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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7)

by 북드라망 2021.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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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7)
『노자』의 주석 3 - 상이주(想爾註)

 

3. 상이주(想爾註)

상이 주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명칭마저 낯선 이 주석은 텍스트 일부분만 전해져 온전치 못하다는 단점과 함께 특정 종교의 경전이라는 편견이 달라붙어 외면된 사정이 있다. 하상공 주와는 다른 면에서 사람들의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역사서에서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이상한 종교로 낙인찍고 이단이라는 편파적인 언설로 딱지를 붙였으니 몇 겹의 더께를 걷어내고 가치를 얘기한다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럼에도 상이 주를 이야기하는 까닭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양생술과 관련된 자료를 담고 있어서이며, 둘째, 노자 해석의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강조컨대 자유롭고 다양한 해석에 경전을 노출시키는 작업은 글읽기를 새롭게 하고 상상력에게 다른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작지 않다.

 


(1) 오두미교
오두미교란 무엇일까. 사전은 ‘오두미도(道)라고도 부르는 도교의 일파’라고 설명한다. 『후한서』(後漢書) 「유언전」(劉焉傳)에 기록된 부분을 주로 인용한다. 장릉(張陵)이 학명산(鶴鳴山)에서 도를 배워 부적[符書]을 조작해서 백성들을 홀리고 그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오두미를 받았기 때문에 미적[米賊. 쌀도적놈?]이라 했다고. 관찬(官撰) 기록이라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무리였다는 판단이 깔려 있어 쓰는 언어 자체가 편향되었다. 조작(造作)했다거나, 홀렸다[惑]거나, ‘미적’이란 말을 쓴 걸 보면 그렇다. 해당 지방의 전설과 이야기를 많이 수록해 가치가 높은 지리서 『수경』(水經) 면수주(沔水注)에는, 장릉이 도를 아들에게 전하고 아들은 또 아들 노(魯)에게 전했는데 노가 백성에게 관대하고 은혜를 베풀어[寬惠] 도의 제사를 받드는 비용을 쌀 오두를 받았다고 해서 오두미도라고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중(漢中) 지역에 영향이 컸던 오두미교에 대한 기록은 『수경』 쪽이 특정 종교가 백성들에게 파급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더 관심을 끈다. 상이주의 저자를 장릉으로 보기도 하고 장릉에서 장로까지 3대에 걸친다고 의견이 갈라지는 것도 장로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는 반증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오두미’라는 말은 하급관리의 박봉이라는 전거로 쓰이기도 하는데 도연명전(傳)에, 관직을 그만둘 때 오두미 때문에 시골 소인배(상급자)에게 허리를 굽히겠냐며 한 말로 유명하다. 박봉이었다고는 하나 백성 편에서 보면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양이었으리라. ‘미적’이라는 말도 한편으로는 그런 뜻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 있으리라. 

(2) 상이주의 특징 1 _ 선악의 분명한 구분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 오두미교의 전모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데 상이주를 보면 백성들과 관련해 선행에 대한 권면과 양생술에서 접근한 방식이 주목할 만하다. 현재 전하는 텍스트가 도경 부분(1장, 2장 없음)이기 때문에 통치술이 집중된 덕경 부분을 볼 수 없지만 남은 자료로 상이주의 특징은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선에 대한 의견. 5장을 보자. “천지는 어질지 않다. 만물을 풀이나 가축으로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왕필과 하상공은 인위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 무심한 천지라는 큰 틀에서 풀었는데 이런 견해에 유가적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도가적 비판이 암시되었음은 앞에서 언급했다. 상이주는 이렇다. “천지는 도를 닮아 모든 선에는 어질지만 악에는 어질지 않다. 그러므로 악한 만물은 죽이고 아끼지 않는다. 악한 것을 풀이나 가축처럼 볼 뿐이다.”[天地像道, 仁於諸善, 不仁於諸惡. 故殺萬物惡者不愛也. 視之如芻草如狗畜耳.] 인(仁)을 선악에 대응시켜 해석했다. 선악의 경계를 뚜렷이 해서 악인을 죽인다는 말까지 했다.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정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도 분별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안고 갔을 것이며 중요한 점은 악행에 대해 용서하지 않아 두려움을 주려 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상식적인 사고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소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민간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언설일 것이다. 다음 구절도 이와 관련된다.


