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8)
『노자』의 비유(1) - 암컷[牝], 골짜기[谷], 물[水]
이제 『노자』에 집중해 노자의 비유를 자세히 들여다볼 차례가 되었다. 노자의 주요 비유는 다섯 가지다. 암컷[牝], 골짜기[谷], 물[水], 갓난아이[嬰], 통나무[樸].
1. 암컷[牝]·골짜기[谷]
암컷과 골짜기의 비유가 제일 먼저 보인다. 제6장 전체가 이를 다룬다. “골짜기의 신령스러움은 죽지 않는다. 이를 그윽한 암컷이라고 한다. 그윽한 암컷의 문, 이것을 천지의 뿌리라고 한다. 끝없이 이어져 실제 존재하는 것 같으며 아무리 생산해도 수고롭지 않다.”[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緜緜若存, 用之不勤.]
‘빈 것’의 신성함
골짜기[谷]와 암컷[牝]은 ‘비었다’는 이미지를 공유한다. 비었다[孔=空=虛]는 말은 생명력을 잉태한다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골짜기는 우뚝 솟은 봉우리와 반대되는, 낮고 비고 물이 가득한 여성의 이미지다. 암컷이 쉽게 연상된다. 받아들이는 성질을 가졌으며 생명을 낳아준다. 수동성으로 보이지만 연약하지만은 않다. 여성의 이미지에는 섹스의 수동성이 잠재되어 있지만 표면적인 수동성일 뿐 자궁의 생명력을 지닌 강인한 안정성이다.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자는 골짜기는 죽지 않는다[谷不死]고 하지 않고 “골짜기의 신령스러움은 죽지 않는다”[谷神不死]고 해서 “신”(神)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도의 성질은 골짜기의 신령스러움과 같다는 말이다. 6장 전체에 숨은 주어가 도인 셈이다. 신(神)은 도의 신령한 활동성을 말하기도 하고 골짜기로 구체화했으나 형용하기 어려운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골짜기는 여성성[牝]과 같으나 단순 연상작용에서 그치지 않고 도를 암시하기 때문에 곡신(谷神)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여성성도 생물적인 여성성에 국한돼서는 안 되기에 현(玄)자를 집어넣어 현빈(玄牝)이란 말로 짝을 맞췄다.
그렇게 도를 설명해야 천지의 뿌리[天地根]라는 말이 온전해진다. 천지 작용이 전부가 아니라 천지 작용의 ‘근저’가 되는 도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추상화될까 근심스러웠던 노자는 “그윽한 암컷의 문”[玄牝之門]이라고 문(門)이라는 여성의 성기[陰門]와 맞닿은 여성성의 핵심 이미지를 써서 천지근(天地根)의 근(根)이라는 남성의 성기[陽根]라는 남성성의 말과 짝을 지어줬다. 신(神)과 현(玄)이라는 가닥 잡기 어려운 관형어로 도를 비유한 곡谷과 빈牝을 설명했으니 이 여성성[門]에 남성성[根]을 끌어와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여성을 구체화한 것이다. 무한한 생명을 낳는 여성의 이미지. 그것이 도(道)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한다고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자연의 생명[天地]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자연의 생명력[道]은 눈에 보이는 여성이나 골짜기와 같은 실체가 아니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若存]이라고 했다. 자연의 생명력은 고갈되지 않으며 수고롭게 일하지 않지만 어떤 물체인 것처럼 감각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암컷과 수컷 - 동물성의 언어
노자는 남녀라는 말 대신 ‘암수, 암컷·수컷’[雌雄·牝牡]이라는 말을 쓴다. 괴이한 습관이다. 남녀라는 말에 담긴 인간중심, 혹은 인간의 사회성, 문화적 분위기를 의식해서일까. 유가에서는 반드시 남녀라고 언급해서 동물성과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노자는 남녀라 쓰지 않고 동물성과 이어지는 말을 굳이 쓴다. 유가와 차별을 두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차별을 두고자 하는 의도가 뭘까. 아니 유가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인간의 사회성이나 문화적 특별함을 모르지 않을 텐데 노자는 방향을 자연 쪽에 두고 있다. 노자는 인간의 사회성을 재고하게 한다. 인간이 사회성을 발달시키면서 동물과 구별되어 인간만이 특별하다고 ‘당연히’ 생각하는 어떤 메커니즘을 들여다본다고 할까. 노자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고유한 능력(신령스러움, 神)은 인간끼리 모여 살면서 발현되는 게 아니라 반대로 퇴화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동물과 가까운 야생성, 혹은 자연성을 불러오기 위해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암수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도의 자연성(nature)은 암컷의 생산력이라는 고유한 능력[自然]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그것은 동물과 다르다는 차별적인 인간관에서는 천연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노자의 언어사용은 이러하다.
