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자기, 주체 표면 위 복종과 저항
미셸 푸코, 『자기해석학의 기원』, 오트르망 심세광·전혜리 옮김, 동녘, 2022
어린 시절 내게 아버지는 아주 엄했다. 잘못을 저지르고 변명을 하거나, 숨기면 아주 강하게 꾸짖었다. 예컨대 부모님이 집에서 동생을 돌보라 하고 외출했다 돌아왔는데, 동생이 울고 있으면 끝까지 추궁해서 내 잘못을 시인토록 하여 강하게 질책했다. 그때 내가 동생 탓을 하면 질책은 더 강해졌다. 자기 잘못을 남에게 돌린다는 지적이 덧붙여져서 질책은 배가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내가 모든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나는 무언가 잘못된 함정에 빠졌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처럼 정화된 사람이 되었다. 새로워지는 기분이랄까, 하는 감정으로 아버지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 상태가 되면 새로워진 나를 감동적으로 받아들였다. 돌이켜 보면 내 잘못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항변이 아주 많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모두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버지나, 나에게 사태를 마무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실적이 심각하게 안 좋거나, 특히 업무상 사고가 터져서 조직을 위험에 빠트릴 때, 우리는 시장이나 업무 환경 탓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상황이 잘 마무리되지 않았다. 회사는 이해관계로 둘러싸인 곳이라, 우리가 잘못한 일로 영향을 받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라서 그대로 넘어갈 수가 없다. 그때 중요한 것은 책임져야 할 우리가 스스로 잘못한 부분을 정확하게 실토하고, 앞으로 책임지고 개선하겠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이게 어쩐지 어린 시절 아버지 앞에서 잘못을 고백하고 정화하는 예식과 똑같아 보인다. 그러고 나면 이해관계자들 간에 잘잘못이 결정되기 때문에 다소간 그 문제로부터 이탈할 수 있게 된다.
이 장면을 계속 생각하면 어쩐지 우리의 삶이 잘못을 실토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삶의 밑에 잘못의 어두운 돌덩어리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 돌덩어리를 하나씩 매달고 사는 것 같다. 그러다 일이 꼬이면 뭐든 실토할 잘못을 준비라도 해온 것처럼 꺼내서 사태를 수습한다. 이렇게 더 밀어붙인다면 이 덩어리들이 뭔가 지질학적 지층처럼 쌓인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미 수백만 년 동안 잘못이 돌덩어리로 먼저 있었고,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지층 밖으로 나와서 내가 변명하거나 회피할라치면 어김없이 존재를 정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있고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이 있고 그 잘못이 나를 이렇게 저렇게 조정하는 것은 아닌지. 이게 결국 현대 존재론의 미스테리가 아닐까. 참회를 통해 정화하는 삶.
지배 테크닉과 자기 테크닉
푸코는 인터뷰에서 권력과 물리적 힘 사이의 차이를 예로 설명한다. 만일 푸코 자신이 인터뷰하는 상대의 녹음기를 집어 들어 내동댕이치면, 상대는 인터뷰를 그만두고 다른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가 그냥 손을 잡고 여기로 혹은 저기로 가라고 강제할 수도 있다. 그 경우는 권력이 권력이기를 멈추고 그저 물리적 힘이 되는 지점이다. 사람이 하지 않아도 기계가 사람을 들어 올렸다가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 그것은 권력이라기보다 순수한 물리력 행사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푸코가 나이를 이용하거나, 이러저러한 지식을 이용하여 전혀 강제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내버려 두고 상대를 움직이게 했다고 치자. 그런 경우 비로소 푸코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자기해석학의 기원』 145~146p).
푸코의 설명은 우리에게 권력 개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영감을 준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자유로운 두 주체 간의 관계가 존재할 때야 비로소 존재한다는 뜻이다. 직접적인 물리력이 아니라, 지식이든 뭐든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 일방이 타자에게 작용을 가하고, 타자는 그 작용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관계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권력은 형성된다. 둘 사이에 자유로운 공간이 있어야 하고, 작용을 당하는 주체도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틈이 있어야 한다. 물론 둘 사이에 어느 한쪽이 더 영향력이 세거나 하는 불균형도 존재해야 한다. 이 의미에서 권력관계는 분명 평등한 관계는 아니다. 그래야 어느 한쪽 권력의 작용이 다른 쪽으로 흐를 수 있을 거니까.
