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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보 활보(闊步)

언젠가 먹고 말거야! - 제이와 포도

by 북드라망 2012. 8. 28.

포도의 계절


제이랑 나랑 자주 다니는 길에 과일가게가 하나 있다.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려면 이 가게 앞을 지나야 한다. 가게 안에는 과일들이 박스로 쌓여 있다. 가게 바깥으로까지 수박, 참외, 복숭아, 토마토 등등이 쏟아져 나와 있다. 반짝이 달린 찢어진 티셔츠를 입고 이마에 빨간 스카프를 질끈 동여매고 소형 마이크를 입 앞에 단 아저씨가 땅바닥을 발로 쿵쿵 울리면서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몰라요! 꿀복숭아 다섯 개 삼천 원, 삼천 원!” 하면서 외친다. 어디? 정말?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쭉 빼고 가게 앞으로 모여든다. 이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휠체어 지나가기가 힘이 든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녹색등에서 빨간불로 바뀌려고 하는데, 바뀌기 전에 빨리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과일가게 앞에 장사진을 이룬 사람들로 길이 막혀 다음 신호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종종 있다.



작년 여름, 처음 활동보조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내 다리는 온통 휠체어에 부딪친 멍투성이였다. 휠체어는 제이 신체의 연장이다. 그런데 이전에 휠체어 탄 사람과 만나본 적이 없는 나는 제이를 볼 때 제이의 얼굴, 손발에만 눈이 간다. 휠체어는 별로 의식하지 못 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제이가 몸을 돌릴 때, 제이의 얼굴만 보고 있다가 휠체어의 뾰족 튀어난 모서리에 정강이가 부딪친다. 으으읔… 휠체어가 쇳덩어리로 된 거라 여기 부딪치면 눈물이 쑥 빠지게 아프다. 하지만 내 실수로 그런 걸 제이 앞에서 아픈 티도 못 내고… 혼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질 때가 많았다. 요즘은 휠체어의 속도와 방향에 따라 내 보폭과 동선을 조절하는 능력이 생겼다. 제이의 얼굴을 보고 있어도 휠체어의 움직임 전체에 의식을 두게 된다.

그러나 ‘다른’ 신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거리를 활보하다 보면 아무리 조심해도 제이의 휠체어 바퀴에 발이 밟히거나 전에 나처럼 뒤의 발판 모서리에 쥐어박히는 일이 종종 있다. 얼마나 아플까! 내가 겪어 봐서 안다. 그래서 활동보조로서 나의 중요한 일은 ‘클랙션’ 역할이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지날 때 “좀 지나갈게요” 하면서 제이의 길을 열어주고 또 사람들이 부딪쳐 다치지 않도록 소리로 알리는 일.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나는 목소리가 잘 안 나온다. 평소에도 말을 잘 못 한다. 말 한 마디 하려면 어… 어… 하면서 몇 번이나 더듬거려야 한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한테 “길 좀 비켜주세요” 소리친다는 게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제이의 휠체어와 사람들이 부딪치는 사고(?)가 난 다음에야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클랙션이 소리가 안 나거나 타이밍을 놓쳐 너무 늦게 울린 탓이다.

요즘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소리 알리미’ 역할은 나에게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 사람들한테 길 비켜달라고 말하는 게 조심스럽다. 사람들 기분 안 상하게, 예의바르게 부탁하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무더운 여름날에는 특히나. 누구나 제 갈 길이 바쁜 법이다. 인도에 차가 다니면서 빵빵 클랙션을 울리면 짜증이 나듯이 바퀴 달린 물체가 사람더러 비키라고 하면 일단 짜증부터 난다. “누구더러 길을 비키래?” “몸도 불편한 사람이 집에 있지 왜 나왔어?”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일은 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의를 가지고 우리를 대해준다. 아이구 몸 불편한 사람이 먼저 가야지 하면서 길을 비켜준다. 장애인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가 일반적이다. 오히려 너무 과도한 호의(휠체어를 뒤에서 밀어준다든지 “힘내” 하면서 제이의 손을 꼬옥 잡는다든지 하는)가 문제가 되지 사람들이 참 너무 배려가 없다 싶을 때는 별로 없다. 그리고 제이는 휠체어를 정말 천천히 조심해서 운전한다. 사람들 뒤에 천천히 따라가지 “다 비켜” 하면서 혼자 쌩 앞서 가지 않는다. 그래서 속도가 느리다는 것 빼고 활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지만 이런 생각은 해보게 된다.



