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이반 일리치 강의』 - 자기 삶을 스스로 사유하고 창조하라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인문학 공동체 생활을 처음 시작할 무렵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 알았다. ‘아 대학을 꼭 안 나와도 되는구나!’ 사실 내가 3,000만 원의 학자금 대출과 맞바꾸며 한 장의 졸업 증명서를 받았을 때는 꽤 허무했다. 대학교에서 배운 게 무엇이었던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던가? 어떤 삶의 기예나 배움이 아닌, 그저 취업을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에 대해 그제야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제 출신인 이반 일리치는 1970년대에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학교 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을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탈락시키기 위해 만든 제도가 아닐까?”(『이반 일리치 강의』, 70쪽) 왜 학교 제도는 전 세계에 어떤 특이성도 없이 너무나 보편적인 방식으로 정해진 걸까?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학교에 다니는 것,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것은 정상과 비정상을 만들어낸다. 학교에 별 탈 없이 다니고 성적을 잘 받는 아이는 그야말로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대상이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성적이 낮은 친구들을 뭔가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처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좀 더 들여다보면 소위 모범생으로 자란 사람들도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을 이룬, 그러니까 “모든 사회적 명령”을 무사히 수행한 중년들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고백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학교는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의 출발점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지. 모두가 학교에서 행복하지 않은 방식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다른 대안이 없지 않은가? 막막해지니 또다시 누군가의 해결책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 이 끊임없는 의존성이란! 하지만 결국, 내 삶을 살아내는 건 ‘나라는 존재’다. 내 삶을 내가 선택할 것. 나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는 일”을 찾을 것. 이반 일리치가 주장하는 것도 그것이다. “우리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곧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기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중략) 그리고 우리에게는 거기에 맞춰서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지성이 있습니다.”(같은 책, 54쪽) 이 문장을 읽으며 약간의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찾아왔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인 나도 분명 나에게 가장 좋은 삶을 생각해 낼 수 있으며 곧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버내큘러한 삶! 우리는 학교에서, 아니 세상을 살아가며 이 태도를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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