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약선생의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 르네 마그리트, 왕에 대항하는 왕

by 북드라망 2022. 8. 19.


르네 마그리트, 왕에 대항하는 왕

미셸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김현 옮김, 고려대학교출판부, 2010


요즘 나는 재즈를 열심히 듣는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 차를 끌고 출근하다 아주 우연히 <모닝>(Moanin’), <튀니지의 밤>(A Night In Tunisia)의 찢어지는 관악기 소리, 박진감 넘치는 북소리에 빠져서 잠깐 차를 멈추고 한동안 음악을 들었다. 어쩌지 못하여 빨려드는 느낌이 있었고, 그날 이후로 재즈만 찾아 듣는다. 그 많은 CD니 LP니 구매할 여력도 없고, 변변한 오디오 장치도 없어서 오로지 유튜브 뮤직으로만 곡을 찾아 듣는다.

재즈에는 스탠더드 넘버라는 게 있다. 수많은 연주가에 의해 애창되거나 또는 연주되어 온 곡인데, 가령 어느 영화에 삽입된 오리지널 재즈곡을 사람들이 계속 반복해 듣고, 연주자들이 계속 되풀이해 즐겨 연주하면 스탠더드가 되어서 대중이나, 연주자들이 첫 소절만 들어도 딱 알아듣고 반응하게 되는 곡들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수십 명이 연주해 놓은 것을 한꺼번에 들어보면 같은 곡인데도 연주자들마다 다른 연주를 듣는 것 같다. 재즈 스탠더드 넘버의 다양한 연주를 들을 때, 기묘하면서도 감동적인 것은 깊이라곤 전혀 없는 통속적이고 하찮아 보이던 곡이 계속 반복해 연주되면서 자신의 심오한 사상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연주자가 주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곡 자체가 운동하면서 스스로 심오함을 구성한다. 기원을 찾아가면 심오함이라곤 전혀 없는 평범하고 텅 빈 곡이 반복되면서 과거가 지속되는데, 그 과정에서 동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음악들이 나온다. 심지어 오리지널은 잊혀지고, 반복된 연주들끼리 무엇이 원본인지 알길이 없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창조성이란게 뭘까. 푸코는 어디선가 창조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역사와의 전투’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창조성은 동시대와 다른 것을 역사에서 찾아 그것과 혼합하여 동시대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벗어나기 위해 동시대와 전투하고, 섞이기 위해 과거와 줄다리기한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만을 앞당기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현재와 혼합하면서 창조성을 만들어 낸다. 이를테면 푸코의 시대 구분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대는 유사성의 시대, 고전주의 시대에는 재현의 시대이다. 하지만 그게 무 자르듯 탁, 자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고전주의 시대가 되었다고 르네상스 시대의 유사성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 순간 재미있는 일이 발생하는데, 르네상스의 유사성이 고전주의 프레임 안에서 여전히 지속하면서 동시대와 불화하는 광기를 만들고, 그 광기는 고전주의에게 창조성을 공급한다. 여기에다 내 생각을 얹는다면, 사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사성이 창조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자리에서 밀려나 주변부에 거주하던 유사성이 광기의 모습으로 이 재현의 구조 안에 난입하면서 아주 묘하게도 창조성을 흩뿌려 넣는 것이다. 이건 묘한 반복이다. 사라짐과 나타남의 반복.


중얼거리는 이미지 : 고전주의 시대 공통의 자리
고고학은 담론적 실천의 두 시기를 구분하여 두 실천 사이에 이질성이 뚜렷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서 푸코는 어떤 실천이 다른 실천을 어떻게 대체하고 있는지를 아주 세밀하게 추적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이 담론이 어떤 의미가 있고, 저 담론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는 해석학적 실천과 아주 다르게, 다른 실천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진실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두 시기를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들이 있을 것인데, 푸코는 그것들을 찾아 세밀하게 기술하려고 한다. 그 후에는 절대 그 전과는 같은 방법으로 실천하기 불가능한 전환점, 그는 바로 그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의 그림에 두 가지 원칙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원칙. 그림 속에서 이미지와 텍스트는 분리되어 있다. 이미지는 외부 대상을 명명하거나 확언(affirmation)할 수 없고, 말은 외부 대상과 똑같이 모든 것을 묘사할 수 없다. 그것들은 각자 방식으로 외부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두 체계는 교차하거나 용해되지 않는다.”(『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39쪽)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니까. 그런데 두 번째 원칙에서 이들은 슬그머니 결합한다. 언어 없이 이미지만 그렸는데도 이미지는 외부 대상과 유사하게 그려 넣으면서 언어가 지시한 듯 외부 대상을 직접 가리킨다. 거의 언어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이미지도 유사(ressemblance)를 통해서 언어처럼 명명하고 대상을 확언(affirmation)한다. 푸코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언어 기호와 조형 요소 사이의 분리, 유사와 확언의 등가성. 이 두 원칙이 고전 회화의 긴장을 구성했었다. 후자(두 번째 원칙)는 언어 요소가 세심하게 배제된 회화에 담론(말이 있는 곳에서만 확언이 있다)을 재도입했다.”(앞의 책, 77쪽)

