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 『한서』라는 역사책
밑줄긋기
무제는 장성한 아들들을 다 물리치고 겨우 여덟 살짜리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정치를 직접 돌보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어린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준 이유는 무엇일까? 무제는 자신의 아들들보다 자신을 보좌했던 신하들을 믿었다. 자신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고 마무리하여 나라를 지켜야 할 시기, 무제는 여섯 아들 중 이 일을 감당할 만한 인물은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무제가 보기에 한나라의 앞날은 곽광, 김일제, 상홍양, 차천추 이 네 명의 신하에게 달려 있었다. 유씨의 한나라가 유지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이 대신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
무제는 결단을 내린다. 장성한 아들들은 고분고분 대신들의 말을 듣기 어려울 터, 대신들이 섭정할 수 있도록 여덟 살의 막내아들을 황제로 앉힌 것이다. 무제는 과감하게 모험을 감행했다. 자신의 죽음 이후 어린 황제가 어떻게 될지, 대신들이 배신할지 그건 예측 불가. 이럴 때 무제는 장고(長考), 심사숙고(深思熟考)! 자신의 판단을 믿고 대신들을 믿을 뿐. 그리고 어린 황제가 대신들을 믿으리라고 믿을 뿐. 적어도 막내아들 유불릉에게 옳은 것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판단력이 있다고 믿을 따름이었다.
(3부 2장 가을녘의 한제국을 지키는 법, 오직 믿음뿐― 소제 유불릉, 260쪽)
50년 넘는 재위기간 동안 한나라의 '여름'을 화려하게 이끈 무제. 하지만 "절정은 곧 쇠락의 시작"이어서, 무제 말년에는 이미 개인의 생에도 한나라의 성장에도 서늘한 날이 찾아왔다. 태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에도 그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넷이나 있었지만, 숨을 거두기 직전 막내를 태자로 정하고 네 명의 신하들에게 그를 맡긴다. 여덟 살 난 아들이 "옳은 것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판단력이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믿음'에 나라의 운명을 걸고 마지막 숨을 넘기는 무제의 모습에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가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가, 문득, 그래, 여덟 살이면 "옳은 것을 믿고 따르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리고 어쩌면 이 어린 황제는 그런 아버지의 '믿음'을 언어로 표현할 만큼은 아니어도 명확하게 마음에 느꼈을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믿는다. 아이는, 아니, 사람은, 중요한 때에, 중요한 사람이 나를 믿는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기의 역할을 훌륭히 다해 낼 수 있다. 8세에 즉위하여, 21세에 요절한 소제의 이야기는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는 '믿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정치판은 피가 튀기는데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리는 중? 지금까지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었겠는가. 혜제와 고후 시대는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난 시기이다. 군신이 무위를 원하고 왕은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무위 정치에 대해서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언급하겠지만 무위를 통해 백성이 전쟁에서 벗어났다는 게 중요하다. 혜제는 팔짱을 끼고 있고 여태후는 궁궐 문밖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천하는 태평했다. 형벌이 없고, 백성은 농사에 집중할 수 있어서 살기가 좋아진 세상인 것이다.” _ 1부 4장 ‘한나라의 봄, 시련을 겪으며 온다’ 중에서(1부 4장 한나라의 봄, 시련을 겪으며 온다, 105~106쪽)
이상적인 ‘정치’라고 하면 아마도 ‘공명정대’한 비전(!)을 가지고 사람들을 잘 살게 해주는 것을 말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정치’란 시류를 잘 읽고, 음모와 모략을 통해서라도 권력을 잡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 참 정치를 잘해!”라고 말할 때, 그게 “그 사람 참 공명정대해!”라는 뜻이 아닌 것처럼요. 그래서 오늘도 정치권 사람들은 비전 따위는 어딘가에 내던져두고 서로의 추문을 물어뜯고 있나 봅니다(^^).
한고조 유방이 죽고 혜제가 즉위한 후 여태후의 권력은 하늘을 찌릅니다. 척부인을 끔찍한 처지에 떨어뜨리고, 아들 혜제도 임금 노릇을 팽개치도록 만들고, 오직 유씨 천하를 여씨 천하로 바꾸는 데 골몰했지요. 한나라의 개국 공신들은 또 여태후 치하에서 오랫동안 마음을 감추고 음모를 꾸며 여태후가 죽자마자 여씨 일족을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야말로 “피가 튀기는” 권력투쟁이 건국 초기의 한나라에서 벌어진 건데요.