휠체어는 차도로 다녀야 하나, 인도로 다녀야 하나. 휠체어도 엄연히 바퀴 달린 탈것이니까 차도로 다녀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속도가 걷는 속도와 비슷하니 인도로 다녀야 한다. 아기 보행기에도 바퀴가 달렸다. 그렇다고 보행기가 차도로 주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휠체어하고 보행기를 비교하니 좀 웃기긴 하지만… 보행기와 제이의 휠체어가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때 나는 순간적으로 보행기를 밀고 가는 아기 엄마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문득 쳐다보면… 내가 밀고 가는 보행기에는 아기가 아니라 괴물이 타고 있어! 아악, 비명을 지르려다 보면… 엘리베이터 문틈에 휠체어 바퀴가 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 천천히 승강기에서 내리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으음… 정신차려야지.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다. 그런데 제이는 길 가는 걸 멈추고 과일가게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개를 쭉 빼고 값싸고 싱싱한 과일 구경에 여념이 없다. 복숭아 토마토도 싱싱하지만 한 바구니에 세 송이가 담겨 있고, 그렇게 한 바구니에 오천 원이라고 아저씨가 소리치는 포도가 특히 알이 굵고 잘 익어 보인다. 벌써 포도 철인가? 얼마 전까지 연일 폭염이 계속되더니 지금은 더위가 한풀 꺾였다.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났으니 한여름은 지난 셈이다. 하지만 아직 여름이 지난 건 아니래. 다음 주부터 다시 더워지기 시작한대. 구월 초까지는 여름이래. 제이는 일기예보에서 들은 걸 나한테 알려준다. 제이는 언제나 정확한 일기예보를 알고 있다. 기상청 캐스터 같다. 오늘은 흐리다가 오후부터 비가 올 거래. 오늘은 기온이 34도야. 그러다 흐리기만 하고 오후에 비가 안 오면 “이상하다… 비가 오기로 했는데…”라고 한다. 마치 비하고 만나기로 한 것처럼 말이다.

포도 이렇게 잘 익은 게 한 바구니에 오천 원이라니… 한 바구니 살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제이랑 같이 포도를 먹는 일이 약간 난감하다. 다른 과일은 껍질을 깎아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 제이 입에 넣어주면 되지만 포도는 껍질째 입에 넣고 씨를 뱉아야 한다. 이 포도 껍질과 씨를 하나 하나 내 손으로 받아야 할 걸 생각하니… 나는 쫌… 귀찮다. 그런데 제이는 포도가 먹고 싶은 모양이다. 과일가게 포도 내놓은 앞에서 떠나질 않는다. 안 돼! 이건 신포도야! 신호 바뀌었어, 빨리 길 건너자. 나는 포도 앞에서 차마 떼어지지 않는 제이의 휠체어를 이솝의 도움을 빌어 억지로 밀었다.



오늘은 인권강사 아카데미 개학을 하는 날이다. 삼 개월 간의 기초 과정을 마치고 심화 과정 공부를 시작하는 날. 제이는 이 개학이 누구보다 감격스럽다. 왜냐하면 제이는 이 개학을 못 맞을 뻔했기 때문이다. 방학 동안 교회 오빠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해서 공부 계속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카데미 팀장님께 심화 과정은 못 하게 될 것 같다고 메일까지 보냈는데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니 그건 참 어리석은 짓이다.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걸 오빠와의 감정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제이는 다시 팀장님께 전화를 해서 공부 계속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안 하겠다고 하다가 다시 하겠다고 하니 팀장님은 도대체 제이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그래도 공부 계속하겠다니 반가운 일이다, 열심히 해라고 팀장님은 제이를 격려해 주셨다.

