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한서』, 막힌 삶을 탁 트이게 하는 사이다 역사
- 박장금(감이당 연구원)
난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왜 『한서』에 관한 글을 쓰게 된 것일까. 『한서』를 읽기 딱 10년 전, 연구실과 찐하게 접속하면서 난 명리와 동의보감과 인연을 맺었다. 재미나게 공부를 했는데 어느 순간 이 공부가 나의 좁은 시선에 갇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때 운이 좋게도 『한서』를 만났다. 여기엔 동아시아의 자연철학의 시선으로 운명과 몸을 탐구한 명리와 동의보감의 기원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 시대야 말로 운명을 적극적으로 탐구한 시대였으며 몸, 삶, 우주, 자연을 관통하는 비전과 함께 인간의 욕망의 문제를 고민했던 시대였다.
『한서』에는 정말 많은 인간들이 등장한다. 등장만도 엄청난데 각각의 캐릭터가 살아서 펄떡거린다. 처음에는 10권을 어떻게 읽어 낼까를 고민했는데 그것은 완전 기우였다. 세미나가 기본 2시간인데 2시간 30분 넘기기가 다반사였다.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까지 나머지 이야기를 하느라 집에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 만큼 『한서』는 삶, 운명, 관계 등등 우리가 풀지 못해 끙끙거리는 문제들에 대해 사방팔방으로 탁 트이는 시선을 제시해주었다. 사이다!. 어떤 지점이 우리를 속 시원하게 해주었을까.
『한서』는 개인의 능력에 주목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서』는 성공과 실패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우리에게 이런 질문 자체가 생소하다. 성공은 무조건 좋고 실패는 나쁘기 때문이다. 당시 항우는 금수저에 본투비 영웅으로 단 한 번도 진적이 없었다. 누가 봐도 천하를 차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항우는 유방에게 패하고 만다. 그리고 진을 멸망하게 만든 진섭이 있다. 그가 진을 멸망시켰으니 영웅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한서』의 진섭 평가는 우리의 예상을 깨버린다. 진섭은 보통 보다 낮은 재능과 머리였고 지혜도 없었고 부자도 아니었다. 어쩌다 요역을 면하려고 진을 공격했는데, 사람들이 구름처럼 호응해서 진을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항우는 모든 것을 타고났으나 때가 맞지 않았고. 진섭은 찌질한 자였으나 때가 맞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타이밍인 것이다. 이것이 『한서』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사실 때라는 것은 대표적인 고려 사항이고 그것 말고도 아주 많다. 항우만 해도 때가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없었고, 결정적인 건 배우는 걸 싫어했다. 정리하자면 항우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친구가 없었고, 배우고자 하는 겸손함이 없었다. 이렇듯 『한서』는 인간을 입체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왜 입체적인 사유를 못하는 것일까? 때만 하더라도 이런 방식의 사유가 낯선 것은 우리가 사는 근대가 오직 개인 또는 개인의 능력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지금까지 자연재해의 공포를 막기 위해 분투해왔다. 그 공포에서 벗어났고 우리는 물질문명의 풍요를 엄청나게 누리는 중이다. 물질적인 만족에 도취되어 우리는 내가 사는 세상. 그리고 타이밍. 나의 위치. 그리고 나의 운명에 대한 탐구는 1도 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능력만이 살길이라며 뼈 속까지 믿을 뿐이다. 우리 시대의 능력도 알고 보면 참으로 협소하다. 오직 시장에서 돈이 되는가의 능력만이 인정된다. 나 또한 상품이 되어야 하고 나의 자유도 상품을 사고 소비하는 자유만이 열려 있다. 이 시장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익을 내지 못하면 퇴출된다는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다. 어느덧 우리는 이 공포의 압력을 벗어나기 위해 사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한서』는 인간을 시장에서 퇴출될까 전전긍긍하는 협소한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인간은 ‘천지 사이의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기록한 역사 또한 하늘과 땅 사이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의 사건과 어울어 진다. 그러니 그 역사를 기술할 때 천재지변이 등장하는 건 당연지사. 특히 역사엔 이변이 기록되는데, 가을에 꽃이 피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산불이 나는 것. 천지 사이의 모든 일이 역사가 된다. 이것은 12왕조를 기록할 때도 여실히 드러났다. 왕 자체가 아니라 왕과 함께 그 시절의 배치에 주목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 속에서 새싹처럼 등장하는 혜제, 무더운 여름처럼 번성했던 무제, 추풍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에 등장한 선제, 모든 게 쓰러져 갈 때 등장한 애제, 그리고 왕의 운명을 타고나지 못했지만 여분으로 존재해야 하는 윤달 왕망까지. 모두가 각자 다른 때에 다른 운명을 타고 났다. 거기엔 우열도 선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운명과 배치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한서는 질문하고 있다. 자신의 욕망의 그물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도 자연의 변화 속에서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능력이 나를 살리지만 상황이 변하면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한서』를 읽으면서 인간과 사건을 자연의 이치 속에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부와 권력이 아니라 나에 대한 탐구가 급선무라는 것, 내가 타고난 운명을 탐구하고 그 다음엔 천지의 이치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예컨대 황제는 황제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그렇다면 박장금은 박장금답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오직 나에겐 나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아는 것만이 욕망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기 위한 전부라고 『한서』는 말하는 듯하다. 그걸 눈치 채는 순간 막혔던 체증이 내려가면서 사이다를 들이키듯, 가슴이 뻥 뚫린다. 이제 휘청거리던 삶과 결별하고 『한서』가 알려준 천지의 이치를 지도 삼아 마이웨이를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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