상대 여자들도 똑같이 연기를 했을 거야. 자기들끼리는 아카데미 주연상급입네, 뭐네, 그러면서 키득키득 댔을지도 모르지.


그 뒤로도 나는 이 주제를 좀 깊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 일상 자체가 연기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리도 다소간 자신의 정체를 윤색하며 사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윤색에 맞추어 조금씩은 연기를 하고 있고. 아마 그 윤색이 너무 심하고, 또 그 윤색에 맞추어 오래도록 연기를 하다가, 그 연기 자체가 정체성이 되어 버리면 좀 심각한 상황이 오기도 한다. 이 윤색에 얼마나 몰입하느냐에 따라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일은 견고해진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 견고함을 만들어내고 자연스럽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일은 당연한 일상사이다. 아니, 그러지 않고서는 살수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도 싶다. 


그런데 이 연기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아마 두 가지 경우일 거라고 짐작해 본다. 우선 사회의 다양한 관계를 이해하고, 그것에 적합하게 자신의 연기를 연마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는 어떻게든 자신의 연기력을 높여야 한다. 상대와 눈을 맞추며 상황에 맞는 연기를 잘 찾아 나가야 한다. 부단히 노력하여 삶 그 자체가 이 연극에 맞춤형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로서 역할, 회사 과장으로서 역할, 부하 직원으로서 역할, 소비자로서 역할, 판매자로서 역할 등등 다양한 역할을 적합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연기력은 좋은데, 단지 그 상황에 맞는 역할과 연기가 영 맞지 않아서 다른 연기를 펼쳐야 속이 시원한 경우는 좀 심각해진다. 아버지로서 역할을 하라고 하니까, 아니, 내가 왜 아버지여야 해, 아버지 안 해, 나는 엄마야. 아니 왜 내가 회사 과장이야? 나는 사장이야, 나는 장관이야, 나는 대통령이야. 등등. 원래 맡은 배역이란 게 있는데, 그런 역을 부정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역을 주장하는 경우, 그는 심각한 문제 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이른바 망상에 빠진 정신병자란 이렇게 맡은 배역을 부정하고 다른 연기를 펼치는 사람인 것이다. 

 

 

 

위장과 위장의 세계
정신적으로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인데, 왜 그것을 병이라고 할까? 푸코는 이 질문을 파고들었다.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않고서는 그저 다르게 살아가는 것에 불과한데도 병으로 정의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변화가 바람직한지, 몰상식하게 나쁜 것인지는 나는 알 수 없다. 그래봤자 지식체계에 불과하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뭐 아무려면 어때, 하는 기분도 든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다른 생각과 행동이 병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 무시무시하면서도, 그 과정에는 이상하게도 사상적으로 텅 비어 있고, 등장인물들의 손발이 기가 찰 정도로 맞아떨어져 간 기묘함이 있다. 아마도 거기에는 어떤 힘들이 기묘하게 합치하며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정신의학의 계보학에 대해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요양원 안에서 작동하며 일반적인 규칙체계를 왜곡하는 권력체계가 있습니다. 즉 다수성, 분산, 차이와 위계의 체계를 통해, 하지만 더 정확히는 상이한 개인들이 그 안에서 한정된 자리를 점유하고 상당수의 분명한 직분을 그 안에서 확보하는, 소위 전술적 장치를 통해 확보되는 권력 체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권력의 전술적 작동이 있고, 또 이 전술적 운용이 권력의 행사를 가능케 해줍니다.”(『정신의학의 탄생』, 24쪽)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물으면 “도무지 알 수 없다. 왜 내게 이러느냐?”라고들 답한다. 그중에서도 자기 생각을 타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존재하는 자신이 홀로 버려지는 게 가장 두렵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러 사람 틈에 있으면서도 검은 방에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생각이 다를 뿐이고, 그런 다른 생각 사이의 소통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데도, 잘못된 것으로 몰아가고, 소통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병이라고 규정해 버린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생각 자체는 혼자만의 생각이어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면서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정신의 방에는 홀로 있는 것인데, 정신의학은 그것 중 어떤 것을 정신병으로 규정해 버린다. 푸코의 위 말은 이렇게 규정하여 그렇게 통용되도록 하는 데는 어떤 힘이 전술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정신병자란 맡은 배역을 부정하고 다른 연기를 펼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신병을 다루는 의사는 바로 이 순간, 그러니까 맡은 배역을 부정하고 다른 배역을 연기하는 사람에게 개입한다. 생각해 보면 정신과 의사는 배역에 맡는 연기를 하도록 조정하는 연출가와도 같다. 우스꽝스럽게도 때론 하나의 배역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서로 싸우는 일도 생긴다. 푸코가 이런 코미디 같은 상황을 찾아 소개한다. 각자 자신을 왕이라 생각하고 서로 루이 16세를 지칭하는 정신이상자 세 명이 있다. 그들이 어느 날 병원에서 왕권 다툼을 벌인다. 그 다툼이 너무 지나쳐 병원 간수가 주목하게 되었다. 급기야 간수가 세 사람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따로 불러서 말했다. "누가 봐도 미친 저 사람들과 왜 다투나요? 당신이 루이 16세로 인정될 것이 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 않나요?" 그 찬사에 그가 기분이 좋아졌다. 마침내 그에게 이 다툼이 무의미해졌다. 그는 다른 두 사람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지며 곧 자리를 뜬다. 간수는 다른 두 사람에게도 똑같은 술책을 쓴다. 그러자 다른 두 사람도 서로를 경멸하며 곧 자리를 뜨고 싸움은 흐지부지되어 버린다. 자신을 루이 16세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가, 역시 자신이 루이 16세라고 생각하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게 되고, 의사가 그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볼 때 그는 간접적으로 자신과 자기 자신의 광기에 대해 의학적 의식과 비슷한 의식을 갖게 된다. 