장자가 노자의 언어사용을 간파한 것 같다. 「덕충부」(德充符)[덕이 층만하다는 표시]에 보면 애태타(哀駘它)라는 기인(奇人)이 나온다. “위나라에 추악하게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애태타라 합니다. 남자들이 그와 함께 있으면 그를 사모해서 그 곁을 떠나려 하지 않고 여자들이 그를 보면 부모에게 청해서, ‘다른 사람의 처가 되느니 차라리 그 분의 첩이 되겠어요’라는 사람이 열 명에 그치지 않는 정도랍니다....또 그의 추악한 모습은 천하를 놀라게 할 정도인데 남과 조화를 이루고 앞에 나서서 외치지 않으며 아는 것이라곤 자기 주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헌데 자웅이 그 앞에 모여듭니다. 이 사람은 필시 남과 다른 게 있는 겁니다.”[衛有惡人焉, 曰哀駘它. 丈夫與之處者, 思而不能去也, 婦人見之, 請於父母曰:“與爲人妻寧爲夫子妾”者, 十數而未止也.,,,又以惡駭天下, 和而不唱, 知不出乎四域, 且而雌雄合乎前. 是必有異乎人者也.]
노자와 관련해 “자웅이 그 앞에 모여듭니다”[雌雄合乎前]는 말에 주목해 보자. 이 문장에, 『장자』를 편집하고 주석을 단 곽상(郭象)은, “재주가 완전한 사람은 어떠한 생물과 함께 있어도 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물 사이에 들어가도 그 무리를 어지럽히지 않으며 새들 사이에 있어도 그 행동을 어지럽게 하지 않아 만물과 함께 숲이 된다.”[夫才全者與物無害, 故入獸不亂群, 入鳥不亂行, 而爲萬物之林藪.]라고 해서 자웅을 금수라고 풀었다. 당나라 때 성현영(成玄英)은 곽상의 주석에 소疏를 붙여, “자웅은 금수를 말한다...새와 짐승이 그 앞에 무리를 지어 모여든다.”[雌雄, 禽獸之類也. 故鳥與獸且群聚於前也.]라고 해서 곽상의 주를 옹호했다. 한편 청나라 때 왕선겸(王先謙)은 『장자집해』(莊子集解)에, 선영(宣穎)의 『남화경해』(南華經解)를 인용해, “여자와 남자 모두 그에게 와서 친해진다.”[婦人丈夫皆來親之.]라고 했다. 선영은 자웅을 앞 문장에 나왔던 남녀를 가리킨다고 본 것이다. 현대의 해석은 대체로 자웅을 남녀로 본다.
