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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내인생의주역 시즌2

[내인생의주역시즌2] 소축, 앎에 대한 믿음을 묻다

by 북드라망 2021. 8. 10.

소축, 앎에 대한 믿음을 묻다

 


風天 小畜   ䷈

小畜, 亨, 密雲不雨, 自我西郊.
소축괘는 형통하다. 구름이 빽빽한데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내가 서쪽 교외에서 왔기 때문이다.

初九, 復, 自道, 何其咎? 吉.
초구효, 도를 따라 돌아오니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길하다.

九二, 牽復, 吉.
구이효, 연결하여 회복함이니 길하다.

九三, 輿說輻, 夫妻反目.
구삼효, 수레에 바퀴살이 빠진 것이니 부부가 서로 반목하는 것이다.

六四, 有孚, 血去, 惕出, 无咎.
육사효, 진실한 믿음을 다하면 피 흘리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두려움에서 빠져나오니 허물이 없다.

九五, 有孚, 攣如, 富以其鄰.
구오효, 믿음이 있어서 여러 양들을 끌어당겨 함께하니 부유함으로써 그 이웃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上九, 旣雨旣處, 尙德, 載, 婦貞, 厲. 月幾望, 君子征, 凶.
상구효, 비가 오고 나서 그침은 덕을 숭상하여 가득 쌓인 것이니 부인이 이것을 계속 고수하면 위태롭다. 달이 보름에 가까워서 음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것이니, 군자가 움직이면 흉하리라.

 

“그래, 그래. 얘야. 하지만 저 발람의 당나귀는 늘 생각에 잠겨 있으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생각에 도달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사상을 쌓아 두는 거예요.” 이반은 빙그레 웃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상권,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이대우 역, 열린책들, 234쪽)


각자 떨어져 살던 세 아들이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아버지가 사는 고향 마을로 한꺼번에 돌아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출발점이다.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포착되는 이반의 대사가 아주 기묘하다. 사상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풍천소축 괘를 가지고 무엇을 쓸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내게, 이반이 지나가는 듯 뱉어낸 이 대사가 크게 확대되어 훅 다가온 것은 당연지사였다. 바람이 하늘 위에서 불고 있는 형상(風天)인 소축(小畜) 역시 쌓는다(畜)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쌓긴 쌓는데 앞에 소(小)자가 붙어서 ‘작은 것’을 쌓는다는 뜻이다. 대체 이 ‘작은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정이천의 설명에 따르면, “군자가 쌓는 것 가운데 작은 것으로는 문장(文章)과 예술(才藝)이, 큰 것으로는 도덕과 나라를 경륜하는 일이 있으며, 군자는 그 문덕을 아름답게 해야 하지만, 사실 문덕은 도의와 비교한다면 작은 것”(『주역』, 정이천 지음, 심의용 옮김, 글항아리, 244쪽)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문장과 예술은 군자가 마땅히 닦아나가야 할 학문과 공부, 지식과 교양 등을 이르는 것이다. 차가운 논리로 무장한 이지적 무신론자인 둘째 이반이 바로 이 문장과 예술을 겸비한 청년 논객이다. 그는 이미 탁월한 언변과 글로 학계를 휘어잡은 신세대 지성인이었다. 한마디로 ‘뇌섹남’이었던 셈이다. 이반에 비추어 문덕을 바라본다면 굳이 ‘작은 것’이라고 간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문덕은 도의보다 작다고 주역은 말하는 것인가? 작은 것을 쌓는 만큼 위태로움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풍천소축 괘의 유일한 음효인 육사효가 담고 있는 혈(血:피)과 척(惕:두려움)이 바로 소축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왜 하필 육사효가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 부딪치는 것일까? 풍천소축 괘의 괘상을 잘 살펴보면 네 번째 효 혼자만 음효다. 이 육사가 나머지 다섯 개 양효를 힘겹게 붙잡아서 쌓아두고 있기 때문에, ‘작은 것(음)이 큰 것(양)을 붙들고 제압하다’라는 소축의 뜻이 괘상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풍천소축 괘의 음효이니 당연히 문덕을 쌓은 상태이지만 위태롭다. 정이천은 이 다섯 양효들을 제지하는 한 음효의 위태로움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야생동물을 훈련시켜서 길들여 복종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양이란 야생성을 의미하고 소축이란 완전하게 길들여 복종시킬 수는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역』, 정이천 지음, 심의용 옮김, 글항아리, 256쪽) 이런, 그렇다면 다섯 효의 양은 보통 양효가 아니다. 그야말로 으르렁거리는 늑대 다섯 마리들인 것이다. 아래위로 다섯 늑대들의 목줄을 겨우겨우 붙잡고 진을 빼고 있는 외로운 음효가 눈앞에 그려진다. 그래도 육사효는 끝끝내 이 위태로움을 제압하고 혈과 척을 피하여 결국 무구를 얻는다.