그러고 보면 권력관계는 다층적 의미를 지닌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몇 겹의 지질학적 층위로 겹쳐져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층위들 밑으로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다층적 관계망은 한 형태가 있고, 그다음 한 형태가 차곡차곡 쌓이는 현실의 지층과는 다르다. 그것은 질서 없이 존재하고 있다가 불균형의 경사를 타고 한꺼번에 표출된다. 그런데 층위들 사이로 권력관계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의 침식과 축적이 있었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한꺼번에 그것들이 표출되기 때문에 그 요소들에 눈을 돌리면 굉장히 복잡하여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기 힘들다. 그만큼 관계론적으로 권력을 탐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푸코는 이 어려움 속에서 어느 순간 다음과 같은 사항을 깨닫는다.
“저는 주체 일반과 관련된 근대의 이론적 구축물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저는 과거의 제 책에서 말하고, 살며, 일하는 존재로서의 주체에 관련된 이론들을 분석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또 저는 병원, 정신병원, 감옥과 같은 기관에서 구축된 지식과 실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중략).... 제 계획은 주체의 인식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다른 테크닉을 배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배 테크닉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성현상의 경험을 연구하면서 저는 어떤 사회가 되었든 간에 모든 사회에는 다른 유형의 테크닉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개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들을 변형시키고 수정하게 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그들 자신의 신체, 영혼, 사유, 품행에 상당수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해서 일정한 완결 상태, 행복의 상태, 순수한 상태, 초자연적인 힘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일련의 테크닉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테크닉들을 ‘자기 테크닉’ 혹은 ‘자기 테크놀로지’라 명하도록 합시다.”(『자기해석학의 기원』 40~41p)
푸코는 이 권력관계에 개입하는 테크닉을 아주 단순하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지배 테크닉과 자기 테크닉. 타자가 자기를 통솔하는 방식(지배 테크닉)과 자기가 자기를 통솔하는 방식(자기 테크닉)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타자가 자기를 통솔하는 방식이 내 신체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하려면, 그 방식을 수용하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그 방식으로 통솔해야 한다. 외부에서 내게로 강제하는 테크닉과 자기가 자기 자신을 구축하고 변화시키는 테크닉은 상보적이기도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즉, 지배 테크닉과 자기 테크닉은 늘 불안정한 평형이 존재한다.
푸코가 연구했던 정신병원과 교도소는 지배 테크닉의 극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른바 ‘규율’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지배 테크닉의 일면에 불과하다. 아마도 지배 테크닉은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경험 사례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 테크닉들을 어떤 권력 기구에 의한 실체적인 폭력이나 억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지배 테크닉은 일종의 관계적 테크닉이다. 지배 테크닉은 자기 테크닉에 의해 보완되지 않으면 신체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부러진 화살처럼 땅에 떨어지고 만다. 푸코는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미 ‘통치성’이라는 낯선 주제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이제 통치성의 두 가지 분절점, 지배 테크닉과 자기 테크닉 중에서 자기 테크닉의 세계, 그 전에 탐구하던 세계와도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자기해석학의 기원
푸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당신의 영적 인도자에게 당신의 모든 생각을 고백하세요”라는 자기 인식의 의무가 수도원의 계율이 되어버린 시기인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이 실천들에 한 변혁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변혁은 현대 주체성의 계보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변형과 더불어 우리가 주체의 해석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시작됩니다.”(『자기해석학의 기원』 45p) 푸코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주체의 해석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에 놓여 있다. 그는 자기 테크닉 관점에서 그리스-로마와 중세 그리스도교가 크게 다르다고 말한다. 여기에 어떤 변혁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푸코가 이 변혁을 설명하기 위해 찾아낸 근거는 고대 로마의 자기 점검과 관련한 철학 테크닉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그것과 이것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는 매우 미묘한 곳을 찾아 서술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행하는 조언의 개념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경우 조언은 당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동시에 어떤 도덕률을 제시하고 응징하면서, 그 기준에 맞게 자신을 비판하길 바란다고 상대에게 전하는 말이다. 그것은 언제나 거의 질책에 가깝다. 그러나 다음 세네카의 말을 들어 보자.