중요한 점은 장자가 자웅이라는 말을 썼다는 사실이고 이는 주석가들 사이에 다른 의견이 보인다는 거다. 곽상을 비롯한 옛 주석은 자연과 일치되는 도가적 인물의 덕성에 주목해 동물들과도 교감이 이루어진다는 예증으로 읽었다. 원문에 “차이”(且而)라는 말이 보이는데 문자 그대로 ‘덧붙여 무언가 더 있다’는 의미로 풀었던 것. 후대의 주석은 문맥을 중시해 원문의 “우又”이하를 앞선 문장의 요약으로 보고 강조를 위해 다시 되풀이한 문장으로 해석했다. 시비를 가리려는 게 아니다. 노장이라는 사상에 강조점을 주어 화제가 된 인물 애태타를 도드라지게 한 점에서 곽상의 주는 취할 점이 있으며, 문장의 흐름과 내용을 보아서 글을 설명할 때는 청나라 주석가들의 해석도 참고할 만하다. 자웅이란 말은 남녀를 가리키면서 짐승도 가리킬 수 있다. 그 함의를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은 노자였고 장자는 그 용례를 더 풍부하게 했다. 자웅이라는 비유나 쓰임새가 중의적이라 애매한 게 아니라 중의적이기에 읽기 층위가 더 두터워졌다. 『노자』에서 시작된 비유가 『장자』에서 더 정교해진 것이다.
2. 물의 이미지
여성의 생물적 이미지만으로는 도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다. 다른 비유를 보자. 골짜기와 암컷이 나왔으니 물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연상되는 이미지). 물 없는 골짜기와 물 없는 여성은 상상하기 어렵다. 유명한 8장을 보자.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길 잘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렇기에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하류’에 처한다는 것의 의미
‘도이다’라 하지 않고 “도에 가깝다”고 했으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若存]이라는 말과 같은 방식이다. 물은 도가 아니다, 도를 물의 성질에 가깝다고 에둘러 말할 뿐. 물의 성질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 여성의 물이 생명과 관계있는 것처럼 생명은 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가장 고귀한 일을 하되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 세상의 여성과 다르지 않다. 만물을 이롭게 하건만 모두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한다. 누구든 상류(사회)에 머물려 하지 하류(사회)로 흐르려 하겠는가. 낮은 곳을 겸허라고 풀이하면 하류라는 말에 격조가 생길 수 있을까. 물이 낮은 곳으로 향하는 것을 노자는 다투지 않기[不爭] 때문이라고 했다. 경쟁력이 삶의 기준이 되고 경쟁이 내면화된 사회에서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향하는 자세라니.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處衆人之所惡]는 말은 따로 겨냥하는 곳이 있다. 『논어』 「자장」(子張)에, “자공이 말했다. ‘주紂의 불선不善이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하류에 있기를 싫어한다. 천하의 악이 모두 이곳에 모이기 때문이다.’”[子貢曰:紂之不善, 不如是之甚也. 是以君子惡居下流. 天下之惡皆歸焉.]는 글이 보인다. 자공은 천하 악행의 대명사 주紂(임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동네 개이름 부르듯 이름만 부른다. 경멸의 표시다)를 변호하려 한 말이 아니다. 누군가 악인으로 낙인찍히면 그에게 죄다 잘못과 악행을 쏟아 붓는 인간 심리의 어떤 면을 정확히 간파한 발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세상살이에는 자공의 말이 호소력 있고 마음에 와닿지 않을까. 자공다운 현실적인 말이지만 인간성을 통찰했기에 기억할 가치가 있다. 이에 견주면 노자의 말은 얼마나 당위에 가까운가. 사람의 세상살이에서 윤리적 당위보다 처세적 지침이 힘이 세지 않은가. 그걸 모를 리 없건만 노자는 윤리적 당위를 앞세운다. 그 힘 좋은 처세술을 헤치고 낮은 곳에 처하길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면서. 도라는 궁극 목표를 상정하기에 처세 따위 하잘 것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쉬운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깨닫지 못한다면 말이다. 노자는 물의 성질에 집중한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것을 물을 가져와 부쟁(不爭)을 끄집어내고 인간 행동 전반으로 확대한다. 인간 행동이 앞에 인용한 문장에 이어진다. 그리고 내리는 결론, “다투지 않는다, 그렇기에 허물이 없다.”[夫唯不爭, 故無尤.] 노자는 물을 빌려 다투지 않는 도의 성질을 말한다. 다툼은 처세로 읽으면 인간관계의 마찰이기도 하고 당시 국가 관계를 염두에 두면 나라 사이의 쟁투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는 처세나 국가 사이의 쟁투 같은 현실[형이하학]이 아니라 그것을 끌어안고 고원한 것을 지향하는 형이상학이기 때문에 꼭 현실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를 철학의 대상으로, 형이상학적인 체계로 얘기하길 즐기기 때문에 현실과 분리시키는 독법은 어색하지 않은 대응이다. 