도대체 여리디 여린 음효가 강한 양효 다섯 개를 혼자서 제압하는 상황이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유부(有孚), 믿음이다. 거꾸로 가정해보자. 만약 진실한 믿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문장과 예술을 갈고 닦아도 피 흘리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고 두려움에 빠져들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살해되고 모든 형제들이 두려움에 빠져드는 상황에 마주하게 되는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처럼. 그렇다고 해서 공부하지 말고 지식도 쌓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귀중한 앎을 쌓되 가장 필요한 유부의 마음을 절대 잊지 말 것을, 소축괘는 알려주고 있다. 이반에게 없었던 것이 바로 이 마음이었다. 육사효와는 반대로 그는 혈(아버지 살해)과 척(그로 인한 두려움)을 마주하게 되고 패닉 상태에서 도통 헤어나오질 못한다. 만약 이반이 주역점을 칠 줄 알았더라면, 특히 풍천소축 괘의 ‘유부’라는 교훈을 알고 있었더라면 아마 상황은 꽤나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 살해 사건 이후 던지는 질문은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가 아니다. 엉뚱하게도 그의 고뇌는 ‘믿음’과 관련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실재하는가? 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래서 육사효의 믿음이 무엇인지 이반을 대신해서 진지하게 탐구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친절한 정이천 선생은 이 유부의 마음에 대해 또 한 번 더 큰 힌트를 준다. “오직 진정한 믿음(孚)과 정성(誠)으로 그들(양효)에게 반응해야 감동시킬 수 있다”고. 어떤 믿음과 정성일까? 자신의 공부와 사상이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발현되어 그 현장에서 외부와 감응한 상태, 자연스럽게 남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지행합일이 된 상태를 이른다. 아직 이런 상황에 도달하지 못한 소축의 사상가 이반은 혈과 척의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수없이 많은 살인의 복선을 이미 감지했음에도 방관한 것, 그리고 사건이 터지자마자 공포에 휩싸이는 모습이 바로 그가 가진 앎의 한계를 증명한다. 그는 모든 종류의 믿음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회의론자이기에,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형을 변호하러 가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조차도 갈등하고 번민한다.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한 악마는 이반에게 다가와 교활하게 속삭인다. 너, 정말 선행을 ‘믿는’ 사람이냐고. 너처럼 믿지 않는 자에게 선행이란 아무런 효험도 없는 것일 뿐이라고.

“네가 선행을 믿는다면 그건 좋은 일이겠지. 나를 믿지 않고 원리 원칙을 위해 갈 테면 가라고. 하지만 너는 표도르처럼 돼지 새끼에 불과해. 그러니 선행이 네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너의 희생이 아무 소용도 없다면 넌 법정에 출두할 이유가 없잖아? 그건 네가 거기에 왜 가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야. 오오, 넌 네가 왜 거기에 가는지 알고 싶어서 몸부림을 쳤잖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하권,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이대우 역, 열린책들, 1136쪽)

 


모든 것을 의심하던 이반은 이렇게 불신이 만들어내는 허무의 고리에 빠져버렸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믿지 못하며 행위가 결과에 상관없이 발휘하는 영향력을 믿지 못한다. 결국 자신이 취하는 모든 액션은 의미 없는 허무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반이 믿음에 대해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믿음이란 단순한 신념 혹은 맹목적인 예스만을 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앎이 신체를 통과하고 효험을 발휘하는 것이다. 정성 성(誠)자는 후에 중용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제시되는 개념인데, 매일매일 쌓아나가는 성실함을 뜻한다. 남들을 감동시킬 수 있으려면, 또 외부와 조화를 이루어 응하려면 현장성을 가진 앎과 성실함이 있어야 한다. 매일매일, 삶의 구석구석에서 앎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증명하는 꾸준함 말이다. 이런 꾸준함이야말로 자신을 감동시키고 확신하게 만든다. 남들을 감동시키는 건 그 이후에 자연스레 따라올 문제다. 결국 공부한다는 행위에 있어서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신이 그 앎에 대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얼마만큼 납득시킬 수 있는가에 핵심이 있다. 이것이 유부의 마음이다.

정성 성(誠)자는 후에 중용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제시되는 개념인데, 매일매일 쌓아나가는 성실함을 뜻한다.
굳이 아버지 살해라는 극단적 시나리오를 상정할 것도 없다. 군자란 매분매초를 자신의 앎과 행위를 돌아보는 현실의 시험장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이반에게는 이 중간 과정이 없었다. 그의 타고난 천재성과 너무 이른 사상적 성공이 그로 하여금 정작 큰 사건 앞에서는 무력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살인범이 입만 놀리며 떠들어대는 논리에 욕을 하며 길길이 날뛸 뿐, 전혀 대항하지 못하는 이반의 태도는 소축의 진실함과 정성이 무엇인지 묻게 만든다. 그의 똑똑함은 왜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가장 먼저 설득시키지 못하는가? 소설에 비추어 알 수 있듯, 삶은 공부한 것을 시험하기 위해 늘 사건의 한복판으로 우리를 내던진다. 어떤 사전 예고도 없이 항상 눈앞의 현장을 통해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피를 뒤집어쓰고 공포와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진실한 마음과 정성으로써 소축의 위태로움을 극복하는 군자가 될 것인가? 작은 것이 큰 것을 붙들고 길러낸다는 뜻은 이런 질문으로까지 확장된다. 이 미스테리하고 다중적인 의미를 지닌 소축괘에서 내가 건진 앎에 대한 화두다.

 

글_오찬영(감이당 장자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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