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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내인생의주역 시즌2

[내인생의주역시즌2] 연애의 쓴 맛, 건너뛰지 말자

by 북드라망 2022. 3. 16.

연애의 쓴 맛, 건너뛰지 말자

 

澤山 咸   ䷞
咸, 亨, 利貞, 取女吉.

함괘는 형통하니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이롭고, 여자에게 장가들면 길하다.

初六, 咸其拇.

초육효, 엄지발가락에서 감응한다.

六二, 咸其腓, 凶, 居吉.

육이효, 장딴지에서 감응하면 흉하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길하다.

九三, 咸其股, 執其隨, 往吝.

구삼효, 넓적다리에서 감응한다. 지키는 바가 상육을 따름이니 나아가면 부끄럽다.

九四, 貞吉, 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구사효,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길하여 후회가 없어진다. 초육에게 왕래하기를 끊임없이 하면 친한 벗만이 너의 생각을 따를 것이다.

九五, 咸其脢, 无悔

구오효, 등에서 감응하니 후회가 없으리라.

上六, 咸其輔頰舌

상육효, 광대뼈와 뺨과 혀에서 감응한다.


주역은 크게 두 세계로 나뉜다. 만물의 생겨남과 그 이치를 그린 상경30괘는 형이상의 세계요, 인간세계의 복잡다단한 질서를 그린 하경 34괘는 형이하의 세계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나는 아직도 구분을 잘 못하겠다. 그래도 두 세계가 어떻게 열리는지에 관해서는 그 상징성이 뚜렷이 대비되는데, 바로 상경이 만물의 근본(萬物之本)인 하늘(乾)과 땅(坤)으로 시작했다면, 하경은 “남자와 여자가 교감하는 것을 상징하는 함(咸)괘로 시작해서 관계의 지속을 의미하는 항(恒)괘로”(『주역』, 정이천주해,p.631)이어지는 것이다. 남녀합일과 지속이라… 왠지 익숙하다. 결혼해서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지지고 볶고 살라는 진부한 주례사가 ‘인간세상의 시작을 열어라~’라는 말이었단 말인가. 정이천에 따르면 남녀가 교감해야 부부가 되고 부부가 있어야만 자식이 생길거고, 형제간 부자간의 위계질서가 잡혔을 때 위아래의 예가 서게 된다. 이런 이치가 바깥으로 확장되어 군신의 관계까지 성립하는 것이니 천하의 모든 도리가 부부(남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함(咸)은 느낀다는 감(感)의 뜻이다. 남자와 여자는 별개의 존재이고 그 둘이 계속 별개인 한,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 별개의 존재를 이어주는 뭔가가 있어야만 둘이 가까워지고, 그 사이에서 세계의 생성이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하경의 시작을 여는 괘가 바로 ‘느낌(感)’, ‘끌림’인 것이다. 요컨대 함괘는 우리의 유전자가 온 관심을 쏟는 이성에의 끌림, 바로 남녀간의 ‘사랑’에 관해 논하고 있는 괘라고 할 수 있다.

 

 

짝짓기의 괘이기에 모든 효는 정응관계로 자기의 짝에 감응한다. 여섯 남녀, 세 커플의 상이다. 공자는 단전에서 이 끌림의 순간을 포착하여 말하고 있다. 음양의 두 기운이 감응으로 함께 하는데 딱 멈춰서 찌릿!(二氣感應以相與 止而說)한다고. 세상이 멈춘 것 같고 가슴은 기쁨으로 콩닥콩닥한 상태다. 공자님은 뭘 좀 아시는 분이다.

남녀관계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자니 온갖 흑역사가 머리를 스쳐간다. 나의 뻘짓, 남의 삽질, 흥분과 콩깍지에 몸이 달았던 젊은 시절이었건만 그런 끌림이 온전히 상대와의 연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마음이 간절해도 상대와 못 만나면 함괘에선 ‘흉’이다. 그래서 그 수많은 헛발질들은 육이효의 ‘흉’이라는 한 글자에 걸려든다고 할 수 있다.

육이효는 신체 부위 중 장딴지를 빌어서 교감을 얘기하는데, ‘장딴지에서 감응하면 흉하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길하다(咸其腓, 凶, 居吉)고 한다. 대체 장딴지에서의 감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움직임의 매커니즘을 말한다. 몸이 나아가려고 할 때 다리를 움직여야 걸음을 걸을 수가 있다. 그런데 “걸으려 하면 가장 먼저 장딴지가 움찔하면서 움직이고, 발은 그때서야 들리니”, 비(腓)에서의 감응이란 “자신의 도를 지키면서 윗사람이 구하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조급하게 행동하는 경거망동을 일컫는 것이다. 결국 교감의 속도조절에 실패한 것.