하얀 도화지에 악어 그림을 악어와 똑같이 스케치했다고 치자. 그 스케치는 그림 밖에 있는 현실의 악어와 유사하다(ressembler). 그 유사하다는 사실 때문에 그 스케치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현실의 악어를 정확히 재현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affirmer). 즉, 유사와 확언이 등가성을 가진다. “당신이 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앞의 책, 42쪽) 이렇게 되면 그림 자체가 언표(énoncé)라고 할 수도 있다. 일종의 “말 없는 언표”(앞의 책, 42쪽)가 슬그머니 그림 안으로 스며들어 온다. 이미지만 보고도 즉시 “악어다!”라고 외치게 된다. 마치 ‘악어’라는 텍스트를 본 것과 똑같이. 푸코는 이를 다음과 같은 문구로 재미있게 묘사한다.

“그 언표는 형상들의 침묵을 둘러싸고 포위하고 점령하여 그것을 그 자체로부터 튀어나오게 하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명명이 가능한 사물들의 영역 속으로 다시 쏟아붓는, 한없고 끈질긴 중얼거림과도 같다.”(42)


언표가 이미지 주위를 돌아다니며 이미지 속으로 잠입하고, 언제든 튀어나오게 장착된다. 누구든지 그 그림을 보면 예외없이 악어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미지도 순수한 이미지가 아니라, 중얼거리는 언표가 되어 버렸다. 이미지는 즉시 그림 밖 사물을 가리킨다. 이미지와 기호가 서로 교차하는 이 지점을 푸코는 ‘공통의 자리’(lieu commun)라고 부른다. 그곳은 말 그대로 이미지가 말 없는 언표가 되는, 그래서 거의 언어처럼 작동하는 지점이다. 물론 이미지의 자리와 기호의 자리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지만, 슬그머니 이미지가 기호에 종속되는 자리이다. 즉, 그 이미지는 그림 밖의 대상을 정확히 지시하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악어 그림을 보고 아무 의심 없이 악어라고 외친다. 물론 우리가 그 지시를 따라가서 그 지시가 가리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아주 편안하고 의심 없이 가리킨 바를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림을 글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글자가 그림이 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애매한 이미지 : 모더니티 시대의 불협화음
고전주의 시대는 이 공통의 자리가 있으므로 이미지와 담론은 분리되어 있긴 하지만, 서로 갈등 없이 평화롭게 존재한다. 이미지는 이미지대로 담론을 품고 부족함 없이 그림 밖 대상을 지시한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이런 고전주의 시대의 평화를 무참히 깨기를 작정한다. 푸코에게는 마그리트 그림이 고고학적 사건이다.