“성인은 어질지 않다. 백성을 풀이나 가축으로 여긴다”[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라는 본문에, “성인은 천지를 본받아 선인에겐 어질고 악인에겐 어질지 않다. 정치를 담당했을 때 악인을 죽여 역시 풀이나 가축처럼 본다. 이 때문에 사람은 선행을 쌓아야만 하니 그 정기와 정신은 하늘과 통한다.”[聖人法天地, 仁於善人, 不仁惡人. 當王政殺惡, 亦視之如芻草也. 是以人當積善功, 其精神與天通.] 앞의 글보다 논지가 명확하다. 현실정치에 적용했을 때 악인을 죽이라고 명확하게 언급한다. 그 논리적 귀결은 선행. 여기서 말하는 선행은 이념형이나 고원한 사고로 진전되지 않는다. 선악에 대한 담론이 이런 수준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종교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선악에 대한 이분법과 흑백논리인데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3) 상이주의 특징 2 _ 양생술
상이주의 현저한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을 볼 차례다. 6장 전체가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신을 죽게 하지 않으려는 것을 현빈이라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는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는다. “곡은 바란다는 말이다. 정기(생명력)가 모여 신(神, 생명력이 발현된 상태)이 된다. 신이 죽지 않도록 하려면 정기를 모아 자신을 지켜야 한다. 빈은 땅이다. 그 모습과 성질이 편안하다. 여자들이 이것을 본받았다. 그러므로 앞서서 끌고 가지 않는다. 남자들은 정기를 모으려 한다면 마음은 땅을 닮고 여자와 같아야 하며 일의 선두가 되지 않아야 한다.”[谷者, 欲也. 精結爲神, 欲令神不死, 當結精自守. 牝者, 地也. 體性安, 女像之, 故不掔. 男欲結精, 心當像地似女, 勿爲事先.]

 


보통 곡신을 한 단어로 묶어 ‘골짜기의 신’ 정도로 풀어 뒤의 “현빈”과 동일어로 이해한다. 곡이라는 빈 곳이 빈(牝)이라는 여성성과 짝이 되고 가시적이고 형체가 있는 것[有形]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천지를 논의하기 위해 형체가 없는[無形] 도에 가까운 상태를 지시하기 때문에 신이라는 말과 현이라는 말을 앞에 두었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해석한 왕필이 그렇다. 곡(谷)―빈(牝)으로 이어지는 계열을 상이주는 신(神)―빈(牝)으로 이해했고, 현(玄)이라는 도가 특유의 언어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땅과 여자와 빈을 연결하는 사고는 낯설지 않다(빈牝이라는 한자 자체가 암컷의 성기 모양을 상형한 것이다). 수동성과 이어지는 곳이기도 한데 “앞서서 이끌지 않는다”라는 말로 표현했고 남자들이 본받아야 한다면서 “일의 선두가 되지 말라”고 반복했다. 생명력의 저장소로서 여성성을 나타내는 말로 읽은 것이다. 


