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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내인생의주역 시즌2

[내인생의주역시즌2] 절뚝거릴 땐 멈추고 성찰하는 게 능력

by 북드라망 2022. 6. 16.

절뚝거릴 땐 멈추고 성찰하는 게 능력

 

水山 蹇   ䷦
蹇, 利西南, 不利東北, 利見大人, 貞吉.
건괘는 서남쪽이 이롭고 동북쪽은 이롭지 않으며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로우니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길하다.

初六, 往蹇, 來譽.
초육효, 나아가면 어렵고 제자리로 돌아오면 영예가 있다.

六二, 王臣蹇蹇 匪躬之故.
육이효, 왕의 신하가 고난 속에서 더욱 어려운 것이니 이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九三, 往蹇, 來反.
구삼효, 나아가면 어렵고 오면 제자리로 돌아오리라.

六四, 往蹇, 來連.
육사효, 나아가면 어렵고 제자리로 오면 아래의 효들과 연대한다.

九五, 大蹇, 朋來.
구오효, 큰 어려움에 처하여 동지들이 온다.

上六, 往蹇, 來碩 吉, 利見大人.
상육효, 나아가면 어렵고 돌아오면 여유로워 길하리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왕후장상이라도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인생의 부침이 있기 마련. 주역 64괘 중엔 인간이 삶에서 겪는 어려움을 말하는 4대 난(難)괘가 있다. 시작할 때의 혼돈과 어려움인 둔(屯)괘, 역량이 부족한 곤(困)괘, 잇단 위험이 중복된 감(坎)괘 그리고 어려운 상황과 장애를 만난 건(蹇)괘다. 이 중에서도 건괘는 앞으로는 험난한 물이요 뒤로는 산이 버티고 있어 멈춰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한창 일이 진행되고 있는데 다리를 절뚝거리는(足) 딱한 모습이다. 이게 상상만 해도 곤란한 상황인데 몇 달 전부터 오래 전 다쳤던 왼쪽 다리가 안 좋아져서 이따금 절뚝거리고 있는 요즘 내 모습이 다리를 저는 건괘의 상황 그대로다. 주역 64괘는 심오한 상징으로 그 안에 함축된 철학과 지혜를 탐구하는데 상징이 문자 그대로 현실이 될 수도 있다니, 쩝!

나의 왼쪽 다리가 수난을 겪은 역사는 아주 오래다. 10살 무렵 뼈가 부러진 것을 시작으로 20대에는 자그마치 3번이나 다쳐 고생을 했다. 눈 덮인 산 위에서 발을 헛디뎌 다리를 다쳤는데 함께 있던 친구들에게 괜찮다고 끝까지 같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퉁퉁 부은 다리를 치료하느라 오랜 기간 고생을 했었다. 그런가 하면 직장을 다닐 땐 회사 워크숍에서 야외 활동 중 부상을 당했는데 회복되고 1년쯤 지나 사소하게 미끄러지는 실수로 이번엔 인대가 아예 파열돼버리고 말았다. 20여 년 전엔 인대복원 수술이 위험도가 높아 의사는 일단 급한 대로 부서진 연골만 제거하고, 인대는 나중에 의술이 더 개발되면 하는 것이 좋겠다며 한동안 재활을 꾸준히 하고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이후 의사가 수술을 권유했을 땐 일상생활에 큰 무리가 없어 수술을 하지 않고 재활운동을 하며 조심조심 살기로 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그동안 느슨하게나마 해오던 운동을 못 해서인지 다리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급기야 몇 달 전엔 책상에서 일어나 움직이려는 데 순간 무릎에 힘을 줄 수 없는 어이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해야 할 일, 돌봐야 할 일이 잔뜩인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난의 상황에 닥친 건괘의 효들은 거의 대부분 ‘나아가면 어렵고 (往蹇) 돌아오면(來) 어떻다’는 일관된 표현을 하고 있다. 수산건은 외괘가 험난한 물이고 내괘는 멈춤의 산이니 무턱대고 앞으로 돌진하면 안 되고 ‘아, 가면 위험하구나!’를 판단해서 멈추고 돌아와야 한다. 작전상 일단 후퇴란 의미다. 따라서 초효처럼 기미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발길을 돌리면 좋겠지만 하괘의 위에 있는 구삼은 추진력도 있겠다, 정응하는 상육과도 코드가 맞으니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무턱대고 가면 위험을 감당할 수 없으리란 걸 알기에 제자리로 돌아온다. (往蹇,來反) 어려움을 어려움이라고 판단하고 물러설 수 있는 것은 큰 지혜다. 강물이 시커멓게 넘실대는데 저 건너 급한 볼일이 있으니 강을 건너겠다고 서두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길을 가다 다리를 절게 되면 일단 멈춰서 상황을 단도리 해야지 마음이 바쁘다고 뛸 수는 없는 법.

