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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내인생의주역 시즌2

[내인생의주역시즌2] 나의 ‘기쁜’ 여드름 분투기

by 북드라망 2022. 3. 2.

나의 ‘기쁜’ 여드름 분투기

 

 

雷地 豫   ䷏
豫, 利建侯行師.

예괘는 제후를 세우고 군사를 움직이는 것이 이롭다.

初六, 鳴豫, 凶.

초육표, 기쁨을 드러내어 울리니 흉하다.

六二, 介于石, 不終日, 貞吉.

육이효, 절개가 돌과 같이 굳세어 하루 종일 기쁨에 취해 있지 않고 떠나가니 올바르고 길하다.

六三, 盱豫, 悔, 遲, 有悔.

육삼효, 위에 있는 구사효를 올려다보며 기뻐하니 후회가 있고, 머뭇거리며 지체하여도 후회하리라.

九四, 由豫, 大有得, 勿疑, 朋, 盍簪.

구사효, 기쁨이 구사효로 인해 말미암는 것이니 크게 얻음이 있다. 의심하지 않으면 어찌 벗들이 모여들지 않겠는가.

六五, 貞, 疾, 恒不死.

육오효, 바른 자리에 있으나 질병이 있어서 항상 앓고 있으면서도 죽지 않는다.

上六, 冥豫, 成, 有渝, 无咎.

상육효, 기쁨에 빠져 어두워졌으나 바꿀 수 있으면 허물이 없다.


“근데 너 피부는 왜 그런 거야?”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아, 피부가 또 엉망인가 보네. 내 피부는 종종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만들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 턱과 코언저리를 벌겋게 물들이고, 염증 반응도 심한 내 피부는 나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중학교 때 이마부터 갑자기 시작된 노란 염증들이 점점 온 얼굴을 덮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여드름과 끔찍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내년이면 서른이니, 무려 15년 이상의 세월을 함께 한 셈이다. 속에서는 단단하게 곪아 통풍마냥 저릿하게 아프고, 바깥에서는 피고름이 터져나가는 악순환. 학기마다 반 아이들이 서로 돌리는 롤링페이퍼에는 내 피부에 대한 비하와 혐오가 빠짐없이 담겨 있었고, 부모님은 도대체 연유를 알 수가 없는 딸내미의 얼굴 상태에 대해 발을 동동거리며 너무나 속상해하셨다. 기쁨을 상징하는 뇌지예 괘를 설명하는데 기쁨과 가장 멀어 보이는 여드름 분투기를 서두부터 늘어놓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육오효 또한 나처럼 오랜 병을 앓고 있는 군주이기 때문이다.

뇌지예 괘의 육오 군주는 정질(貞疾)을 앓고 있다. 이 정질이라는 단어가 아주 의미심장한데, 정(貞)을 ‘바르다’라고 해석한다면 “바른 자리에 있었는데도 병을 앓는다”가 되고, 또 정(貞)의 다른 의미인 ‘오래 되다’라고 해석한다면 “오랜 지병”이 된다. 어느 쪽의 해석을 선택하든지 이 두 가지 의미는 병이 가진 특징을 상당히 축약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바르게 살아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병이라는 것, 또 병은 종종 긴 세월을 함께하는 무엇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나의 정질(貞疾)이 바로 여드름이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항상 내 피부에 대해 지독한 좌절감을 품고 있었는데, 늘 담배를 피우고 패스트푸드로 배를 채우며 밤을 새고 만성 변비에 시달리는 같은 반 친구들의 피부는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내가 얼마나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건강한 식단으로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데? 이 망할 피부 놈아! 정말 억울하고 분했다. 다른 괘의 위엄있는 오효들과 달리 침상에 드러누워 끙끙 앓아야 하는 뇌지예 괘의 오효 군주 또한 나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지.

 


육오효는 강한 양을 타고 있는 음효라서 아프다(乘剛也). 주역에서는 강한 양효를 아래에 끼고 있는 음효가 위태롭다고 지적하는 상전 해설을 종종 볼 수 있다. 강건하고 불뚝거리는 양(陽)의 기운에 올라탄 유약한 음(陰)은 마치 제어할 수 없는 사나운 말에 올라탄 초보 기수마냥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다. 성장기의 날뛰는 호르몬 사이클에 올라탔다는 것을 명징하게 증명하듯 첫 월경이 터지고 훅 찾아 들어온 나의 피부질환은 육오 군주의 막막한 상황과 겹친다. 늘 붉게 달아올라 뜨끈한 열감을 사시사철 품고 있던 피부, 어디 한 군데 성한 곳 없이 돋아나 있던 농증. 손바닥을 스치는 얼굴의 모든 부분이 아파서 세수하다 말고 끅끅거리며 울었던 어느 날의 아침이 아직도 기억난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농이 매번 다른 부위에 솟아있고 다시 통증이 시작되는 날의 연속이었다. 나는 도통 어찌할 수 없는 이 예측 불가능한 피부가 참으로 당황스러웠고 또 부끄러웠다. 이렇게 남들은 결코 모를 속앓이를 감내하며 사춘기 시절을 울며불며 통과해야만 했다. 이토록 기약 없는 답답함을 견뎌야 하는 것이 정질을 안고 가는 모든 사람의 괴로움이다.

