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올 여름 제이의 수입은 쏠쏠했다. 복지 일자리 외에 아르바이트를 조금 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란, 박물관, 공연장, 은행, 체육관 등을 둘러보면서 그곳에 장애인 시설이 잘 되어 있나 잘 안 되어 있나를 조사하는 일이다.
원래 봄에 했던 아르바이트인데, 여름에 추가로 4건을 더 하게 되었다.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이 다 못 한 것을 제이가 받아서 더 하게 된 것이다. 이때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 중에 제이가 가장 일을 빨리, 그리고 많이 했다. 제이는 이 일을 너무나 즐겁게 신나하면서 했다. 무엇보다 돈이 되는 일이고, 서울 시내 여러 시설들을 둘러보는 게 제이에게는 ‘일’이라기보다 ‘소풍’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러라도 놀러가고 싶은 미술관 박물관 같은 곳에 가서, 장애인이라면 당연히 느끼는 문제를 확인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일이 돈이 되다니! 이렇게 좋은 아르바이트를 놓치는 사람이 있다니… 모니터링 누락분이 있다는 사실이 제이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제이는 즐거운 돈벌이를 더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맙고 신나는 일이다.
이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에 사전 교육을 두 차례에 걸쳐서 받았다. 조사 나가서 어떤 사항들을 확인해야 하는지, 조사 과정에 부딪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 설명도 듣고 토론도 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여기 교육 받는 데서 제이는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는지 안 되어 있는지 조사하는 설문 문항에 “은행의 현금입출금기 화면이 너무 빨리 넘어가서 이용하기가 불편하다”는 항목을 추가하자는 주장과 함께, 제이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해서 사람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던 것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데 경사로가 있으면 안 돼요! 전에 어떤 미술관에 갔을 때 층계 올라갈 때 완전 멋진 남자가 와서 안아서 올려줬어요!”
이렇게 시작한 모니터링 아르바이트 때문에 과외의 수입이 생겨서 제이는 오랜만에 동생한테 맛있는 것도 사 주고, 벼르던 탑브라도 사고, 주택청약저축도 평소보다 많이 넣었다. 제이는 너무 행복해졌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니! 특히, 동생에게 누나로서의 권위를 세울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제이에게는 두 살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이 동생이 평소 제이의 속을 자주 긁는다.
"누나는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나이가 서른인데 자기 밥벌이도 못 하고. 누나 때문에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도 못 하겠어."
"밥벌이를 못 하다니! 난 복지 일자리 근무를 하고 있어!"
복지 일자리란… 청소, 모니터링, 동료 상담, 행정 도우미 등의 업무에서 장애인을 고용하여 급여를 지급하는, 장애인 지원 제도이다. 제이는 현재, 종로에 있는 복지 일자리 작업장에서 청소, 동료 상담의 일을 하고 있다. 급여는 한 달에 26만 원 정도. 이 돈으로 활보 자부담비 내고, 주택 청약저축 넣고, 교회 모임 회비 내고… 제이는 한 달에 6~7만원으로 생활한다.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어서 주거비, 식비가 따로 안 들기 때문에 그 돈으로 용돈을 하면서 아껴서 살고 있다. 큰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을 해서 매달 돈을 벌고 있고, 그 수입의 규모 안에서 제이는 알뜰하게 살고 있는데… 은행에 근무하고 있는 동생 눈에는 누나의 벌이는 도대체 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누나를 일 안 하고 노는 ‘능력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한다. 능력이 없으면서, 능력을 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도 하지 않는, 게으르고 한심한 사람이라고 때때로 욕을 하니… 동생이 한번씩 이렇게 속을 뒤집어놓을 때마다 제이는 며칠씩 잠을 못 잔다.
제이도 취업을 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안 가는 대신 컴퓨터를 배워서 웹디자인 기술을 익혔다. 그래서 어떤 회사에 인턴 사원으로까지 뽑혔는데 정직원으로 채용되는 데는 실패했다. 제이는 손발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 한다. 밥도 다른 사람이 먹여줘야 한다. 그런데 손가락을 섬세하게 움직이지는 못 하지만, 손목을 써서 마우스를 움직일 수 있고 컴퓨터 자판은 천천히 두드릴 수 있으니 웹 디자인 기술을 배운 것인데… 그래도 이게 전문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전문가 수준에는 제이의 실력이 미치지 못 했다. 다양한 정보를 빨리 빨리 받아들여서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제이는 신체 조건상 일하는 속도가 느리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턴 사원으로 뽑힌 기쁨과 정직원이 되지 못한 좌절을 동시에 겪으면서 제이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아, 내가 남들하고 경쟁해서 이기는 일을 하기는 힘들겠구나…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구나…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좋아하는 일이 밥벌이가 되고, 그 일로 세상을 만나는 것. 그런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여기저기 부딪쳐 보기 전에는 모른다. 그래서 제이는 열심히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시도 쓰고 있는데 동생은 이런 누나를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다고 무시하니 속이 상한다. 게다가, 누나 때문에 여자 친구를 집에 못 데려온다니! 동생은 누나가 휠체어 탄 게 창피해서 여자 친구한테 보여주기 싫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결혼을 해서 자기 마누라가 누나 때문에 고생할까봐 걱정된다고 한다. 이 말이 가시가 되어 박혀서… 제이는 정말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다.
그래도 너는 내 동생이니까 내가 데리고 간다! 제이는 이러면서 이번에 모니터링 해서 돈 번 거 가지고 동생에게 치킨을 사주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동생은 제이한테 맨날 얻어먹는다. 지는 연봉 억대로 벌면서 한 달 수입 이십 몇 만원 그게 돈이냐고 무시하는 누나한테 맨날 “짜장면 사줘” “아이스크림 사줘” 하는 걸 보면 역시 동생은 동생인 모양이다. 제이는 이번에 모니터링을 해서 번 과외의 수입 때문에 이 철없는 동생에게 평소 짜장면 사주다가 치킨을 사줘서 권위가 확 섰다고 으쓱해한다.
"난 뭐 없어?"
모니터링 급여에 활보 수당도 있는데, 이번 추가분에서는 예산이 모자라서 활보 수당이 없다. 어마나… 뜻밖에 기대했던 돈이 안 나오는 바람에 난 완전 망했다. 월급날은 아직 멀었는데 통장에는 잔고가 320원. 이 돈으로 어떻게 한 달을 버틴단 말인가! 하긴… 작년에는 40원으로 한 달을 버틴 적도 있다. 지갑을 탈탈 털어도 40원밖에 없는데 자판기 커피가 꼭 한 잔 마시고 싶어 아침에 활보 하던 친구에게 동전 좀 달라고 하니까 이 친구가 “나도 돈 없어. 돈 없어서 나도 교회 헌금 외상했어”라고 하는 바람에 까무라친 적이 있다. 320원이나 남아 있으니 이번엔 좀 여유 있는 목소리로 나는 제이에게 “월급날 갚은 테니 돈 만 원만 빌려줘”라고 한다. 그랬더니 제이는 고개를 홱 돌려 째려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 아르바이트 안 했으면 어쩔 뻔 했어? 사람이 그렇게 막살아서 어쩌려고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통장에 한 달 월급치 정도는 깔려 있어야지! 만원 가지고 어떻게 한 달을 살아? 자, 여기 이 만원! ”
_ 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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