파이프가 그려진 그림이 있다. 우리는 명백히 파이프라고 여겨지는 그림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파이프 그림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란 언어들의 연쇄인 문장(사실 나중에는 이것은 문장이기만 하진 않다)이 있다. 사실 우리는 이 문장을 보기 이전에 그림을 보며 관습적으로 이미지를 ‘파이프’라는 단어와 연결해 왔고, 따라서 이미지를언표 그 자체인 듯이 여기며 ‘읽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고전주의적 방식과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탈을 쓴 언표를 읽고 있다. 우리는 이미지를 이미지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관습에 사로잡혀서 마음속으로 즉각 생각한다. “파. 이. 프 !” 그런데 그 밑에 있는 문구도 동시에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 어, 이상하다. 이미 우리는 이미지를 보자마자, 마치 그것 자체가 언표인 양 ‘파이프’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그렇게 읽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외친 그 “언표”(“파. 이. 프.”)와 완전히 다른 뜻의 ‘문구’가 밑에 딱 버티고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 그 순간 혼란스러워진다. 우리의 습관은 파이프라고 하고 있지만, 제시된 문구는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니까. 우리가 익숙했던 그 습관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언어 사이에 공통의 자리는 사라졌다. 이제 중얼거리는 이미지는 칼리그램에 의해 제어 당한다. 관습대로 마음속에서 즉각적으로 읽게 되는 파이프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는 “칼리그램”(비로소 ‘문구’라는 단어에서 벗어났다. 파이프가 아니라는 문구는 언어로서가 아니라 칼리그램 이미지로서 그림에 참여하고 있을 수도 있다.)이 묘하게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푸코는 마그리트가 노린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제 외따로 떨어진 파이프 데생은 파이프라는 말이 통상적으로 지시하는 그 형태와 자신을 가능한 한 비슷하게 만들어 보려 하지만 헛일이다. 또한 학술서에서의 그림설명이 그렇듯 텍스트도 충실하게 데생 아래에서 펼쳐지려 하지만 그것도 헛일이다. 그들 사이에선 이혼 서식만이, 데생의 이름과 텍스트의 지시물을 부인하는 언표만이 있을 수 있다. 어디에도 파이프는 없다.”(34)


고전주의 시대에 공통의 자리를 통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던 이미지와 기호가 마그리트에게 오면 서로 만나는 공통의 자리를 잡지 못한다. 그런데 마그리트의 전략은 참으로 기묘하다. 그는 이미지도 기호도 고전주의가 하던 그대로, 오히려 더 정밀하고, 더 정확하고, 더 그림 밖 사실에 부합하게 표현한다. 그러면서 이미지와 기호가 각각 분리된 채 그림 안에 단단히 자리 잡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충실히 고전주의 원칙을 따르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자리를 잡는 순간, 이미지에 스며들어 있던 언표(여기서는 ‘파. 이. 프.’)가 기호로 박혀 있는 칼리그램(여기서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란 기호-이미지)이 충돌하면서(즉, 파이프인데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는...) 공통 지점의 평화를 깨버린다. 이것은 파이프인데, 파이프가 아니다. 아니, 여기 파이프가 있지만, 어디에도 파이프가 없다. 그는 전통적인 배치 안에 유지되고 있는 공통의 공간으로 은밀히 파 들어간다. 그러나 들어가고 들어가도 그 공통의 자리는 나오지 않는다. 이제 길을 잃고 굴속에서 정처 없는 미아가 되어 버린다. 마그리트는 그 상황 자체를 보여준다.

르네 마그리트, 두 개의 비밀


마그리트가 그린 그림들은 고전주의가 이미지와 기호를 분리하되, 다시 그림 밖 대상을 재현하는 기능을 슬그머니 재도입한 것에 번번이 타격을 입힌다. 고전주의에서는 이미지나 기호를 하나로 뭉개고 단 하나의 세계만 있었다면, 마그리트에게는 이미지와 기호의 분리가 분리 그대로 실현되고, 하나로 수렴되는 것조차 애매하게 만들고, 서로 불협화음을 일으킴으로써 끊임없이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거나 다른 세계에 자리를 내주는 다층적인 공간을 만든다. 매끈한 재현 아래에 눌려 있거나, 매끈한 재현 모퉁이에 있던 새로운 사유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상사, 왕에 대항하는 왕
마그리트는 편지를 써서 푸코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유사(類似, Ressemblance)와 상사(相似, Similitude)의 차이에 대한 자기 견해와 푸코의 의견을 구하는 내용이다.

“내가 보기에는, 가령 완두콩들 사이에는 가시적이면서(색깔, 형태, 크기) 동시에 비가시적인(성분, 맛, 무게) 상사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가짜’나 ‘진짜’ 등등도 마찬가집니다. ‘사물들’은 그들 사이에 관계를 갖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상사 관계를 갖거나 갖지 않거나 합니다. 유사하다는 것은 사유에만 속합니다. 사유는 자기가 보고 듣거나 아는 것이 됨으로써 닮습니다. 사유는 세상이 그것에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앞의 책, 84쪽)


이 주장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마그리트는 유사가 세상과 접촉하면서 그것과 닮아지는 정신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완두콩끼리는, 그러니까 정신 작용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의 실제 사물들 사이에는 도무지 유사성이 발생할 턱이 없다. 유사(닮아지는 것)는 생각의 영역에서 실재의 반영으로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실재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상사는 다르다. 상사는 정신 작용과 상관없이 실재 사물들 사이의 속성이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실제 완두콩들 사이에 크기나, 맛, 색깔이 같다면 그것은 상사이다.