하상공 주와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눈에 들어온다. 하상공 주는 양생의 방식으로 읽었다는 점에서 상이주와 통한다. 하상공은 곡을 ‘돌본다’는 말로 보았다.[谷, 養也.] “사람이 신(神)을 잘 보살필 수 있다면 죽지 않는다. 신은 오장의 신을 말한다. 간은 혼을 간직하고, 폐는 백을 간직하며, 심은 신을 간직하고, 신장은 정을 간직하며, 비장은 뜻을 간직한다. 오장이 다 상하면 다섯 신이 떠난다”[人能養神, 則不死也. 神, 謂五藏之神也. 肝藏魂, 肺藏魄, 心藏神, 腎藏精, 脾藏志, 五藏盡傷, 則五神去矣]. 하상공 주는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첫째, 인간의 몸에 깃든 신(神)이 통칭이라는 것이 기억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각각의 장부(藏部)에 배속시킨 혼·백·신·정·지는 인간의 에너지와 의지, 정신과 사유작용 등을 포괄하면서 연결되어 특정장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영어로 각각 간(liver), 폐(lung), 심장(heart), 신장(kidney), 비장(spleen)으로 배속시킬 수 없다. 심(心)이 특히 문제인데 심은 심장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음이 우리를 움직인다고 할 때 심(마음)이 장기 전체를 통괄하듯이 신(神)이 다른 기능을 대표한다고 본 것은 정확하다. 한나라 때의 오행사상이 신체를 보는 의학과 결합하면서 한의(漢醫)라는 고대의학이 정착한 것을 여기서 목격할 수 있다. 
하상공이 현빈이라는 말에 붙인 주도 눈길을 끈다. “불사의 방법이 현빈에 있음을 말한다. 현은 하늘이다. 사람에게는 코에 해당한다. 빈은 땅이다. 사람에게는 입에 해당한다. 하늘은 사람에게 오기(다섯 가지 기운. 찬 것·더운 것·건조한 것·습한 것·바람[寒暑燥濕風])를 먹여 주는데 코로 들어와 심(心)에 간직된다. 오기는 맑고 미묘해 정(精)과 신(神), 듣는 것과 보는 것, 음성과 오성(다섯 가지 본성. 仁義禮智信)을 이룬다. 거기 깃든 원천을 혼(魂)이라 한다. 혼은 수컷이다. 인간의 몸을 출입하는 것이 중심작용이며 사람의 코는 하늘과 통한다. 그러므로 코는 현(玄)이다. 땅은 인간에게 오미(다섯 가지 맛. 신맛·단맛·쓴맛·매운맛·짠맛)을 먹여주는데 입으로 들어와 신(腎)에 간직된다. 오미는 탁하고 깨끗하지 않아 형체와 골격, 뼈와 살이 되고 혈맥과 육정(여섯 가지 감정. 喜怒哀樂愛惡)이 된다. 거기 깃든 원천을 백(魄)이라 한다. 백은 암컷이다. 인간의 몸을 출입하는 것이 중심작용이며 사람의 입은 땅과 통한다. 그러므로 입은 빈(牝)이다”[言不死之道, 在於玄牝. 玄, 天也, 於人爲鼻. 牝, 地也, 於人爲口. 天食人以五氣, 從鼻入, 藏於心. 五氣淸微, 爲精神聰明, 音聲五性, 其鬼曰魂. 魂者, 雄也, 主出入, 人鼻與天通, 故鼻爲玄也. 地食人以五味, 從口入, 藏於腎. 五味濁辱, 爲形骸骨肉, 血脈六情, 其鬼曰魄. 魄者, 雌也. 主出入, 口與地通, 故口爲牝也]. 현과 빈을 독립된 개념으로 풀이해 하늘과 땅에 각각 대응시켰다. 호흡과 먹는 것으로 해설해 양생술로 가는 길이 곧바로 이해된다. 앞에 나온 곡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의외로 양생이라는 컨셉에서 상이주와 저변에서 통한다. 한나라라는 특정 시대의 어떤 분위기를 헤아릴 수 있을까.  