 

시답잖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푸코가 이 에피소드를 인용하는 장면을 보고 나는 왠지 이 연극적 상황이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자기를 루이 16세라고 여긴다는 것은, 그게 뭐가 되었든 자기 자신을 무언가로 생각하는 순간, 그는 그 무언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이 자기 혼자이면 괜찮은데, 그 역을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두 명 더 있고, 공교롭게도 그 두 명이 내 옆에 있다고 쳐보자. 그건 재앙에 가깝다. 다툼이 벌어지고 그 역할을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게 될 것이다. 일종의 경쟁이라는 것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이 와서 "그거 당신 역할이 맞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러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면서 쓸데없는 싸움을 그만두고 자기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다른 두 명에게도 가서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경쟁이라는 사태도 허망한 거짓이고, 그것을 단념하게 만드는 것도 허망한 거짓이다. 거짓과 거짓, 위장과 위장끼리 시시덕거리는 세계, 아마도 우리 세계가 그런 것과 같다. 

 


정신의학은 치료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적 현상이 드문드문 섬처럼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은 시간의 검증을 받으면서 시간 경과와 함께 일반화되고 사람들의 정신에 흡수되어 가치판단 기준의 일부로 편입되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특이하고 당대를 설명하기 좋은 형태일지라도 변화의 기본적인 조건이 되지 못할 것이다. 어느 시기에 독자적인 스타일을 가진 형태가 불쑥 튀어나와 우리의 강한 주목을 받았다고 해도 만일 그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면, 그것은 변화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단지 변화의 요소를 품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푸코가 설명하는 규율 장치들의 사례, 특히 정신의학이 탄생한 정신요양원의 현상은 명백히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을 갖고 있다. 사실 정신의학이라고 하니, 우리 정신생활을 좀 더 깨끗하게 만든 구원군처럼 느껴진다. 물론 나와는 무관하게 여겨지니, 그렇게 중대한 구원군 같지는 않다. 그러나 정신적인 병을 어떻게 알게 되었고,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하느냐로 들어가면 실로 복잡하다. 푸코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저히 병원을 신뢰할 수 없을 정도다. 

 