“영혼은 매일매일 결산을 위해 소환되어야 합니다. 하루가 저물고 저녁의 휴식으로 돌아와서 그는 자신의 영혼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오늘 너의 어떤 악을 고쳤는가? 어떤 악행을 저지했는가? 어떤 점에서 너는 나아졌는가?” 매일매일 심판인에게 출두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분노는 멈추고 점잖아질 것입니다. 하루 전체를 샅샅이 조사하는 이 습관보다 무엇이 더 아름답겠습니까? 자신을 점검한 이후에 찾아오는 잠은 어떠합니까! 영혼이 칭찬받고 혹은 훈계를 듣고 자신의 관찰자와 감찰관이 조용히 자신의 행동 일체를 알게 된 이후에 찾아오는 잠은 얼마나 고요하며, 얼마나 깊고 편안합니까! 저는 이런 힘을 활용하며 매일 제 자신에 대해 변론합니다.“(「분노에 관하여 Ⅲ」 『세네카의 대화:인생에 관하여』 163~164p)
푸코가 세네카를 끄집어낸 것은 시간을 거스른다. 사실 푸코가 끌어들이는 스토아 철학은 현대에 와서 이미 자기 계발의 영역에서 마음을 정화하는 언어로 스며들어 대중에게 열광적으로 수용된 지 오래다. 또 부분적으로는 그의 지적이 지금까지 보여왔던 반(反)인간주의의 과제를 지지하는 두드러지게 실험적인 태도가 안 보인다고 비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푸코의 접근이 부르주아적인 개인주의에 기반한 인간주의로 회귀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낳을 만하다.
그러나 푸코가 세네카로부터 파악한 조언은 새로운 도덕률을 제시하거나, 기존의 도덕률을 상기하여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이미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흘려보내되,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로고스에 맞게 당신의 삶의 양식을 바꾸어 ‘진실’이 현실에서 작동하도록 바꾸는 것이다. 조언의 목표는 과거를 응징하고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세네카는 상기 인용문처럼 잠자기 전에 자기 점검을 하기를 조언한다. 그런데 이 자기 점검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삶에 관하여 자신에게 설정해야 할 목표들을 잘 의식하고 있지 못했거나, 그 목표들로부터 도출해야 할 행동 규칙들을 올바르게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과오를 상기하는 것은 스스로 징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이런 자기 점검을 수행하는 이유는 적용했어야 할 규칙들을 상기하고, 그것들이 재활성화하고, 그것들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방식을 바꾸어 앞으로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더 잘 살아내도록 행동을 바꾸는데 그 일차적인 목표가 있다.
세네카의 자기 점검 관점에서 보면, 주체는 삶에 있어서 목표나 행동 규칙들이 기억의 형태로 집결하고 기록되는 지점이다. 행동 규칙을 기억하고, 행동 규칙대로 행동한다. 그렇다면 주체는 행동 규칙의 기억과 행위들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이 표현이 굉장히 중요하다. 주체가 행동 규칙을 기억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로고스로서의 행동 규칙이 주체 표면에 다가가 기억되게 하고, 다시 행동으로 펼쳐 나간다. 주어는 주체가 아니라, 행동 규칙이다.
바로 여기에 푸코의 독창성이 있다. 부분적으로는 그가 이미 『안전, 영토, 인구』 이래로 ‘통치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연구는 필연적으로 주체의 표면 위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기억과 행위의 교차점으로서 주체는 이미 통치성과 권력관계의 전쟁터이기도 했다. 통치성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면 그는 세네카에서 볼 수 있는 미묘한 감각, 즉 세네카의 자기 점검이 상기하는 행동 규칙은 징벌이 아니라 행위를 끌어내기 위함이라는 이 요소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푸코의 이런 평가를 보라. “세네카의 목표는 일정한 이론적 원리들에 외부로부터 오는 강제력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 원리들을 승리하는 힘으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세네카는 진실에 힘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자기해석학의 기원』 55p)
푸코 이전에는 현대 철학이 스토아나 에피쿠로스주의에 내재해 있는 그 넘쳐흐르는 자기테크닉의 감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단 그가 알아차리자, 무한히 쌓여 있는 금광처럼 캐낼 것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오랫동안 보아왔던 것 안에 그렇게 오랫동안 보이지 않게 숨어 있었다니! 푸코는 그리스도교의 참회를 분석하여 대비함으로써 세네카 철학의 의식점검이 그리스도교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 특이 지점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이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주체의 해석학』과 마지막 저서 『성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관점이다.