『사기』와 『한서』는 공통적으로 이 시기를 ‘태평성대’라고 평가합니다. 권력의 중심에서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고, 온갖 끔찍한 일을 벌이거나 말거나, 백성들은 긴 전란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잘 먹고 잘 살았던 시대라는 겁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태평성대’는 ‘유능하기 짝이 없는’ 군주 한무제가 흉노와 전쟁을 하고 영토를 넓히고 대내외에 ‘국위’를 선양하면서, 끝이 나게 됩니다ㅠㅠ
공자가 추구한 요순시대란 천도를 실천하는 시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자가 살던 시대는 폭력과 이기심, 사치가 판을 쳤기에 그것을 멈추게 해야 했다. 즉, 『춘추』를 통해 사람들이 욕망을 멈추고 천지와 함께 리듬을 타는 길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사기』와 『한서』는 공자의 뜻을 이어받은 역사서이다. 하지만 두 역사서는 천지만물의 시선으로 시대를 보고자 한 점은 같지만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다른 만큼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다.
도도한 시간들을 살아 낸 인간들의 위대함과 치열함, 그리고 찰나에 갇힌 인간의 무지가 씨줄, 날줄로 얽혀 있는 투쟁의 터전으로서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역사라는 그 전장에서 현재를 길어 내고, 미래를 사유해야 한다. 나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의 질문을 던지면서 삶의 출구를 찾자는 것이다. 역사가 인류 지성의 경험이듯, 삶 또한 많은 것을 경험하는 일이다. 실패듯이. 중요한 것은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여기, 지금을 어떻게 잘 살아 내는가가 핵심이다. 성공한 것, 잘한 것만을 기억해서는 ‘지금 여기’를 잘 살아 낼 수가 없다. 지금 여기는 계속 다른 물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부록, 「 『한서』, 우주의 눈에서 지상의 눈으로 ‘욕망을 해부하다’」, 467쪽)
『사기』와 『한서』는 살았던 시대가 다른 것처럼, 다른 색깔로 기술된 역사서입니다. 사기는 사마천의 삶을 통해서 많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발견, 한서라는 역사책』이란 타이틀처럼 저자들은 사계의 변화로 한나라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줍니다. 한서를 읽을 때마다 때에 맞게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질문하고 탐구하게 된다고 저자들은 말했습니다. 아마도 한나라의 흥망성쇠를, 운명을 사계절의 변화로 기술했다는 점이 한서를 읽는 힌트인 것 같습니다. 한나라의 역사처럼, 살아가는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겪어내는 것이고 ‘나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의 답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도 배웁니다. 저자들의 한나라의 봄·여름·가을·겨울에 일어난 일을 관찰해서 얻은 지혜를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법은 공부하면 되지만 공감은 공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지나친 성과주의는 주체를 모든 관계로부터 소외시키기에 더더욱 공감할 수 없는 신체로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반고에 따르면 예관은 '청렴으로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자'였다. 청렴이 자신을 지키는 삶의 기술이 된다는 건 단순히 부정한 돈을 받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높은 자리를 위해 명성을 추구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아랫사람에게 몸을 낮출 줄 아는 일상을 구성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2부 4장 혹리를 만드는 사회, 210-211쪽)
본문에서는 '공부'로 '공감'을 익힐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저는 '공감'을 익히는 공부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공부'의 종류가 다른 셈입니다. 아마 앞의 '공부'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공부'일텐데,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그걸 '공부'라고 할 수 있는지도 약간 의문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그게 '공부'이기는 할 겁니다만, 저는 모름지기 진짜 '공부'는 '~를 위해'라는 형식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엔 '목적'이 없는 셈이지요. 예를들어 '삶의 기술을 위해'라는 형식조차도 벗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어떤 것을 '목적'으로 두는 순간 유연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걸 했더니 우연찮게 '삶의 기술'도 따라오고, 운이 좋아서 '출세'도 따라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공감' 그 자체가 그런 '무목적적인 공부'의 가능조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계속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능력이 더 커질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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