그런데 푸코는 이에 대해 응답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

“내가 보기엔, 마그리트는 유사에서 상사를 분리해 내고 후자를 전자와 반대로 작용하게 하는 것 같다. 유사에는 ‘주인’(《patron》, 후원자, 소유주)이 있다. 근원이 되는 요소가 그것으로서, 그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됨으로써, 그 근원 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 [...] 반면 비슷하다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 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상사는 되풀이에 쓰이며, 되풀이는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린다.”(앞의 책, 61쪽)


마그리트의 그림 <재현>(Représentation, 1962)을 보면, 오른쪽은 잔디 위에서 사람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재현하였다. 그런데 왼쪽을 보면 다시 테라스 위로 조그만 난간 지주가 있는데, 거기에 작은 규모로 다시 똑같은 사람들이 잔디 위에서 축구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푸코의 관점에서 볼 때, 만일 두 개 사이가 유사 관계였다면 둘 중 무언가가 주인(patron)의 역할, 그러니까, 근원이 되는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오른쪽, 왼쪽이 무엇이 근원 요소인지 확정하기가 힘들다.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뿐 무엇이 시작이었다고 확정할 수 없는,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불안 상태. 푸코는 묻는다. “무엇이 무엇을 ‘재현’한단 말인가?”(앞의 책, 62쪽)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반복이 있을 뿐이다. 이 경우가 바로 상사이다. 주인-근원이 없는 세계, 그러므로 그것은 푸코 표현대로 군주제를 폐지한다(앞의 책, 62쪽).

<데칼코마니>(Décalcomanie, 1966)는 오른편에 붉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왼편에는 모자를 쓴 사람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사람의 모양 그대로 커튼이 정확히 오려져 있고, 그곳으로 커튼이 가렸던 바다가 보인다. 여기서는 양쪽이 교차하여 상동이 발생했다. 커튼에 남긴 구멍은 왼쪽 남자의 옛 존재이다. 그 존재는 정확히 왼쪽으로 이동했다. 반면, 사람의 실루엣 모양으로 오려진 풍경도 잘려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이것은 사물 간에 어떤 요소들이 교차하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근원적인 요소이고 그것을 따라 계속 모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작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조차 확정할 수 없다. 이 경우도 근원이 되는 요소는 사라지고 없다.


푸코는 생애 마지막 강의에서 견유주의자를 소개하면서 “왕에 대항하는 왕”(le roi antiroi)이며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해 싸우는 왕”(「자기통치와 타자통치:진실의 용기」, 3월 21일)이라고 말한다. 또 “예술가의 삶은 자신의 작품(oeuvre)을 창조할 만큼 충분히 비범해야 할 뿐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삶 속에서 참된 예술을 드러내야 한다.”(앞의 강의, 2월 29일)라고도 말한다. 전자는 마그리트가 작품 안에 근원적인 요소로서 군주(푸코는 주인(patron)이라고 표현했다.)와 대항하는 것과 같다. 후자는 마그리트가 미술 작품 안에서 대항했던 그 작업을 작품 밖으로 끄집어내서 이제 자기 자신을 작품 삼아 자기 자신 안에 슬그머니 들어와 있는 마음의 군주와 대항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두 개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나는 이것을 ‘상사의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군주가 사라지고 상사의 반복이 무한히 진행되는 자유의 시간. 이 상사의 시간에는 두 가지 차원이 놓인다. 하나는 우리가 생산하는 사회와 문화와 사물들, 즉 타자에 스며들어 있는 상사의 반복,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 안에서, 즉 자기에게 펼쳐지는 상사의 반복. 우리가 만들어내는 예술 작품은 이렇게 두 개다. 이 두 개는 눈으로 보기에 차이가 너무 커서, 다르다고 여기기도 한다. 타자에게 가하는 배려와 자기에게 가하는 배려. 그러나 타자와 자기는 근본적으로 같은 생산인 것이다. 언제나 이것들은 함께 이루어진다. 타자로 위장한 군주와 대항하면서, 자기에 스며든 군주와 동시에 싸우는 것이고, 자기의 군주와 싸우면서 타자의 군주와 동시에 대항한다. 그게 진정한 왕이 되는 에토스이다.

글_약선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