사실 푸코가 그리스도교의 참회와 수도원 생활을 설명하는 방식도 매우 특이하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참회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실토하는 것이기만 한 게 아니라, 늘 자기 자신을 드러낼 의무를 통해 ‘현시’하는 생활 방식이다. 로마의 귀족 여인 파비올라의 참회 장면은 흥미롭다. 그녀는 첫 남편이 죽기 전에 재혼했다. 그것은 대단히 나쁜 것이어서 참회를 해야 했다. 그녀는 참회자 신분으로 재를 뒤집어쓰고 머리를 숙인 채 풀어헤친 가슴과 얼굴에 상처를 낸다. 그리고 그 주위로 주교와 성직자들이 그녀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이것을 엑소몰로게시스(exomologesis)라고 하는데, 그 순간 죄가 소멸하여 세례로 얻은 순수성이 회복된다. 죄인이 자신의 더럽고 타락한 모습, 오염된 모습을 실제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회복되고 있다.
이건 마치 내가 어린 시절에 나의 잘못을 실토하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정화의 시간을 가졌던 것과 똑같다. 이미 나의 세상에도 참회가 세속의 변종으로 흘러 들어와 있었던 걸까. 나와 가족의 삶 많은 부분이 이미 오이디푸스적으로 틀지어져 버렸고, 나는 주교나 성직자가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죄를 실토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 순간 나는 잘못을 저지른 나를 버리고, 정화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해석'은 자기 점검의 계보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적 자기 점검에 대해 사용한 말이다. 여기서 ‘해석’은 대상의 사태들을 분석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식별하여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 해석의 목표는 나쁜 것을 추적해서 확인한 후 도려내기 위해서이다. 이 대상을 '자기'로 바꾸면 이 해석의 목표는 명백하다. 즉, 해석을 통해서 자기가 나쁜 것(사탄)에 물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자기 자신이 버려야 할 분명한 대상임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자기 포기가 목표인 분석. 스토아의 자기 점검이 그리스도교의 '참회'로 전유되어 자기 점검의 역사에 큰 변혁을 몰고 온 자기해석학적 사건. 이 자기에 대한 해석학이 자기를 버리고 신에게 자신을 던지는 길을 열어 버린다. 이건 엄청난 일인데, 어떤 능동적인 것도 노예적인 것들에 의해 전유할 수 있다는 것. 이념은 도구 앞에 무력하다는 것. 그런데 이것은 주체가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거란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여준 사태이기도 하다는 것. 이 사태 이후 자기배려의 부활은 오랜 잠복기를 거쳐야 했다.
이제 앞으로 푸코가 빠져들게 될 세계는 이 자기해석학의 커다란 파탄 앞에서 굴절되고 왜곡되어간 ‘진실 말하기’의 세계이다. ‘진실 말하기’의 행위에는 이중의 형상이 착종되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비밀-그리스도교식으로는 사탄-을 밝혀내고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자기를 포기하고 신에게 귀의하여 과거에 사로잡힌 자기-형상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부터 쳐들어온 힘으로서 진실-자기 점검에서는 행동 규칙으로 표현했다-에 맞추어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서 새로운 자기로 거듭나고 미래로 나아가는 자기-형상이다. 이 두 개의 자기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혁명과 반-혁명, 복종과 저항을 거듭하며 주체의 전쟁을 벌어진다.
역사라는 더 큰 프레임으로 보면 그리스 로마식 자기점검의 방식은 어쩌면 부수적이고 파편적인 사항으로 우리에게 드러난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자기해석학은 가족에서, 회사에서, 국가에서 도처에 존재한다. 나는 푸코가 걸어 들어간 세계가 여태까지 보여준 철학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이렇게 다양한 사유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는 거의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모든 철학책은 자기만의 세계를 개현하기 위해서 각자 독특한 지형의 고지를 점령한다. 철학 독서는 누가 더 옳은지 그른지가 아니라, 그 고지의 지형을 함께 올라가서 그 지형에서 보이는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철학자가 무엇을 보기 위해 그 험한 지형으로 가고 있는지 온몸으로 느끼면서 동행해야 한다. 언어로 전달되는 그의 경험을 어떻게 나도 경험하느냐가 철학 독서의 중대한 관건이다. 예전에 파인만의 두 권짜리 물리학책으로 세미나를 한 적 있다. 세미나는 이론 물리학의 언어를 경험적 대상으로 전화시키는 각축장 같았다. 그 어려운 수학 모델들을 손짓과 발짓으로 표현하려는 노력들이 가득했다. 어쩌면 이 시도, 이 정신, 그러니까 언어를 신체화하는 노력. 어쩌면 푸코가 보여주는 세계는 이제 언어로서의 철학을 넘어서서 이 몸짓을 만들어내는 언어와 비언어의 경계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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