그렇다면 이 군주는 이렇게 맨날천날 끙끙 앓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일까? 정질의 육오 군주가 지닌 미덕은 항불사(恒不死), 항상 앓지만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병을 품은 삶을 감내하는 육오의 미덕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결론을 낼 수 있겠지만, 뇌지예의 전체 맥락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뇌지예 괘는 땅(地) 위에 천둥(雷)이 울려퍼지는 모습인데, 천둥은 하늘의 목소리 혹은 메시지를 상징하고, 땅은 그 목소리를 듣고 기쁘게 순종한다. 이렇게 위아래가 착착 스텝이 맞아 들어가기 때문에 예괘는 기쁨을 나타낸다. 이 기쁠 예(豫)자가 독특한 것이, 기뻐하다는 뜻과 함께 “미리”라는 뜻 또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리 방비하는 것, 선수 쳐서 미리 뭔가를 한다는 행동을 나타내는데 상당히 흥미롭다. 단순히 동음이의어로 연결된 우연한 조합이 아니라 미리 예비한다는 것과 기쁨이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촉이 온다. 이 두 가지를 연결한다면 오랜 병을 앓는 이들이 얻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던 정질은 무엇을 미리 준비하게 했을까? 아무리 아파도 죽지 않는 군주는 어떻게 기뻐할 수 있으려나?

오롯이 고통만을 줬다고 생각했던 여드름이 내게 안겨준 색다른 인연이 하나 떠오른다. 해외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나는 다른 삶의 길을 모색하며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싶다는 야망에 부풀어 올랐던 청년이었지만, 여전히 피부에 대한 자신 없음과 남들이 혹시 불쾌감을 느낄까 전전긍긍하는 태도를 완전히 떨치기는 어려웠다. 먼 이국땅에 도착한 첫날, 낯을 많이 가리고 말도 별로 없던 내게 어떤 언니가 먼저 다가왔다. 언니가 내게 던진 말은 이랬다. “나 여드름 짜는 거 완전 좋아하는데… 혹시 괜찮다면 내가 짜 줘도 될까?” 이게 무슨…? 나는 벙쪄서 그 언니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지만 언니는 진심이었다. 그 날 나는 흥분한(?) 언니의 손길에 내 얼굴을 맡겼고, 언니는 신나게 고름을 짜고 약을 발라주고 패치를 붙여줬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내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엄청 웃고 많은 수다를 떨었던 날이었다. 여드름을 소재 삼아 웃을 수 있다니. 알고 보니 그 언니 또한 앓고 있던 정질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한 달에 한 번씩 거의 기절 수준의 통증을 동반하는 생리통! 이후로 언니는 종종 무료한 저녁 시간에 나를 무릎에 뉘어놓고 정성스레 여드름을 짜주었고, 나 또한 언니가 주기적으로 몸져누울 때마다 잔심부름과 보살핌으로 머리맡을 지키며 서로를 돌보고 우정을 쌓아나갔다. 미친 호르몬의 날뜀에 올라탄 승강(乘剛)의 청춘들이란!

그 언니와 함께했던 나날들은 ‘나만 왜 하필 아플까?’하는 억울함을 ‘우리는 모두 아픈 데가 하나씩은 있구나’하는 앎으로 변환시키게끔 만들었다. 이 지독한 정질이 비로소 색다르게 다가오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모든 이들이 정말 다양한 양태로 하나씩은 품고 있을 법한 것이 이 정질(貞疾)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앓고 있는 이 정질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나를 막는 혐오스러운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거쳐 갈 많은 인연들에게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미리 내게 주어진 어떤 공통 감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병과 몸에 대한 이야기만큼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것도,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것도 드물다. 병을 앓는 예괘의 군주가 경험할 수 있는 소박하고 잔잔한 기쁨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 터다.

 


뇌지예 괘의 오효에 앉은 아픈 군주를 보며 병이 정말 기쁨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병이 억울함과 분노가 아니라 기쁨의 가능성으로 와닿을 수 있었던 순간은 나의 병이 하나의 채널로, 소통의 방식으로 치환되었을 때였다. 매일의 피부는 변함없이 아팠고, 언니가 아픈 걸 보는 것도 속상했지만, 서로를 웃게 하고 깊이 교감할 수 있는 기쁨을 만들어준 것 또한 바로 언니와 나의 병이었다. 인턴 과정을 모두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 나에게 가족을 비롯한 주위의 모든 이들이 “너 되게 발랄해졌다.”라고 말해줬는데, 그 비법은 사귐에 있어서 나의 약점이 소통의 베이스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언니와의 우정을 통해 절절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내가 살면서 겪었던 가장 기쁜 변화 중에 하나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요소들로 인해 연결되고 서로를 알게 되고 또 친해진다는 것,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제일 괴롭고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조차도 어떤 인연장에서는 소중한 공감의 산물이 된다. 그래서 온갖 정질들이 닥쳐올 우리네 삶은 결코 쉽게 죽지 않고 의연하게 껴안을 수 있는 새로움으로 변한다(貞, 疾, 恒不死). 여기에서 사귀고 연결되는 기쁨이 샘솟을 것이다. 여드름은 내게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청소년 시절을 잔인하게 할퀴고 지나갔으나, 이것을 단지 아픈 상흔으로만 남기지 않는 방법을 이제 나는 안다. 나의 병이 오로지 괴로움으로만 설정되는 상수가 아니라 기쁨 또한 도출해낼 수 있는 변수임을 알려준 새로운 방정식이 바로 뇌지예 괘다. 뇌지예 괘로 다시 써본 나의 여드름 분투기! 아니, 아주 ‘기쁜’ 나의 여드름 분투기!

 

글_오찬영(감이당 장자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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