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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스스로를 존중하는 연습, 마음챙김』지은이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2. 4. 7.

『스스로를 존중하는 연습, 마음챙김』 지은이 인터뷰

 



1. 마음챙김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스스로를 존중하는 연습이 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인지된 사건들은 기억정보를 바탕으로 무의식 층이 만들어 준 이미지를 의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억된 정보는 학습과 환경 등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으므로,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사실에 기반하지 않을 확률도 아주 높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 탓으로 여기는 것이 잘못된 학습 등에 의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속이면서도, 그 결과를 합리화시키면서 탓하는 습관을 강화해 온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챙김이 필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힘을 빼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챙김을 하다 보면, 익숙한 이미지가 변하기도 하고 일상에서는 경험하지 않았던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을 경험했다는 것은 만들어진 허구의 이미지에 속지 않을 단초를 마련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결코 자기 탓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탓하면서 지지 않아도 될 짐을 지고 있는 것이 보일 것이고, 그것으로 아파했을 자신을 안아줄 수 있게 되면, 어려운 길을 헤쳐 온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요.


2. ‘자기극복’이라고 하면 억지로 참고 이겨내는 것이 연상됩니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과 ‘자기극복’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자기 극복이란 틀린 전제로 자신을 보는 안목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의 근거를 반조해 보는 학습과 마음챙김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왜 『금강경』의 사구게를 생각 생각으로 익히는 것이 온갖 보배를 보시하는 것보다 그 공덕이 더 크냐”고 물었습니다.


『금강경』의 사구게 가운데는 ‘부처를 보려고 하고, 부처의 법문을 들으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게송이 있는데, 그 게송을 제 나름대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를 보려 하는가
어쩌지 부처는 형색이 없는데
법문을 들으려 하는가
어쩐다 부처는 법문을 한 적이 없는데
허니, 보고 들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게나
그 마음이 확 빠져나가면
보이는 것마다 부처요
들리는 것마다 부처의 법문


이 사구게가 뜻하는 내용은 그대의 빈 마음인 다보여래가 온갖 부처를 빚으면서 법문의 비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허니, 『금강경』 사구게를 생각 생각으로 이어 가다 자신의 다보여래를 만나게 된다면 그 공덕은 비할 데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기를 보는 (그릇된) 전제가 확 빠져나갈 때 생각과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자신을 존중하는 일을 하는 것과 같으리니, 틈틈이 그냥 알아차리는 연습인 마음을 챙기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요.


3. “불교에서는 인지네트워크가 취하고 있는 해석의 경향성을 업이라고” 한다 하시면서 그렇기에 업은 변한다고 하셨습니다. 흔히 업은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어째서 업이 ‘해석의 경향성’이며 변할 수 있는 것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조금 과하게 이야기하면 의식은 무의식 층이 만들어 준 원고를 읽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익혀 온 습관이 의식의 내용을 규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보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업의 양상이 정해진 것처럼 보입니다.
업이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활동이면서 그 활동이 인지의 네트워크에 남긴 힘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정해진 것처럼 작용하고 있는 것은 체화된 무위, 곧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커진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힘이 수용된 정보를 해석하면서 익숙한 생각길을 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배우고 익혔는가를 알아차리는 것이 업을 조율할 수 있는 공능을 익히는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연후 팔정도를 배우고 익히다 보면 익혀진 무위의 굳은살이 물러지면서 집착하지 않는 무위의 공능이 커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리는 힘이 커져 간 만큼 만들어진 이미지에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4. “불교에서의 공부와 글쓰기는 자신과 타인을 온전히 존중하는 마음의 역량을 기르고, 그런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공부와 글쓰기 중 특히 글쓰기가 어떻게 타인을 온전히 존중하는 마음의 역량을 기르는 것과 연결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절에서는 참선이나 염불정진은 말할 것도 없고, 청소도, 밭일도, 불 때는 일도 수행이라고 합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고요. 수행이란 무엇일까요? 늘려 이야기하자면 팔만대장경이 될 것이고, 줄이면 욕망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마음씀을 체화하는 일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잘하려는 욕망이 앞서, 일만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습관을 키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바람 없이 그냥 청소 등을 하는 마음씀이 빈 마음을 체화하는 수행이 되고 (그냥 자신의 마음흐름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듯 누군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쓰는 글쓰기가 수행이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익힌 마음씀이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면, 내재된 타인의 시선에 의해 들뜨지 않게 되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 마음씀이 익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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