그럼에도 노자를 어떤 한 시대가 탄생시킨 사고체계라는 관점에서 역사성을 수용한다면 다르게 볼 여지도 있지 않을까. 8장의 숨은 주어를 인간 일반으로 보지 않고 임금으로 보는 건 어떨까. “상선약수”와 같은 도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임금을 그려보는 것이다. 통치술과 관련성이 생기면서 물의 이미지가 현실성을 띤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78장에 유사한 진술이 보인다. “천하에 물보다 유약한 것은 없으나 굳세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데 물을 이길 것은 없다. 물은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기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건만 행하지를 않는다. 이 때문에 성인은 말했다. ‘나라의 더러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사직의 주인이라 이르며, 나라의 상서롭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 된다.’ 바른말은 거꾸로 된 것 같다.”[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是以聖人云, 受國之垢, 是謂社稷主, 受國不祥, 是爲天下王. 正言若反.]
여기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물의 비유가 유약(柔弱)으로 성질이 더 추가되고 강함[堅强]을 이기는 예를 들면서 8장의 말을 강화한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은 강함을 이기는 유약함을 갖추었기에 자공의 비유와는 차원이 다르다. 자공은 하류의 저수지스러운, 온갖 쓰레기가 모이는 장소를 떠올렸으나 노자는 저수지스러운 모든 걸 포용하는 너른 품새를 헤아렸다.
논리를 비약해 보자. 높은 봉우리를 지향하고 널리 공덕을 베풀되 상응하는 대가를 당연히 여기는 공자 제자 세대의 유가가 한편에 있고, 봉우리가 아니라 골짜기를 사랑하고 물처럼 널리 공덕을 베풀어 생명을 낳고 기르되 공덕을 숨기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아래로 향해 가서 온갖 쓰레기까지 끌어안는, 강함을 이기나 유약을 간직한 물의 노자가 다른 한 편에 있다. 또한 물은 78장처럼 주체가 임금으로 명시될 경우 정치철학으로 이동한다. “굳세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데 물을 이길 것은 없다”[攻堅强者莫之能勝]는 말은 당시 전쟁에서 쓰였던 수공水攻의 실례를 가져온 말이기에 비유는 강력한 현실적 환기력을 갖는다. 물은 일상적인 만큼 현실성이 강한 존재이다.
43장에서는, “천하에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에 지극히 강한 것을 휘몰고 간다. 아무것도 있지 아니한 것이 틈이 없는 곳에 들어간다”[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閒.]라고도 했다. 지극히 부드러운 것[至柔]은 물을 비유하고 지극히 강한 것[至堅]은 돌을 가리킨다. 장마철에 집채만 한 바위가 물에 떠밀려가는 것을 기억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아무것도 있지 아니한 것[無有]은 공기 혹은 기氣라는 물질을 생각할 수 있다. 도는 물처럼 공기처럼 도처에 있다고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선언할 수 있건만 노자는 거기까지 나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넉넉히 감지한 것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추상성이 강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류라는 말은 여성성과도 결부된다. 61장을 보자. “큰 나라는 하류다. 천하의 모든 것이 모이며 천하의 암컷이다. 암컷은 늘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아래에 자리한다.”[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요즘 말로 하면 국제정치에서 대국과 소국의 관계를 말하는 부분이지만 그 주제는 건너뛰기로 하자. 우리의 주제는 여성성의 비유이니까. 61장에서 여성성은 고요함[靜]이라는 성질로 설명되면서 포용성을 갖는다. 물과 여성성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이 여기서 명백해진다. 노자의 비유는 골짜기에서 여성으로 물로 이어지고 낮은 것에서 유약으로 포용성으로 확대되지만 빌려오는 비유물의 성질을 잃지 않는다. 비유의 지향점은 처세로도 읽을 수 있고 정치철학으로도 수용되며 형이상학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도(道)라는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노자의 비유는 강력하다. 비유는 물처럼 공기처럼 곳곳에 스며든다.