(4) 상이주의 특징 3 _ 정(精)을 아껴라
이와 연결되는 다음 구절을 보자.   
“어두운 골짜기는 생사의 문이자 천지의 뿌리다”[玄牝門, 天地根]라는 상이주의 본문은 왕필본과 하상공본에, “玄牝之門, 是謂天地根”이라 했는데 세 글자로 줄여 더 압축시켰다. 주석을 읽어 보자. “빈은 땅이다. 여자들이 이를 본받았다. 어두운 구멍(여성 성기.여성 성기를 음문 陰門이라고 한다)이 문이다. 생사를 관장한다. 가장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뿌리라고 했다. 남자의 성기도 뿌리라고 한다.”[牝, 地也, 女像之. 陰孔爲門, 死生之官也. 最要故命根. 男荼亦名根.] (주석에 나오는 남도男荼는 남성의 성기 모양으로 만든 노리개[荼]를 말한다. 나무나 옥, 쇠뿔로 만든다. 전통시대에는 ‘각좆’이라고 불렀다. 장돌뱅이의 생활을 다룬 김주영의 소설 『객주』(客主)에서 이 단어를 본 기억이 있는데 정확한 명칭이기는 하나 노골적인 이름이기도 해서 요즘 사람들에게는 딜도(dildo)라는 외래어가 더 익숙할 수도 있겠다.)


왕필은 현(玄)이라는 글자에 의미를 두어 만물을 낳는 신비한 작용을 표현한 글자로 이해했다. 유교에서는 천지가 만물을 낳아준다는 생생지리(生生之理)를 중시하는데 현을 그와 통하는 글자로 보아 송대 유학자들이 상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천지근(天地根)도 천지가 이곳에서 생겨난다는 의미로 풀 수도 있기에 현은 도(道)를 형용하는 말로 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요컨대 왕필은 도의 오묘한 현상과 천지자연의 탄생에 대한 큰 담론으로 읽은 것이다. 곡―빈―문―근으로 이어지는 일관된 사고를 감지할 수 있다.


하상공은 앞 문장을 토대로 근(根)에 주목했다. “근은 근원이다. 코와 입이라는 문은 천지의 원기가 통해 이곳으로 왕래하는 것을 말한다”[根, 元也. 言口鼻之門, 是乃通天地之元氣, 所從往來]. 


상이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읽었다. 현빈을 여자의 성기로 읽어 생명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읽은 게 그렇다. 천지라는 말에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모든 생명’의 뿌리라는 말보다 뿌리라는 말에 강조점을 주었다. 천지가 남녀의 상징으로 통용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까. “천지근”에 대한 설명이 “현빈문”과 연결되는 지점에 핵심어 “천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논리적으로 약해 보인다. 여하간 남녀의 결합에 대한 설명이 갖춰졌으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다.  


“미약하게 배출하면 길이 살 것이다”[緜緜若存]라는 말에는, “음양의 도는 정기를 모으는 것 같은 방식으로 삶을 누린다. 나이로 생명을 알 수 있으므로 생명에 관련되는 문제에는 스스로 절제해야 한다. 젊을 때에는 정기가 풍부하더라도 막고 소모되지 않도록 줄여야 한다. 면면은 작다는 말이다. 미미하게 소량을 배출하는 방식을 따르면 젊은이와 같이 되어 장수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이 큰 해가 될 수 있는데 음양의 도를 만든 것은 어째서인가. 도는 제사를 잇고 자손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중하게 여기므로 정기를 합쳐 생명을 낳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젊은이에게 정기를 막고 소모되지 않게 줄여 자손이 끊기지 않도록 하고, 힘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힘을 낭비하는 계책은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陰陽之道, 以若結精爲生. 年以知命, 當名自止. 年少之時, 雖有, 當閑省之. 緜緜者, 微也. 從其微少, 若少年則長存矣. 今此乃爲大害, 道造之何. 道重繼祠, 種類不絶, 欲令合精産生. 故敎之年少微省不絶, 不敎之勤力也. 勤力之計, 出愚人之心耳, 豈可怨道乎.]