제이는 창피해 죽을 지경이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 선생님들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쟤는 여기 왜 왔어? 쟤가 끝까지 할까? 홧김에 때려치겠다고 했다가 다시 왔으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시선으로 제이를 쳐다보는 것 같다. 개학 첫날부터 제이는 몸 둘 곳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게 다 자업자득인 것을. 이번 학기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친구들한테 신뢰를 회복하자. 방학 동안의 고뇌와 방황을 만회하자. 지각 결석 절대 안 하고, 과제 열심히 해오고, 강의 열심히 듣고, 토론도 열심히 참여하고,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관심과 애정을 갖자. 제이는 이렇게 굳은 결심을 하며 개학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너무 비장한 각오로 개학을 맞이하다 보니 제이는 집에서 나올 때 점심을 못 먹고 나왔다. 너무 긴장해서 밥이 안 먹혔다. 그러니 아까 과일가게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게 배가 고파서였던 것이다. 1시간 동안 이번 심화 과정에 대한 설명 듣고, 2시간 동안 강의 듣고, 또 1시간 토론… 이렇게 4 시간 동안 공부를 해야 하는데… 강의 1시간쯤 듣고 나니 제이는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다. 그토록 굳은 결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학 첫날부터 제이는 강의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아 배고파… 간식은 언제 나오나… 이 생각만 하고 있는데… 마침 간식이 나왔다. 간식은 포도였다.



아, 포도! 아까 그토록 먹고 싶었던 포도! 제이는 아까 과일가게에서 오래 눈맞췄던 포도를 다시 만난 듯 반갑다. 그런데 강의 듣는 중에 활보는 뒷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제이 앞에 포도가 있어도 제이는 그것을 먹을 수가 없다. 그림의 떡, 아니 그림의 포도인 것이다. 옆에 다른 사람들은 냠냠 맛있게 포도를 먹고 마치 약이라도 올리듯 제이 옷에까지 튀도록 포도 씨를 힘껏 뱉는데 제이는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하다니… 뒷자리에 앉아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아프다. 활보는 원래 뒷자리에 앉아 강의를 열심히 듣고 내용을 기록해야 하지만, 강의는 뒷전이고 내 머릿속에는 온통 제이에게 뭘 좀 먹여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마침내 쉬는 시간, 나는 잽싸게 제이한테 가서 포도를 먹여준다. 그리고 보니까 옆에 앉은 친구가 간식으로 집에서 부침개를 해서 싸가지고 왔다. 이것도 조금 얻어서 제이 입에 넣어준다. 참을 수 있겠어? 조금만 더 힘을 내! 나는 마치 링 위의 복서를 격려하는 코치처럼 제이에게 간식을 먹이고, 쉬는 시간이 끝날 때 허겁지겁 송이에서 뜯어낸 포도알을 한 주먹 제이의 입 속에 틀어넣어주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 자리로 돌아와 생각하니 걱정이 된다. 한 주먹이나 되는 포도알들을 제이가 어떻게 한 입에 삼키고 껍질과 씨를 뱉을 것인가.

오오, 그러나 걱정할 게 없었다. 강의 끝나고 가보니 제이 앞에는 아까 내가 입에 넣어준 포도 껍질들이 얌전하게 쌓여 있었다. 제이는 강의 들으면서 천천히 하나씩 포도알들을 삼키고 껍질은 조심해서 냅킨 위에 모아서 뱉었다고 한다. 그런데 씨는? 씨는 어떻게 했어? 제이가 뱉어 놓은 포도 껍질들 옆에는 씨가 하나도 없었다. 제이만 혼자 씨 없는 포도를 먹은 건가? 그게 아니었다. 포도 씨 다 어쨌냐고 다그치는 나에게 제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이렇게 대답했다.

“포도 씨? 그걸 왜 뱉어서 버려? 고소한데 냠냠 씹어서 먹지!”



_ 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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