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생명 의지'에 따를 것
사람들은 말한다. 아이를 키우는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이며 한 생명을 돌보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의문이 든다. 정말 내가 위대한 일을 하고 있나? 왜 이 시기가 소중하다는 거지? 아이가 36개월을 향해가는 지금, 아직도 내게 육아는 여전히 힘든 것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육아하는 것만으로 시간도 없고 체력도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올해는 감이당에 나와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굳이 이 (빡센)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나에게 공부가 무엇이길래? 나는 왜 공부할 수밖에 없는가?
반복되는 하루, 일상의 차이 만들기
2019년 11월. 코로나 등장 이후 어느 정도 잊고 지냈던 답답함이 다시 심해졌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가정 보육이 계속되었다. 이제는 정말 모든 관계가 끊어진 듯했다. 어딘가로 갈 수도 없었고 누군가 오지도 못했다. 하루하루가 똑같게만 느껴졌다. 아이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또 어떻게 지내야 하지?’라는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별일 아닌데도 쉽게 침울해졌다. 대책은 없는데 생각은 계속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일하시느라 와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서운해하고, 운전면허가 없어 어딘가를 가지 못하는 나를 탓하고 있었다. 더는 우울해지지 않을 탈출구가 필요했다.
기존의 관계가 거세되고, 자유로운 소통이 제한된 유배지에서 지식인들이 글쓰기에 몰두하게 되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건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관계를 향한 열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유배지에서 글쓰기는 고독과의 대화인 동시에, 이 영도에서 새로운 관계를 복원 혹은 재구성하려는 의지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채운 지음, 북드라망, 74쪽)
이옥은 10여 년 정도 유배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글을 썼다. 길에서 마주친 자연, 전해 들은 이야기, 거기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녹여낸다. 저자의 말처럼 이옥은 번번이 유배라는 상황을 망각한다. 철저히 현장에서 만나는 사건, 사람들에 집중했고 지루할 것 같은 시간을 “새로운 관계”들로 채워나갔다. 이옥의 글에는 어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되돌아가고 싶은 흔적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이옥의 글을 읽으며 어쩌면 내가 코로나가 터지기 이전 시기에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닌지 떠올려 보았다. 이미 시대는 바뀌었는데 시선은 계속해서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같이 육아하는 엄마들과 밥을 먹고, 친척 집에 가서 놀고, 연구실에도 편하게 드나들고... 사실 이런 마음은 지금을 더 힘들게만 할 뿐이었다. ‘힘들다’는 감정에 빠져 아이와 보내는 하루에 집중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니었을지.
유배지에서 이옥이 그랬듯, 마침 나도 무언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2~3일에 한 번씩 육아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짧게 쓰는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는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는 동안 엄마는 꼭 멀리 가지 말고 앞에 앉아있으라고 한다. 가끔 문지방에 앉아서 파이팅하라고도 한다. 어제는 힘주는 아이 옆에 서 있었더니 갑자기 내 다리를 쓰다듬는다.
"리오 뭐 하는 거야?" / "엄마 ‘예쁘다~ 예쁘다~’ 하는 거야?" / "왜?" / "밥 잘 먹어서" (4월 2일, 일기)
예상치 못한 아이의 대답에 빵 터진다. 어제는 분명 안 하던 말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말도 하네? 매니저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아이는 늘 새로워지는데 왜 소민 샘은 똑같이 느껴요?” 아이는 정말 매일 집에 있어도 같은 블록을 가지고 놀아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날의 날씨, 먹는 음식, 만나는 사람, 나누었던 대화 등등 하루에도 미세하게 차이는 존재한다. 동일하게 느껴지는 하루 속에서 차이를 포착하기! 이것이 육아라는 현장에 집중하고 아이와 나, 또 일상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충만한 생명 의지를 따르라
육아를 시작하며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이의 등장 이후로 집안일은 배로 늘어난 것에 비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줄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잠이 든 소중한 시간을 쇼핑하거나, 남편과 다투거나, 인터넷 기사를 보는데 다 써버렸더니 너무나 피곤했다. 그렇다면 언제 하루를 편안하게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가? 쇼핑에 좀 덜 홀렸을 때, 남편과 잘 지냈을 때, 틈틈이 운동했을 때, 책을 읽다가 어떤 깨달은(?) 느낌이 왔을 때 등이다.
혜환은 마음의 이치를 따르면 된다고 한다. 정말 하고 싶은가, 행할 때 마음이 편안한가를 묻고 따져야 한다. ... 오직 나의 충만한 생명 의지를 따를 것. 이것이 혜환이 글을 쓰는 이유이자 글을 쓰는 방법이었다. (『18세기 조선의 백수지성 탐사』, 길진숙 지음, 북드라망, 173쪽)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하루는 “나의 충만한 생명 의지”를 따르며 행위 했을 때였던 것 같다. 혜환의 다른 글 「환아잠」에 의하면 “처음의 나는 순수한 천리의 본성 그 자체”였다고 한다. 하지만 점차 지각이 생겨나면서 본성이 어지러워지고 여러 성인을 따르다 결국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혜환. 나 또한 이제껏 쌓아온 습관화된 마음들이 본성과는 멀어지게 행동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몇 달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 확언을 쓰고 그 아래로 해야 할 일을 적기 시작했다. 확언은 ‘오늘 어떤 하루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 한 마디로 적는 것이다. 그 아래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할 일을 정리한다. 다이어리를 쓰기 전까지는 화가 나면 나는 대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싶은 대로 즉, 욕망이 흐르는 대로 지냈다면 이제는 하루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살아가는 느낌이다. 하루를 꾸려나가는 기준은 나의 “생명 의지”다. 습관화된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내 생명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다이어리를 쓰며 일상을 조율한다.
글을 쓰다 보니 아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즐겁게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혜환이 말하는 “태어난 그대로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듯하다. 장자(莊子)는 말한다. 어린아이는 “집착하는 대상이 밖에 있지 않”(고미숙, 『읽.쓴.거.통』, 40쪽)다고. 정말 그랬다. 아이에게는 눈앞에 있는 음식이 최고이고, 지금 가지고 노는 장난감 이외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늘 어린이집에서 같이 논 친구가 제일 친한 친구였다. 나는 여전히 설거지하며 낭송을 무사히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고, 아이와 놀면서도 내일 아침 메뉴를 고민한다. 늘 집착의 대상이 바깥에 있다. 그 시선을 ‘지금, 여기’로 돌리는 것이 곧, ‘나’의 생명 의지를 따르는 시작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글을 마무리하며 나에게 공부란 무엇인지 다시 떠올려본다. 문득,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하는 것이 마치 수세미로 더러워진 싱크대 망을 닦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하수구의 때는 방심한 사이 시꺼멓게 채워진다.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했더니 방법은 하나였다. 매일 닦는 것뿐! 내게 공부는 이와 같다. 그날그날 쌓인 욕심과 감정들을 덜어내고 무리해서 굳어진 몸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본성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아이처럼 매일 매일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글_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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