이 구절의 메세지는 명확하다. 정(精)을 아끼라는 것. 정은 생명의 정수[精]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는 정액[精]이기도 하며 정력[精]으로 통용되기도 하는 일종의 에너지다. 소모하지 말고 자손을 위해서만 사용하라는 말이 흥미롭다. 이런 관점에 서면 자손을 위한 행위를 빼면 방탕한 행동이 되고 마는데 이런 식의 비현실적인 도덕적 훈계와 비난보다는 장생을 위한 길이라는 우회로를 만들어 정의 낭비를 방지했다. 장생을 위해 정을 아끼는 게 우선이고 자손 유지를 위해 인간의 도리를 행해야 한다는 선에서 가이드라인을 정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나친 방중술(음양의 도)에 대한 경계다.

 


하상공은 코와 입에 중심을 두고 주석을 붙였으므로 이것으로 일관한다. “코와 입으로 호흡하며 들이마시고 내는 행위는 미묘하게 이어져 겨우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호흡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한다”[鼻口呼噏喘息, 當綿綿微妙若可存, 復若無有]. 호흡법과 방중술로 해석해 기(氣)와 정(精)이 갈라지는 미묘한 차이. 그러나 양생술이라는 공통점.
“방중술에 힘쓰지 않아야 한다”[用之不勤]는 마지막 구절에 상이주는, “이러한 방식을 실행할 수 있으면 응당 신선의 생명을 터득할 것이니 남녀의 일은 아끼지 않을 수 없다”[能用此道, 應得仙壽, 男女之事, 不可不勤也]라고 했다.


  앞 구절 “緜緜若存”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근(勤) 자 풀이에 혼선이 생길 수 있는데 앞에서 “緜緜若存”에 주석을 붙이면서 주석자는 근(勤) 자를 몇 번 썼다. 근에는 ‘힘쓰다’라는 말 이외에도 ‘지치다, 아끼다(혹은 근심하다)’라는 상반되는 의미가 있어서 문맥을 보아야 한다. 본문에는 불근(不勤)이라 했는데 주석에서는 불가불근(不可不勤)으로 풀어 헷갈릴 수 있다. 왕필은 “緜緜若存”을 현(玄)의 작동으로 보아 하늘의 뿌리가 보이지도 않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희미하게 있는 것 같은 모양이지만 아무리 사용해도 지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하상공은, “호흡법은 항상 천천히 여유롭게 해야지 급하고 빠르게 애써서 하면 안 된다”[用氣常寬舒, 不當急疾懃勞也]고 했다. 왕필의 시각과 견주어 보면 상이주와 하상공주는 해석 차이가 크다. 

 


지금까지 3주에 걸쳐 세 편의 주석을 단편적으로 살펴보았다. 비교해 보면, 왕필의 해석에는 철학적이고 심오한 면이 두드러진다. 추상적이고 고차원적인 해석을 유지하는 데엔 위진시대의 분위기가 배경에 놓여 있다. 충분한 배경 설명이 담기지 않아 한 천재의 탁월한 업적이라는 세간의 과장된 인식을 강화시키지 않았나 조심스럽다. 하상공 주는 부당하게 소외된 저술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제왕학과 양생술의 결합이라는 얼핏 다른 범주의 사고를 섞었다는 오해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면 첫발은 제대로 뗀 것이다. 상이주는 소개만으로 만족하고 싶었다. 다른 주석들과 비교하지 않으면 어떤 모습인지 감을 잡기 힘들 것 같아 해당 부분의 다른 주석 인용이 불가피했다. 상이주는 주석에서 앞에서 한 말을 다시 되풀이 설명하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으나 방중술을 비판하면서 새 방중술의 가능성을 논의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 같다. 도교의 양생술 가운데 하나가 방중술임은 세속적 형태든 뒤틀린 말로든 널리 알려졌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노자에서 파생되었는지 실체를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겠다. 상이주에서 세 주석을 비교하면서 각각의 색깔을 드러내 보았다. 세 주석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여러 주석을 배치해 다양한 해석을 열어 놓는 것이 풍부한 읽기 방법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 동안 남의 얘기를 늘어놓았으니 이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을 차례가 되었다.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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