예컨대, 정신병원이 생기면서 신체에 가하는 도구가 진일보하는데, 특히 ‘교정 도구’는 독특한 장치이다. 이 기구는 그것에 저항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고, 거꾸로 그것에서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그 때문에 괴로워지는 기구이다. 쇠로 된 징이 박힌 목걸이는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느낄 수 없지만, 고개를 숙이면 숙일수록 그것을 느끼게 되는 체계이다. 그리고 구속복은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죄어오는 체계이다. 현기증을 일으키는 의자는 움직이지 않으면 그냥 앉아 있을 수 있지만, 반대로 몸을 움직이면 의자의 진동이 뱃멀미 같은 것을 일으키는 도구이다. 이런 도구로 병을 치료하다니, 정신요양원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곳이다. 정신병이 남대문에 여봐란듯이 걸어 놓고 보고 만질 수 있다면야 나도 믿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실체가 없는 정신의 병을 믿을 수 없고, 더더군다나 그 병을 치료한다니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정신과 의사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정신병을 샅샅이 뒤져서 보이게 하고, 그중 자신이 써먹을 것만 가지고 이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미셸 푸코의 문체나 구도는 이제는 고전적 방식이 되고 또한 참조로서 기능을 한다. 미셸 푸코도 당연히 동시대 사람들에게서, 아마 우리들도 그 범위에 들어갈지 모르지만 아무튼, 종종(혹은 지독히 지속적으로) 비판과 야유를 받는다.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가 탐구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글쓰기로 풀어내는 문체에 강한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문체나 방법론은 하나의 스탠더드가 되어 간 것 같다. 만일 그가 만들어낸 방법과 문체가 없었다면 철학이 지금과 좀 다른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그의 문체나 방법은 이제 철학 정신의 일부로 단단히 들어와 버렸다, 라고 해야 한다. 이를테면 이제 계보학적 정신과 문체가 없이 어떻게 철학을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푸코의 오리지널함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허망하게 헤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아니, 오히려 지금의 눈으로 마치 야구 심판이 홈플레이트에 묻은 흙들을 털어내듯이, 오리지널한 푸코를 명석판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푸코 강의의 압권은 정신의학이 성립되고 권력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하는 장면인데, 특히 정신의학의 지식체계가 전혀 치료에 쓰이지 않으면서도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 내가 이름 붙이길, ‘권력이 된 텅 빈 사상’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설명하는 장면이다.

 

 

초기 정신요양원에서는 정신병자들을 치료하는데, 의사가 꼭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초기 정신요양원은 규율적 시설이었으므로 환자가 들어오면 앞서서 말한 교정 도구로 광인들이 자신의 병을 인식하게 하고 고쳐나가는 체계, – 그것이 실제 사태를 좋게 만들든, 나쁘게 만들든, - 어쨌든 치료 체계로서 규율 체계가 이미 있었다. 그렇다면 의사가 없어도 이미 치료는 되고 있는 셈이므로, 의사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즉, 의사의 정신의학적 지식이 정신요양원 체제에 실제로 활용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이상자들을 지도할 때 실제로 의사들이 사용하는 것도 그 지식이 아닌데, 왜 정신의학 지식체계가 필요하며, 왜 의사들이 필요한가? 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이유는 정신의학 지식체계가 주는 보충적 권력 효과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의사와 의사가 가지고 있는 정신의학 지식체계가 정신요양원의 권력을  더 보강해 주기 때문이다. 

 

이건 기업체계에서 대학에서 생산된 지식체계나 학벌이 실무 유효성이 있느냐의 문제와도 상통한다. 사실 명문대학을 나오거나, 어마어마한 지식체계를 습득했다고 판매를 잘한다거나, 경영 전략을 잘 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요양원의 고민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일전에 술자리에 보았던 어느 중소기업 경영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꼭 그 학벌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되는데, 왜 그를 써야 하나, 하는 그런 고민 속에 늘 빠지곤 한다고 말한다. 다만 그런 고민은 현상에서 그런 높은 학벌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으니 곧 잊어버리고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푸코의 말대로 적용해보면, 그들은 기업조직에 보충적 권력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체계나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을 조직 구성원으로 구성함으로써, 즉, 명문대 출신의 똑똑한 사람을 하나의 표식으로 존재하게 함으로써 조직은 마치 훌륭한 자원이 있는 것으로 규정되고, 사실 그들이 일을 잘하거나, 돈을 잘 버는 것과는 하등 상관없이 조직의 권력관계를 비대칭적으로 강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런 표식의 권력 때문에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그의 능력과 상관없이 업무를 부드럽게 만드는 유용성을 발휘한다. 어디까지나 추론이고, 푸코의 정신 분석을 적용해본 것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푸코가 정신의학을 분석하면서 의사가 정신요양원에 꼭 있을 필요가 없는데 왜 있는가에 대한 대답과 상통한다. 그들은 그 지식이 치료에 도움이 되느냐 안되느냐와 하등 상관없이 하나의 표식으로서 권력에 보충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정신의학은 회진을 통해서, 규율을 치료로 이해(거의 오인에 가깝다!)하도록 하고, 또 심문을 통해서 “나에게 징후를 내놓아라, 내 앞에서 네 삶을 정신병의 징후로 만들어라. 그러면 너는 나를 의사로 만들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정신의학의 탄생』, 392쪽). 이를 통해 얻는 것은 비정상성과 정상성의 구분이다. 푸코는 정신의학의 지식체계 구성 방식, 그러니까 권력관계의 보충적 역할로서 존재하는 지식체계가 정신의학을 넘어서서 사회 곳곳으로 퍼진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되면 정신의학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데 권력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사회의 지식이 똑같이 대상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학교에서, 기업에서, 군대에서 거의 모든 장소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견고해진다. 거칠게 이야기하는 꼴이지만, 궁극적으로 그 지식체계들은 실제로 유효하냐, 유효하지 않으냐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데 기여할 뿐인 게 된다(『정신의학의 탄생』, 392쪽). 