연애의 핵심은 속도조절이다. 영어로는 ‘타이밍’, 전문용어로 ‘밀당’이다. 그러니 짝짓기의 성패를 가르는 고백의 타이밍을 그토록 가슴 졸이며 재는 것이 아닌가. 대학시절의 일이다. 어느 날 술을 마시고 2차로 노래방을 갔다. 모두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있을 때, 한 선배가 노래를 고르고 있는 내게 어둠을 틈타 기습 키스를 했다. 그 순간은 당황해서 화를 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다음 날 멀쩡한 정신으로 찾아가서 사과하라고 따졌다. 그랬더니 사과를 안 하겠단다. ‘선배, 나 좋아해요?’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짓을 하고 사과도 안 한다니, 뭐지? 분노한 나는 여자 동기들의 공분을 모은 후 함께 대자보를 써서 과방에 붙였다. 작은 파란이 일었지만 사과는 못 받고 그냥 덮였다.

그런데 얼마 후, 이번에는 어떤 여자선배가 내게 찾아와서 그 남자선배에게 확실히 거절을 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일이 있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더니 그녀가 하는 말이, 자기가 그 남자를 좋아하는데, 그 남자는 나를 좋아한다며 거절했다는 거였다. 헐~ 이후 들려오는 풍문은 나와 상관없이 삼각관계의 형국이 되어버렸다.

그 남자선배는 이후 내게 고백도 하고 쫓아다니기도 하면서 구애를 했지만, 나는 이미 그 선배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안 좋아진 후였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선배는 내게 호감을 느끼다가 몸부터 먼저 들이대는 경거망동을 한 것인데, 그 이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 경거망동은 ‘거친 대시’가 아니라 ‘성추행’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를 좋아해서 그랬냐고 물었을 때, 어쩌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 자기도 아직 고백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였기에 얼렁뚱땅 넘겼었나보다. 그러니까, 발도 움직이기 전에 장딴지의 불끈한 상태에서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그럼 함괘가 제시하는 감응의 방법은 뭘까? 우선, 음양의 감응을 말하는 함괘에서 2의 자리는 상대와 속도를 맞추는 것에서 길흉이 갈린다. 길(吉)의 조건은 자기 자리에서 기다리는(居) 것이다. 어떤 욕망이 일었을 때, 앞 뒤 재지도 않고 훅~ 나가려는 마음을 다잡아넣고 상대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거(居)의 의미다. 또, 함괘의 괘상을 위·아래로 나누어 보면 어느 집 셋째아들(艮卦)이 다른 집의 셋째딸(兌卦)에게 몸을 낮추고 있는 상이다. 男下女, ‘남자가 여자에게 낮춘다’는 것은 상대를 대하는 지극함이고, 끌림의 때에 남자의 적극성이 발휘되는 모습인 것이다. 사실 이건 누군가에게 끌리고 다가서려는 사람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취해야 할 태도다. 감응은 반드시 상대의 마음을 얻어야만 음양의 짝이 맺어지기에 자기만의 느낌에 아무리 충실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 여자선배의 경우도 결국 남자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애먼 후배를 붙들고서 ‘내 남자 건드리지 마’ 수준의 하이틴 드라마를 연출하다니, 그렇게 조급한 태도에 상대의 마음이 열리겠는가.

 


물론 자기를 낮추고 상대의 마음이 열리길 기다린다고 해서 꼭 그 사랑이 이루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타이밍만큼 중요한 것이 또 개인의 취향이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하(下)하고 거(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소중하게 지키던 자아가 깨지고 성숙해지는 경험을 한다. 어른이 되어간다. 상전(象傳)에서는 성인이 함괘를 보고 ‘허수인’(虛受人)한다고 했다. 끌림의 괘는 자기를 비워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서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에만 급급하지 않고, 오히려 그 욕망으로 꽉 찬 마음을 상대를 위해 비워낼 수 있는 힘이 진정 아름다운 감응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 선배들의 소식은 전혀 모르지만 각자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며 앞 뒤 안 재고 동동거리던 그들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 당시는 유치하다고 여겼던 그 간절한 마음들이, 아니 장딴지가 전해져 온다. 이제야 감응한건가?^^

주역의 모든 길흉이 그렇겠지만 나는 사랑에 있어서 겪을 수 있는 수많은 ‘흉’함은 흉에서만 그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장딴지에서 감응하는 조급함과 망동은 자기를 잃어버리는(躁妄自失) 흉이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과 자기를 비우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만, 흉과 길이 육이효에 함께 있듯이, 수없는 헛발질을 반복하다가 상대의 마음에 감응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도 있을 터이다. 쓴맛을 봐야 정신 차리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함괘의 육이효의 ‘흉’을 보면 두렵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삶의 색채를 짙게 만들어주는 인생의 쓴 맛으로 보인다. 게다가 주역은 일단 감응하면 다음 괘로 넘어가 항(恒)구히(!) 지지고 볶고 살으라고 하니, 함괘의 흉은 청년들의 특권이니 건너뛰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글_김희진(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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