험난함이 닥쳐도 어리석은 자는 사사로운 욕망으로 위험을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멈추지 못한다. 왜 그럴까? 자신의 욕망과 습관대로 반복하던 생각과 행위를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한쪽 다리가 아프고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다는 건 험난함을 예고하는 신호다. 만약 상태가 악화되어 수술을 피할 수 없게 된다면 그건 아주 큰 곤란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척추 마취를 해야 하는 큰 수술도 부담이지만 온전히 회복을 하려면 적어도 1년은 고생하고 재활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운동으로 다리의 근력을 유지하면서 불안정한 무릎을 보호할 수 있다면 수술을 유보해보자고 의사가 마지막으로 조언을 준 것이 6년 전이었다. 하여 그동안 그런대로 조금씩 운동을 하며 근근이 버텨왔는데 코로나 상황으로 운동 시설이 문 닫은 이후로는 전혀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도 핑계일 뿐 실은 공부와 다른 일들이 더 중요하다며 몸을 챙기는 걸 뒷전으로 미룬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릎은 언젠가부터 신호를 보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주 꺾이고 돌아가고 자세를 변경할 때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에고, 이놈의 무릎이야!” 하고 한숨 쉬는 꼬부랑 할머니가 따로 없었다.

건괘는 위험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후회하니 위험을 감지하면 멈추라고 한다. 일단 멈춰야 방향을 전환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구삼의 ‘래반(來反)’도 가능하다. 공자는 험난함을 보고 멈출 수 있는 것은 능력이자 지혜라고 했다. (見險而能止 知矣哉)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래반’이란 돌아가는 단순한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는지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함으로써 덕을 닦는 반신수덕(反身修德)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멈춤과 성찰이 요구되는 때인 것이다. 아, 그런데 나는 딱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프고 힘든 상황에 처해도 모든 것을 차질없이 해내는 것이 중요하고 그게 능력이라고 말이다. 건괘는 내게 그건 유능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무능함이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다리를 다쳤을 때마다 상황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기보다 부인하고 비켜가고자 했던 것 같다. 갑자기 다친 상황을 반가워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나는 다친 통증이 그렇게 못 견딜 수준이 아니면 걱정스러워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했다. 시간을 맞추기 힘든 친구들과 모처럼 어렵게 여행을 갔는데 운전을 해야 하는 내가 다쳐서 전체 계획이 어긋나는 게 싫었고, 한창 바쁜 시기에 손을 보태도 모자랄 판에 절뚝거리며 회사에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겐 몸의 아픈 상태를 돌보는 것보다도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남는 게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그렇게 애써 상황을 부인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 것은 결론적으로 치료를 더디게 해 고통만 가중시키고 말았다.

건괘의 괘사는 고난의 시기엔 동북쪽을 피해 서남쪽을 가라고 한다. 춥고 험난한 동북쪽과 달리 서남쪽은 따뜻하고 평평해서 걸음을 걷기에 편안한 곳이다. 그러니까 어려울 땐 감당하기 쉬운 곳으로 가서 순리에 따라 처신하라는 의미다. 이번에도 애초에 아픈 위험이 감지되었으면 멈추고 무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일상을 점검하며 어디에서 무엇이 무리가 되길래 이런 상황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삶의 리듬을 살폈어야 한다. 그런데 왜 나는 아픈데도 불구하고 괜찮은 척, 해야 할 공부와 집안일, 병이 있는 어르신을 챙기고 심지어 약속한 자원봉사 일까지도 빠짐없이 다 해내려고 했던 걸까? 그건 물론 맡은 일과 약속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픈데도 참으면서 역할과 책임을 모두 다 잘 해내고 싶다는 욕망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었던 걸까?

곰곰이 들여다보니 나는 내가 남을 도와줄 수는 있어도 뭔가 나의 처지를 변명해야 하고 도움을 받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그건 도움을 받는데 서투른 것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도움을 베푸는 자, 책임을 다하는 자의 이미지로 견고히 하려는 오만함이 아니었을까? 삶에는 언제나 변화가 있기 마련이고 조건이 바뀌면 그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여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려 도움을 청할 것은 청해야 한다. 어려움을 무시하고 혼자 나아가겠다는 건 무모하다. 구삼도 양강한 힘을 쓰던 방식으로 계속 나아가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삼은 멈추고 ‘래반’함으로써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이켜 성찰한다.

 

다시 절뚝거리는 나 자신을 본다. 나빠진 다리 상태를 예전처럼 부인하고 어떻게든 봉합해 보려던 내게 이번엔 상황이 여의치 않다. 코로나 때문에 반년을 기다려 만난 의사는 일단 무릎이 매우 불안정하니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그사이 치료와 재활운동을 통해 상태가 호전되는지 보며 수술을 결정하자고 한다. 주역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통과하는 건(蹇)의 시기엔 반드시 멈추어 자신을 성찰하고 올바름을 지킴으로써 곤란에서 벗어나라는 지혜를 알려준다. 지금 나의 상황에서 성찰하며 올바름을 지킨다는 건 뭘까? 그건 아픈 몸을 대하는 나의 잘못된 태도를 돌아보고 일상을 점검하고 몸을 보살피며 몸과의 관계를 다시금 정립하는 게 아닐까? 그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구삼의 미덕이 아닐까? 주역에서 어려움의 때와 작용이 위대하다(蹇之時用大矣哉)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렇게 닥친 어려움을 통해 지혜를 훈련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절뚝거리는 다리가 나 스스로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건괘의 공부가 시작이다.

 

 

글_이윤지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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