“바른말은 거꾸로 된 것 같다”[正言若反]는 말은 소박하게 해석해서 유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을 가리키는 정의로 봐도 무방하다. 더 멀게는 도를 비유하는 자신의 언술을 가리킨다고 해석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도를 비유하고 가리키는 올바른 말이지만 얼마나 세상 사람들의 선입견이나 인식과 반대되는가. 도를 우람하게 설명하고 거창하게 풀어놓는 것과 얼마나 상반되는가. 다시 한 번 노자의 비유를 풀어써 보자. 골짜기와 여상과 물을 가져온 비유는 깊고 낮고 유약하고 비었고[虛] 다투지 않고 양보하며 너르게 품는다.
물에 대한 사유
물의 비유는 다른 면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노자』만 물을 특화해서 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은 춘추전국시대 문헌 곳곳에 보인다. 『손자』(孫子)에도 물은 존재를 드러내며 『논어』에도 물은 빈번하게 나타난다. 『맹자』에서도 물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장자』에서는 물을 독립적으로 다룬 「추수」(秋水)라는 편이 따로 존재한다. 『순자』에도 “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논어』의 말을 설명하는 개별 논문이 실려 있다. 『관자』(管子)에 이르면 「지수」(地水)편에서 생명과 관련해 물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그렇다고 언급한 책들이(『논어』도 한나라 때 편집됐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모두 『노자』 후대에 성립된 문헌들이라 『노자』의 영향권 아래 있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노자』와 동시대 혹은 이전 시기에 물에 대해 깊이 사유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다른 판본이 발견된 곽점에서 『노자』의 고본과 함께 현재 태일생수(太一生水)라고 불리는 죽간 14쪽이 발견됐다. 이 희한한 문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태일은 물을 낳는다. 태어난 물은 다시 태일을 돕는다. 이 때문에 하늘을 이룬다. 하늘은 다시 태일을 돕는다. 이 때문에 땅을 이룬다.”[太一生水, 水反輔太一, 是以成天. 天反輔太一, 是以成地.] 이 글은 분명 태일(太一)이라는 도(道)라고 칭할 수 있는 궁극의 힘 혹은 원천, 원리를 언급하면서 우주 탄생을 말한다. 물은 이때 태일을 원리로 천지를 낳는, 천지 이전의 상위개념으로 언급된다.
이 글이 중요한 까닭은 물에 대한 노자의 사유가 독특하다는 사실을 재고하게 한다는 점이다. 물에 대한 사유가 독창적이 아니라 해서 『노자』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사상이 꼭 독창적일 필요는 없다.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고를 기록한다는 점으로도 사상은 가치가 충분하다. 앞서 나열한 책들 역시 ‘태일생수’(太一生水)라고 했던, 물에 대해 깊이 사유했던 계열의 사고를 은연중에 동의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말은 ‘태일생수’(太一生水)를 독창적인 위대한 사유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물에 대한 사고는 지극히 당연한 관심에서 출발할 수 있다. 생명의 근원으로서 누구든 물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곽점에서 발견된 이른 시기의 죽간에 고차원적인 물의 사유가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물에 대한 생각이 연원이 오래됐으므로 누구의 배타적인 소유로 인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여러 책에서 보듯 고대인들의 사유에 두루 물의 이미지와 비유가 보이면서 단순 비유에 머물지 않고 근원적인 사고 차원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물의 비유는 수사학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하다는 사실이다.
물에 대한 사유는 따로 책을 쓸 수 있을 만큼 포괄적이고 근원적이다. 이런 이유를 통찰했기 때문에 노자는 물에 대한 사유를 깊고 넓게 쓸 수 있었다. 다른 학파 혹은 사유방식과 접점이 크고 광범위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유가 자신만의 색채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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