 


광기의 쾌락, 위장 그리고 봉기
오래전 언젠가 일 년 내내 휴가를 쓰지 못하고 있다가 몰아서 열흘 정도 연속으로 휴가를 내고, 집에서만 틀어박혀서 지내본 적이 있다. 그때 가장 난처하고 이상한 상황은 대낮에 어슬렁거리며 집 앞을 왔다 갔다 할 때이다. 모조리 회사나 학교에 가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가게에 있는 사람이든, 지나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든 나를 좀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뭐, 내가 휴가 중입니다, 라고, 이번엔 멀리 가지 않고 집에서 푹 쉬고 있어요, 라고, 이렇게 여유롭게 걸으니, 우리 동네 참 좋네요, 라고 일일이 얘기해줄 수도 없으니, 그저 수상한 눈초리를 받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니, 이게 참 좀 불편했다. 그래서 하나, 수를 썼다. 마치 원래부터 백수였던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이다.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비디오를 빌릴 때도 “집에서 매일 보는 거 말고, 좀 새로운 거 없어요? 몇 달째 온종일 비디오만 보는데....” 이러면서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러자, 상대는 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는지, 내게 자유롭게 대화를 건넨다. “글쎄, 시간이 그리 많으면 40편짜리 <의천도룡기> 어때?”

 

아, 그런데 그게 이상한 게, 그렇게 대해주니까, 기분이 완전 편안하고 즐거웠다. 나도 이 세계, 그러니까 매일 정규적으로 회사에 나가지 않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사는 백수의 세계에서 일원이 된 듯했고, 어쩐지 그 세계의 쾌락에 빠져버린 듯도 했다. 그렇게 거닐다 보면 비슷한 사람들을 같은 시간에 자주 보게도 된다. 그러다, 슬쩍 “뭐, 재미난 건 없나요?”라면, 그는 미소를 띠며 “흐흐, 그냥 저기 가고 있지요.” 백수의 쾌락이란 뭐, 이런 것인가. 그냥 저기 가는 거. 대체 저기란 어디인가. 아무도 살펴 주지 않지만, 그냥 저기 가보는 여유가 있다. 나는 남은 휴가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동네를 시도 때도 없이 돌면서 백수의 쾌락을 느꼈다. 아카데미급 주연은 아니어도, 동네 백수계의 조연급은 되지 않았을까.

 

푸코는 정신의학의 목표가 규율 권력을 이용해서 정신이상자-비정상인이 빠진 광기의 쾌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의학은 환자 스스로 정신병자임을 인정하고, 광기의 쾌락을 음미하기를 포기하도록 한다. 그러니까, 정신의학은 환자를 처벌로 다스려서 다른 역할의 쾌락에 빠지지 않게 하고, 원래 정해진 역할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다(『정신의학의 탄생』, 238, 243쪽). 여기에 저항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 당신이 조사한대로 나는 당신에게 징후를 말해주겠다, 나는 병에 걸렸다, 그리고 당신의 치료로 내가 나을 수도 있고, 또 낫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등등, 의사들은 의사들이 원하는대로 나를 평가하도록 내버려두고 광인 자신은 여전히 쾌락 속에 있는 방법. 통치자들이 모르는 우리들만의 쾌락을 발명하고, 그곳에 거주하는 것, 그것이 광인의 저항인 것이다.   

 

나는 산책로를 걸을 때, 이상하게도 오르막길을 좋아한 적이 있다. 예전에 지리산을 오르며 너무 숨이 차오른 경험이 있는데, 그때 느낀 바가 있어서 그것을 극복해볼 요량으로 산책로에 오르막길이 있으면 더 열심히 걸어보았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 오르막길이 나오면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힘이 들어, 앉아 있었으면 하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오르막길이 나오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좋아져서 더 오르게 하는 힘을 주었다. 정신의학과 광기의 관계가 이 오르막길과 같다. 통치자들이 모르는 쾌락 속에서 ‘거대한 위장의 봉기’로, 정신의학과 광기의 관계를 급진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글_약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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